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편

성경
시편1권

무너지지 않는 터전

시편 11편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자신의 존재 기반, 생활의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터전이라고 부릅니다. 가끔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말 가운데 "이제 자리는 좀 잡았느냐"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들어왔고, 어른이 된 우리도 자녀들에게, 가끔씩 만나는 친척 조카들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이제 터를 좀 잡았느냐, 자리 좀 잡았느냐."

이 말은 곧 직장생활을 하고 경제활동을 하면서 먹고살 만하냐, 이제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기르며 그들을 길러낼 만한 터전을 일구었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터전을 마련했다면 더 이상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른들은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인생을 길게 돌아보면, 터전을 이루고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 얼마나 허무한 표현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인간적으로 자리 잡은 터전과 우리가 세운 삶의 현장이 심하게 흔들릴 때가 있고, 심지어는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에 갑자기 문제가 생기거나, 실직을 하거나, 사업에 실패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터전이 흔들리고 터가 무너지는 경험을 우리는 수없이 많이 하며 살아갑니다.

나의 터전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터전과 나의 터전이 함께 맞물려 있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문제 없이 직장생활 잘하고 건강하며 별 탈 없이 살아가도 타인의 터전이 흔들리면서 나도 함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국가적으로 터전이 흔들리고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전쟁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고, 우리나라가 1997년 12월에 경험했던 국가부도 사태, IMF 구제금융 사태 같은 일도 우리는 겪고 지나왔습니다. 그러면 내 잘못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전체적으로 터전이 흔들리고 무너지는데, 우리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터가 무너지면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말씀에서 다윗도 역시 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그 질문에 대한 답도 그가 하나님 앞에 함께 제시하고 있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 11:3)

이 짧은 구절 속에 다윗의 일생의 고난과 그의 고통이 깊이 녹아 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터가 무너지는 경험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손길 가운데 사울의 군대 장관이 되었습니다.

한 번도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고, 한 번도 전략과 전술을 배워본 적이 없었지만, 그는 골리앗과 싸워 이겼고 그 이후로 승승장구했으며, 결국 사울의 군대 장관이라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그는 단 한 번도 전쟁에서 진 적이 없습니다. 백성들에게 크게 칭찬받고, 백성들이 그를 뜨겁게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다윗은 만만을 죽였고, 사울은 천천을 죽였도다." 이런 노랫소리를 들을 만큼 그는 뜨겁게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사울에게 미움을 받아서 왕궁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의 위대한 영웅이었던 그가 한순간에 왕에게 반역을 일삼는 역적으로 전락해버렸고, 그는 터전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의 직업이 얼마나 훌륭했습니까? 한 나라의 군대 장관이라는 터전, 그가 가지고 있었던 그 자리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위대하고 영광된 위치였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그의 터전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도망자가 되어 쫓겨 다녔습니다. 그때 그의 심정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감히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한 번은 그가 왕의 자리에서 터전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것도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광야로 내몰렸습니다. 처음에는 사울에게 쫓겨났지만, 두 번째는 아들에게 쫓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터전이 또다시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크게 두 차례 터전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고, 한 번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크게 책망받는 아득한 경험을 한 적도 있습니다. 밧세바 사건 이후에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어 그를 책망하지 않았습니까? 그 책망은 서릿발처럼 차가웠습니다.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그의 죄를 묻고 용서하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징벌을 거두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터전이 무너지는 경험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그런데 터전이 무너지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저 거기 주저앉아 울고만 있어야 합니까? 아니면 인생을 비관하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결단을 해야 합니까?

여호와께 피하다

그는 터전이 무너질 때 이렇게 결단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시 11:1)

그는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이 여호와께 피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울에게 쫓겨났을 때 자기 발로 스스로 여호와께로 피했습니까? 그가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났을 때 자기 발로 광야로 나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강권적으로 광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그때 내 터전이 무너졌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께로 피하게 하셨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터전이 무너져서 갈 곳이 없고, 삶의 터전과 기반이 흔들려서 누구도 자신을 맞이할 데가 없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로 이끄셨는데, 그때는 막막하고 살 길이 없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서 돌아보니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 피하는 길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훗날에야 그때의 그 선택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신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말합니다. "왜 광야로 도망가느냐고, 광야같이 뻥 뚫린 곳으로 가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왜 너는 그곳으로 가느냐"고 사람들이 말하지 않습니까?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가라"는 말은 곧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어리석다고 속삭인 것입니다.

사실 그가 사울을 피해 다닐 때 정말 안전한 곳은 먼 나라로 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집트로 도망가든지, 블레셋으로 도망가든지, 모압으로 가든지, 아무튼 사울의 손을 피해서 다른 나라로 도망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둘람 굴에서 만난 400명의 자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사울이 찾을 수 없는 먼 나라로 가버린다면, 그는 생명만큼은 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곳이 안전한 곳이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여주신 것은, 광야가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광야는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안전한 곳은 사람이 생각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시는 곳,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시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임을 다윗은 훗날 고백하게 됩니다.

위험한 광야, 안전한 광야

광야는 객관적으로는 안전한 곳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시 11:2)

마치 저격수가 자신을 엄폐하고 어두운 곳에서 활을 겨누고, 뻥 뚫린 광야를 다니는 다윗을 겨냥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광야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얼마나 적절한 표현입니까? 광야같이 무서운 곳이 없습니다. 어디서 짐승이 나타날지, 사람들이 숨어 있다가 어디서 덮칠지 알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곳, 여호와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했습니다. 그 광야는 악인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가 그곳에 머물렀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시 11:4)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사람들, 곧 다윗을 감찰하시기 때문에, 그는 그 광야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순간, 그 순간에는 느낄 수 없는 깨달음입니다. 그 순간에는 가장 두렵습니다. 광야가 얼마나 두렵습니까? 다윗도 광야를 피해 전전하며 다닐 때, 가드 왕 아기스에게 두 번이나 간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짧게 머물렀고, 또 한 번은 오래 길게 머물렀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에 그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사방이 꽉 막힌 안전한 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곳이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여호와께서 정하신 그 날개 그늘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그에게 거듭 일러주셨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와 함께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속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인생이 여전히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할 때마다, 혹은 지금도 그 경험을 하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과 고민으로 밤잠 이루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우리는 하나님 날개 그늘 아래로, 여호와 품속으로 피하는 것이 유일한 정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공간을 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신 말씀 속으로 피하는 지혜를 가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돌보시고 세우시며,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인생의 터전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것인지를 겸손히 깨닫습니다. 우리는 터를 잡았다고, 이제는 자리를 마련해서 걱정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우리 삶의 터전은 취약하고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건강의 문제, 직장의 문제, 경제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위기까지도 우리의 터전을 흔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는 터전이 무너질 때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해답임을 확신합니다. 다윗은 여러 차례 터전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지만, 그때마다 여호와께 피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위험천만한 광야였지만, 하나님께서 계신 그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은 사람이 생각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이며, 때로는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셋째는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안전임을 믿고 실천합니다. 우리는 공간적으로 안전한 곳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속으로 피해야 합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와 함께 있을 때 가장 안전하며,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듯이 우리도 하나님 날개 그늘 아래서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안에 거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가장 선한 길을 따라가는 복되고 담대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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