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제사장
시편 110편
조선시대의 혼인은 대부분 중매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양반 가문에서는 집안의 격에 맞는 상대를 찾아 중매쟁이를 통해 혼담을 주고받으며 혼례를 성사시켰습니다. 이러한 중매 제도는 20세기까지 이어져 왔으며, 21세기인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명칭은 달라졌으나 남녀 양측을 잘 아는 이가 중간에 서서 서로를 연결해 주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매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가 하는 점입니다. 중매쟁이가 믿을 만한 사람이면 혼인 성사의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확률은 현저히 낮아집니다. 사람이 중간에 서서 신뢰를 주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가장 중대한 문제인 결혼까지 성사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를 예수님께서 연결해 주신다면 이는 얼마나 확실하고 신뢰할 만한 일이겠습니까.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 주신다면, 그분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믿을 만하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며,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동시에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이 죄를 범하여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감히 가까이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우리 주 예수님께서 중간에 서서 연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중보 사역 혹은 중재 사역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10편은 다윗의 시로서, 전통적으로 메시아 예언시라 불립니다. 다윗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시를 지었는데, 후대에 이르러 이 시가 장차 오실 메시아의 역할과 사역을 예언하는 말씀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시 110:2)
하나님께서 시온에서부터 권능의 규를 내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규'란 왕이 손에 쥐는 지팡이, 곧 왕권의 상징입니다. 권능의 지팡이를 쥐고 계신 분은 오직 왕뿐입니다. 세상의 권세 잡은 왕이 자신의 통치 영역에서 권능의 지팡이로 다스리듯이, 시온에서부터 권능의 지팡이를 가지고 백성을 통치하실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그 통치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이 삼중직에 대한 고백을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구약에서 기름 부어 세우는 세 가지 직분이 바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시를 통해 첫째로 예수님의 역할을 왕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권능의 규를 손에 쥐시고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왕으로 예수님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당시 인간 왕 중에 가장 위대하다고 여겨진 이는 로마 황제였습니다. 로마는 광활한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인간 왕과도 비교할 수 없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참된 왕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시 110:5-6)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모든 왕들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은 마땅히 참된 왕이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이 참된 왕이심을 알면서도, 그분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주님을 왕 중의 왕으로 섬기지 않고 다른 것들을 왕처럼 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이나 사람이나 그 밖의 것들을 예수님 대신 왕의 자리에 앉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모순이요 이율배반입니다. 우리가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문장을 축약한 표현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곧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왕이라 고백하면서 마음과 삶으로는 다른 것들을 섬긴다면,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자기모순이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보여주는 대로 세상의 모든 왕들을 깨뜨리시고 심판하시는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을,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그날까지 참된 왕으로 섬겨 나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
왕으로 오신 주님께서 권능의 지팡이를 들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왕들을 깨뜨리고 심판하시는 그날에,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왕이신 주님을 섬긴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 중에는 배와 그물과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주님을 따른 이들이 있었습니다. 세리 마태는 세관에 쌓아두었던 많은 돈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였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분들은 진정 예수님을 왕으로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에게는 권력이 왕과 같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그들은 주님을 참된 왕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배와 그물은 생계의 수단이자 삶의 전부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면,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처럼 순결하고 맑은 영혼으로 참된 왕이신 주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제사장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 110:4)
이제 다윗은 주님을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고백합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창세기 14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롯은 소돔 땅에 거주하다가 왕들의 전쟁에 휘말려 포로가 되었고,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훈련시킨 종들을 이끌고 가서 롯을 구해 왔습니다. 사람들과 전리품을 가득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 제사장을 만났습니다. 그분에게 축복 기도를 받은 아브라함은 감사함으로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멜기세덱은 그 출처도 알 수 없고 족보도 없으며,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갔는지도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인물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제사장이요 대제사장이셨습니다. 말씀은 우리 주님이 바로 이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다고 선언합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직분입니다. 죄 많은 인간을 죄 없으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하는 분이 제사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끝에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토록 좋으신 예수님, 연결하시는 예수님, 중보하시는 예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기도 제목을 가지고 나아가 아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주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끊임없이 되새겨야 합니다. 참으로 좋으신 예수님, 다윗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기록한 이 시편에도 주님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과연 제사장으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르게 모시고 섬기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왕 중의 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이 참된 왕이시라는 선언입니다.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삶 전체로 주님을 왕으로 섬기며, 돈이나 권력이나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는 새벽 이슬 같은 순결한 헌신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와 그물을 버리고, 니고데모와 요셉이 권력의 자리를 내려놓고 주님을 따랐듯이, 우리도 맑고 순결한 영혼으로 왕이신 주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셋째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해 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기도하며,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나아가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