완전한 길
시편 101편
학창 시절 선생님들께서 학생들에게 자주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 너희들의 성적이 바닥이라 할지라도, 현실이 어렵다 할지라도, 목표만큼은 높은 곳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학생들 중에 선생님들의 그런 말씀에 동의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현실이 지금 바닥인데 높은 곳에 눈을 둔다고 해서 그것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나중에 시간이 지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더 커지고 나면 상실감만 더할 것인데, 눈높이를 너무 높이는 것은 오히려 더 불편하지 않겠느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선생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참으로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현실에 바로 타협하지 않고 보다 더 높은 목표를 두고서 오늘 이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다 보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셨는데, 연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안 된다고 던져 버리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 된 삶, 예수님의 제자 된 자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교훈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5)
바울은 우리 신앙인들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목표를 예수님에게까지 잡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한낱 인간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목표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현실적인 목표를 주셨다면 더 마음이 편했을 것입니다. 주변에 믿음 좋은 사람, 신앙이 깊은 장로님이나 권사님 같은 분들을 본받고 따라가라 하셨다면, 마음도 편하고 그것은 할 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제자는 선생님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을 목표로 삼으면 그 사람이 넘어질 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항상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 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인간, 그 사람이 넘어지면 그분을 내 신앙의 목표로 삼고 따라가다가 나도 함께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일어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로 잡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자와 정의의 결단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은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이 정하고 있는, 우리가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 101:1)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다"는 고백은 다윗이 인자와 정의를 벗 삼고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항상 입술에 인자와 정의를 두고 있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현실정치인이었습니다. 그가 왕이 된 이후에 이 시를 지었는데, 그는 통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왕이 어떻게 현실을 통치하면서 백성들을 인자하게, 백성들에게 정의롭게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사실 왕이 하는 일은 결정하는 일입니다. 임금이 결정하는 일이 모든 사람에게 인자하고 모든 사람을 정의롭게 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정치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때도 있고, 외교적인 판단을 해야 할 때도 있으며, 그 판단 가운데서 다수의 백성들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다"고 한 까닭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때 그에게 정체성을 분명히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삼하 7:8)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으실 때 그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웠다는 선언입니다. 다윗은 현실 정치인이기 이전에 이스라엘의 목자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자였습니다.
목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우선은 목자장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양을 돌봐야 합니다. 두 번째는 양들에게 참으로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목자이지만 양들을 자기 마음대로 끌고 다녀서는 안 됩니다. 목자장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되 일반적인 왕이나 군왕과 다르게 통치해야 했습니다. 목자로서 양들을 잘 섬기고 돌보는 아주 좋은 목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목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양들을 인자하게, 정의롭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현실보다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던 말씀을 붙잡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세상에서도 살고 있는 세상살이를 하는 직장인들이고, 일터가 우리에게 있고,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한가득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쉽게 현실을 이야기하다 보면 이상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현실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정체성을 기억하지 못하고 산다면 우리는 항상 현실을 입에 올리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말씀은 항상 저 멀리 뒤편에 던져두고 살게 될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항상 기억하고,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완전한 길의 유익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 101:2)
다윗은 또한 왕으로서 완전한 길을 입에 올립니다. 완전한 마음을 입에 올립니다. 사실 임금이 나라를 통치하는데 어떻게 모든 하는 일이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불가능을 먼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완전한 길로 행하겠습니다.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겠습니다." 목표를 완전한 데다가 두고, 항상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처 복종시키며, 매일매일 결단하고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유익이 있습니다.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시 101:4)
완전한 길로 행하는 자에게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유익은 사악한 마음이 나에게서 떠난다는 것입니다. 사악한 길로 행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고, 언제나 좋은 것을 보고 선한 일을 하려고 분투하고 애를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악한 일들이 나에게서 떠나게 됩니다.
그냥 마음속 다짐으로 "악한 일을 멀리해야지", "오늘은 악한 사람들과 함께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마음으로만 다짐하고 결심한다고 악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완전한 길로 행하려고 노력하고 분투하고 투쟁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악이 떠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완전한 길로 행하면 악한 길은 자연스럽게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그 길을 우리에게 먼저 일러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투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악은 자연스럽게 떠날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 완전한 길이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가까이 올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동역자
완전한 길로 행하면 또 한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시 101:6)
내가 완전한 길을 추구하고 따라가다 보면 충성된 사람이 나를 따릅니다. 또 완전한 길을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를 따라옵니다. 이것은 곧 믿음의 동역자를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나서 아둘람 굴에 있을 때 원통한 자, 억울한 자, 마음이 상한 자들 사백 명이 다윗에게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이 세상에 부적응한 자들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악한 왕 사울에게 동조하지 않는 순결한 사백 명이었습니다. 다윗이 충성된 길로 행하고 완전한 길로 행하려 할 때, 그때 하나님은 좋은 믿음의 동역자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한 번은 다윗이 전쟁을 치르던 중에 혼잣말로, 지나가는 말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고향 베들레헴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싶다"고. 그때 다윗의 용사 세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적진을 뚫고 들어가서 우물 물을 길어다가 다윗에게 갖다 줍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녀온 충성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이 완전한 길로 행하려고 했을 때, 그때 하나님은 돕는 사람들을 허락해 주시고 좋은 믿음의 동역자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데 좋은 동역자들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것은 기도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완전한 길로 행하려고 분투하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들을 내 곁에 허락해 주십니다. 좋은 돕는 자들을 허락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의 길을 분투하고, 복음 전파의 일에 성실하게 달려갔을 때 하나님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실라와 같은, 디모데와 같은, 누가와 같은 정말 좋은 사람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한 길, 그것을 불가능한 길이라고 내팽개치지 말고,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전진하고 달려가 보시기 바랍니다. 악이 떠날 것입니다. 충성된 자, 나를 돕는 사람, 좋은 동역자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현실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다윗이 현실 정치인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목자였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의 직업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저 멀리 뒤편에 던져두고 현실만을 입에 올리게 됩니다.
둘째는 완전한 길을 목표로 삼고 분투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한 인간이지만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표를 완전한 데다가 두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매일매일 결단하며 살아갈 때, 사악한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고 악한 길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려고 애쓸 때 악은 자연스럽게 물러갑니다.
셋째는 완전한 길로 행할 때 믿음의 동역자들을 허락받습니다.
좋은 동역자를 얻는 것은 기도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완전한 길로 행하려고 분투하고 애쓸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요나단을, 아둘람 굴의 사백 명의 용사를, 목숨을 건 세 명의 훌륭한 용사를 허락하셨던 것처럼, 바울에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허락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돕는 사람들과 믿음의 훌륭한 동역자들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내가 먼저 완전한 길로 행하지 않고 완전한 길로 행하는 자를 얻으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교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먼저 믿음의 길을 앞장서서 달려가는 참으로 훌륭한 주의 종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