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날에
시편 102편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길은 그렇게 단순하거나 단편적이지 않습니다. 대단히 복잡하고 다면적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감정도 희로애락의 감정인데, 이 감정은 우리 삶의 궤적과 함께합니다. 즐겁고 행복하고 기쁜 날이 있는 반면, 고통과 괴로움과 아픈 날, 슬픈 날도 함께 있습니다.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도 함께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즐겁고 행복한 날, 맑은 날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날은 내가 느끼는 감정대로 내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기쁘게 나아가고 그 기쁨을 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프고 괴로운 날, 흐린 날, 고통스러운 날들을 다루는 방식을 우리가 아직 잘 배우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감정을 잘 해소하지 못하고, 이 고통을 다루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흘러갑니다.
인간관계에서 아프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그 관계가 그만 무너져 내립니다. 다시는 그 사람을 보지 않으려 합니다. 가정에서 그런 일이 있으면 부부간 남남이 되어 버립니다. 일터에서 고통스럽고 아픈 일이 있으면 그 일터를 그만둬 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일이 극단으로 치닫고 흘러갑니다. 감정 조절이 되지 않고 자기 환경과 상황을 잘 다루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상황들이고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인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내 인생의 흐린 날, 고통과 아픔이 있는 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오늘 시편 102편의 저자가 우리에게 그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시 102:1)
사람들이 기도할 때는 다양한 이유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감사로 기도 드릴 수도 있고, 기도에 대한 제목과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은 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가? 즐거워서, 행복해서, 기도 응답이 되어서 하나님께 찬양으로 기도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르짖음이 주께 상달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상적으로 부르짖는다는 것은 마음이 힘들어서입니다. 고통이 있기 때문에, 아프기 때문에, 나의 이 고통과 아픔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인생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데, 더 막막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시 102:2)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으로 봐서, 그가 열심히 간구하고 기도하기는 하는데 하나님께서도 묵묵부답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인생의 답답한 문제가 있어서 가지고 나오기는 했는데, 하나님이 그 기도에 대해서 별반 다른 응답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중적인 고통입니다. 인생에 찾아오는 다양한 문제들로만 가지고도 숨쉬기가 어려운데, 이 문제들을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왔는데 해결되지를 않습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면 "이건 네 죄 때문이다"라고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셔야 되고, 풀어주실 거면 언제 풀어주겠다고 말씀해 주셔야 되는데, 하나님은 여타의 말씀, 이런저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십니다.
이런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복과 은혜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 그리고 기도의 응답이 즉각즉각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인은 눌리고 고통스럽고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외로운 광야의 시간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시 102:6-7)
시인은 부엉이, 올빼미, 참새 등으로 자신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를 언급하는 이유는 자신의 처지가 외롭기 때문입니다.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홀로 있는 참새, 외롭지 않습니까? 그리고 위태롭습니다. 언제 잡혀가도 이상치 않을 만큼 위태롭고 외로운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인생의 큰 고난과 어려움을 겪어서 홀로 있는 이 외로움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어쩌면 꼭 필요한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다루어 가실 때 홀로 있게 하셨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애굽 왕자로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비록 공주의 양자였지만 엄연히 왕위 계승 서열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애굽 왕자로 살 때 그의 주위에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 그에게 줄 서는 사람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이 사람 모세가 애굽의 황제 파라오가 될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이 그에게 줄 서고 잘 보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순간 실각해서 광야로 도주합니다. 이드로의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외롭지 않습니까?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묵묵부답, 사십 년을 그냥 보내고 계십니다. 아무 응답도 없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다 떠나갑니다.
욥의 고난을 보십시오. 욥은 큰 부자였고,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시절에 그의 집에는 잔치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한순간에 재산이 다 떠나갑니다. 자녀들도 다 떠나갑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떠났습니다. 찾아오는 친구들이라고는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합니다. 그에게 저주합니다. 그를 비난합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습니다.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은 심정이 아마 욥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다윗도 한번 보십시오. 그가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시절, 이스라엘의 장군으로 살았던 시절, 그가 전쟁터에서 돌아오면 그의 이름을 높이 불러 창화하던 여인들이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여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왕에게 쫓겨서 광야를 전전하고 있을 때 그는 외롭습니다. 정말 위태롭고 외로운 처지입니다.
하나님과의 독대
이런 상황이 하나님이 보실 때 꼭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때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고, 나를 도울 이가 없고, 인생에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이 시인처럼 하나님께 나와서 지금 부르짖지 않습니까? 주변에 사람들이 많으면 부르짖는 것이 아무래도 덜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롭지 않으면, 인생에 외로운 일이 없고 괴로운 일이 없으면 사람 만나서 즐겁고 행복하고 먹고 마시고 취미생활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더 좋은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진실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독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시간들이 꼭 필요한 시간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또 부르짖고 외치면서 "아, 이 시간이 나에게는 꼭 필요한 광야의 시간이구나" 하는 것을 아마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만 되는 문제들이 많지 않습니까? 계속 기도하고 부르짖는데도 딱히 하나님이 이래라 저래라 응답하지 않습니다. 외롭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떠나가고, 내가 가진 것이 있고 부유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이제는 여러 사람들이 다 떠나갈 때 그때 외롭다고 느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독대하고, 하나님께서 이 시간을 오래도록 고대하고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에 내 곁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실한 나의 동역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모세에게는 아론이, 다윗에게는 요나단이 외로울 때 함께 있었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 다 떠나가도, 손에 가진 것 아무것도 없어도, 진실로 나처럼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 그 사람이 내 곁에 있다면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나는 인간적인 위로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나에게 진정한 친구와 기댈 자를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굽어보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이 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보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 102:19-21)
지금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고 계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깨달았습니다. 이 깊고 깊은 외로움 속에서, 남겨진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그 높은 곳에서 여전히 나를 굽어보고 살펴보고 계셨습니다.
시인은 이제서야 안정감을 누립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내가 부르짖는 것도 듣고 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다 알고 계시는구나." 그래서 그 안정감이 시인을 더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합니다.
오늘 우리와도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함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우리 각 사람의 모습을, 또 우리가 구하고 부르짖는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고난과 외로움을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시인은 광야의 올빼미, 황폐한 곳의 부엉이,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으나 하나님께서 즉각 응답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도 모를 만큼 그는 외롭고 위태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과 외로움의 시간을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기도로 다루어야 합니다.
둘째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홀로 남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부르짖으면서 시인은 깨달았습니다. 홀로 있는 이 순간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임을 깨달았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나와 하나님만 독대하는 이 시간, 하나님은 어쩌면 그 시간을 기다리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고 계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고 살피시며 들어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굽어보시고 살펴보시며 들으시고, 하나님의 적절한 때에, 가장 아름다운 때에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 다 떠나가도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은 남겨주시며, 진정한 친구를 얻게 하시고, 기도의 동역자를 허락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이 시간이 하나님께서 기다렸던 시간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엎드릴 때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고 위로하시며 오늘도 찾아와 주시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