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목자
시편 21편
크고 작은 공동체를 막론하고, 사람이 모여 사는 모든 곳에는 최종 결정권자가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최종 결정권자는 언제나 깊은 딜레마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신이 내린 결론이 공동체의 마지막 결정이 되기에, 그 판단이 지닌 막중한 무게감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결정이 현명하게 이루어지면 그 영광의 결실을 누리게 되지만,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은 공동체의 미래를 순식간에 어둡게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최종 결정권자는 대통령이며, 그는 동시에 군 통수권자라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집니다. 만약 대통령이 상황을 오판하여 경솔하게 전쟁 명령을 내린다면, 그 한 번의 결정으로 인해 무수한 생명이 전장에서 스러지고 되돌릴 수 없는 비극적 파국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막대한 책임 때문에 최종 결정권자는 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 자리를 권력이라 부르며, 무수한 사람들이 권력을 갈망하고 불나방처럼 맹목적으로 그것을 향해 달려듭니다.
그런데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공허합니까?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필사적으로 애쓰지만, 막상 그 권력을 손에 쥐고 살아가는 데는 피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권력의 정점에 우뚝 선 최종 결정권자가 마주하는 실존적 딜레마는, 결국 모든 권력자들이 피할 수 없는 근원적 고뇌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최종 결정권자였던 다윗,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던 다윗이 자신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 온전히 내려놓고 겸손히 올려드리며 고백하는 아름다운 시편입니다.
왕의 고백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시 21:1)
우리는 무심코 이 말씀을 읽으면 그저 아름다운 찬양시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왕이라는 존재가 '주의 힘', '주의 능력', '주의 구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군주의 모습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여기서 왕은 바로 다윗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최종 결정권자이자 국가의 모든 권력이 응축되어 있는 막강한 권력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며 부르고, 자신의 모든 성취를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이 지녀야 할 독특한 신앙적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을 임명하실 때, 그에게 모든 권한과 권력을 절대적으로 위임하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을 백성들을 돌보는 목자로 정의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목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목자는 양들을 이끌고 살지만, 양들의 생사화복과 운명을 결정할 절대적 권능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목자는 반드시 목자장에게 지도와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목자장은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목자인 왕이 존재하지만, 진정한 목자장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목자는 언제나 목자장이신 하나님께 여쭙고 구해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이 백성들을 어떻게 통치해야 합니까? 백성들을 어느 방향으로 인도해야 합니까? 아니면 지금은 잠시 멈추어야 합니까? 그때마다 목자장이신 하나님은 신실하게 목자에게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주십니다. 목자는 그 방향을 온전히 붙들고 순종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너는 이스라엘 가운데 목자로 내가 너를 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백성들을 무엇보다도 깊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이에 목자를 세우시고, 백성들을 향한 지극하신 사랑을 그 목자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내시고 생생하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왕은 언제나 목자장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세밀하게 아뢰고 구합니다. 다윗이 전쟁에 임하기 전에 언제나 하나님께 먼저 묻지 않았습니까? 언제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종이라고 사랑스럽게 부르신 것입니다.
목자의 의존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시 21:7)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왕이 과연 누구를 의지한다는 말입니까? 왕은 최종 권력을 손에 쥔 자인데, 그런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다고 겸손히 고백합니다. 목자는 반드시 목자장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일생에 단 한 번, 오직 한 번 목자장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속이려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에 단 한 번 목자로서 양들을 이용하고 착취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그 비극적인 밧세바 사건이었습니다. 세상의 군주들은 그렇게 행해도 무방합니다. 세상의 왕들은 자기 뜻대로 백성들의 인권을 짓밟고 유린하며, 가정이 있는 여인을 강제로 데려다가 자기 아내로 삼아도 감히 누구 하나 입을 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섬기고 자신은 목자로 고백하는 이스라엘의 왕은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다윗을 얼마나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까? 그에게 내린 징계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고 자그마치 크게 세 가지나 되었습니다. 그 심각한 죄악의 무게를 하나님께서는 명확히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진정 목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정의 부모이며,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책임 맡은 리더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목자장이 아니라 목자일 뿐입니다. 우리 자녀들과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고 신앙으로 인도하는 목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인도해주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우리 아이들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사랑으로 가르쳐주는 목자이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크고 작은 구역이나 부서를 맡아서 섬기며 인도할 때, 그때도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께 여쭙고 겸손히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축복
그러한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베푸실 축복이 말씀 가운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시 21:2)
목자의 정체성을 견지하고 목자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온전히 이어주고 연결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근본 이유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왜 이처럼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합니까? 혹시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자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은 가장 심각한 범죄 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겸손히 내려와서 그저 목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주고 연결하는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면, 우리 마음에 품은 소원과 기도 제목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주시고 들어주실 줄로 확신합니다.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시 21:3)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높이실 때는 우리가 목자의식을 견지하고 살아갈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끄는 사람들 위에 권력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진심으로 섬겨주고 사랑으로 돌봐주는 목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섬기는 목자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받기를 소망하신다면, 그러한 기대를 품고 계신다면, 우리가 목자로서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셔야 합니다.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시 21:4)
영원한 장수를 누릴 수 있는 비결 역시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종이라고 여기시고 왕으로 세우신 이유, 이처럼 큰 복을 풍성히 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 시대부터 비로소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 때부터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창설하신 이후로 세상에 심어두신 하나님만의 독특한 통치 방식입니다. 에덴 동산을 한번 깊이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그곳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고 다스리게 하는 권리를 부여하셨습니다. 동식물의 이름도 네가 지으라고 권한과 권리,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에덴 동산의 보이는 통치자는 아담과 하와가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 한가운데 선악과 나무를 두셨습니다. 선악과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시고 "이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너희를 다스리는 자는 바로 내가 된다"는 하나님의 명확한 주권 선포입니다. 이 모든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은 너희지만, 너희에게 그 권한을 위임했지만, 그러나 너희를 통치하는 궁극적 주권자는 바로 나다.
그렇다면 진정한 에덴 동산의 왕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아담과 하와는 관리인이며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오만하게 올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에서 추방당한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그 비극적인 사건 이후로 사탄은 쉬지 않고 우리에게 교묘하게 속삭입니다. "선악과를 제거하라. 네가 왕이 되라. 네 인생의 왕은 너다. 네가 너의 인생을 주관하고, 가정도 통치하고, 공동체도 지배하고, 교회도 다스리고, 사람들도 네 원하는 대로 조종하라. 네 권리를 마음껏 누리고 행사하라."
그런데 그것은 뱀이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교활하게 속삭였던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진정한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우리 인생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정의 왕이 아니라 목자입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왕이 아니라 목자입니다. 양떼들을 온전히 이끌고 쉴 만한 물가와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그 목자장께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목자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립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겸손히 목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백성 위에 교만하게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풍성한 복을 부어주셨습니다.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영광스럽게 씌우셨고, 장수로 그에게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마음의 소원을 온전히 들어주시고, 아름다운 복으로 따뜻하게 영접하시며, 영화롭게 높여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임을 깨닫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했을 때,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비참하게 추방당하는 징계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교만하게 앉으려 할 때, 우리 스스로 왕이 되려고 시도할 때, 축복은 순식간에 저주로 변하고 은혜는 준엄한 징계로 바뀝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왕이심을 겸손히 고백하고, 우리는 낮은 목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부디 사탄의 교묘한 속삭임에 미혹되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대로 왕이 아니라 목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진정한 내 인생의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온전히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려 주시기를 깊이 소망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고 겸손히 엎드리는 자, 목자장이신 주님의 발자취를 신실하게 따라가는 충성된 목자로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