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의 복
시편 29편
어린 시절 불렀던 동요 '기찻길 옆 오막살이'를 떠올립니다. 방음조차 되지 않는 누추한 오막살이, 그것도 기찻길 바로 옆에 자리한 초라한 집에서 어찌 아기가 편안히 잠들 수 있었을까요? 굉음을 내뿜으며 질주하는 기차 소리마다 아기는 깨어나 놀라고 울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아기가 평온하게 잠들 수 있었던 까닭은 오직 한 가지, 엄마 품 안에 안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따스한 품속에 있으면 환경이 어떠하든, 설령 포화가 쏟아지는 전쟁터라 할지라도 아기는 평안히 잠들 수 있습니다.
환경이 아니라 누구의 품 안에 거하느냐가 아기의 평안을 결정하는 본질적 요인입니다. 엄마가 없다면, 그 따스한 품이 없다면 아무리 안락하고 넓은 저택, 화려한 궁궐 속이라 할지라도 아기는 결코 편안히 잠들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우리 인생이 바로 이러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외적 환경의 순탄함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느냐가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다윗의 시편은 극심한 환경적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하는 신앙의 노래입니다.
홍수 위의 하나님
홍수가 범람하고 천둥이 울부짖으며 벼락이 낙하하는 극심한 자연재해의 한복판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시 29:3)
많은 물은 홍수를, 우렛소리는 천둥을 가리킵니다. 홍수가 범람하고 폭우가 쏟아지며 천둥이 울리고 비바람이 광폭하게 휘몰아치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많은 물 위에 좌정하시며 우렛소리를 발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천둥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이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홍수를 통치하시고 주관하고 계신다고 장엄하게 노래합니다.
만약 이 광경에서 여호와를 제외한다면, 하나님을 배제한다면 폭우와 천둥만이 남을 뿐입니다. 일기예보 하나 없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통제 불능의 재앙이며, 형언할 수 없는 공포였습니다. 하늘이 마치 찢어진 듯 폭우가 쏟아지고 하늘에서 우렛소리가 진동하며 천둥과 벼락과 비바람이 광란하는 광경을 목도하는 이들은 얼마나 전율했겠습니까? 언제 멈출지, 어느 정도의 재앙이 임할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 비구름이 어떤 원리로 형성되어 이 재앙을 초래하는지조차 알 길 없던 당대인들이 느꼈을 두려움은 실로 심연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라 선포하니, 바로 이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 위대한 힘과 위로가 됩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시 29:4)
여호와의 소리가 능력으로 충만하고 위엄이 넘친다는 고백은 천둥소리를 의미합니다. 천둥소리를 여호와의 음성이라 선언하고, 이 소리가 장엄한 위엄을 담고 있다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시 29:5)
여호와의 소리, 천둥이 울리고 벼락이 낙하하여 백향목을 꺾어버리는 장면을 다윗은 이처럼 시적으로 형상화합니다. 그 분쇄된 백향목이 얼마나 멀리 비산하는지는 다음 구절에서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시 29:6)
창공에서 천둥이 작렬하고 벼락이 번개처럼 낙하합니다. 아름드리 백향목에 벼락이 직격합니다. 거목이 산산조각 납니다. 쪼개진 나무가 송아지가 뛰노는 것처럼 사방으로 튀어 날아갑니다. 다윗은 이 장엄한 광경을 시적 언어로 아름답게 승화시킵니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9절의 선포입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시 29:9)
창공에서 천둥이 진동하여 그 소리에 놀란 암사슴이 낙태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비가 끝없이 쏟아져 산림의 나무들이 모조리 뿌리째 뽑혀 휩쓸려 내려갑니다. 이 정도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극한 상황이 아닙니까?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범람하고 하늘이 갈라진 듯 비가 내려 산림의 나무들이 모두 유실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이것을 여호와의 영광이라 경배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
다윗은 어찌하여 이처럼 노래하고 고백하는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시편은 언제나 중층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중적 관점으로 함께 읽어야 그 깊이가 드러납니다. 이것은 자연계에 발생한 재해를 노래하는 동시에, 다윗 생애에 임한 극심한 고난과 시련을 자연재해에 비유하여 노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삶에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폭우가 쏟아지고 창공에서 천둥이 작렬하며 벼락이 낙하하고, 암사슴이 낙태하듯 치명적인 고난이 엄습했으며, 그의 인생의 나무들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는 참혹한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산에 나무를 심어 수십 년을 정성으로 가꾸어 이제 산이 푸르러지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산림의 나무들을 모조리 휩쓸어가 버리는 통한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귀하고 귀한 레바논의 백향목 같은 나무들이 벼락을 맞아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지고 온 땅에 낭자하게 널브러진 처참한 광경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이 모든 상황을 여호와의 영광이라 선포합니다. 어찌하여 그리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 쫓기며 다윗의 인생은 산산조각났습니다. 사울에게 쫓기기 전까지 그의 인생은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끝을 모르고 상승하고 또 상승할 줄만 알았습니다. 골리앗을 격파하고 백성 앞에 영웅으로 등장한 다윗의 인생, 그의 앞날은 무한히 찬란하고 푸른 미래였습니다. 누가 감히 다윗이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십 년이 넘도록 광야를 유랑하리라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때까지 온갖 정성을 다하여 축적해 놓았던 그의 인생의 모든 나무들이 순식간에 뿌리째 뽑히고 휩쓸려 사라지는 비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 고백하고 찬양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합니다. 홍수 속 많은 물 위에 여호와께서 좌정해 계십니다. 그 광폭한 물결 위에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암사슴이 낙태하는 참혹한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이 모든 일에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 경배합니다. 사실 이 경지에 이르면 믿음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애에 엄습하는 크고 작은 시련들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갖가지 어려움들 가운데, 우리는 이 시련을 겪으며 불평도 토로하고 원망도 품으며, 때로는 하나님께 너무하시다는 마음을 품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이것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일이 분명하다고 확신합니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시 29:10)
홍수가 범람하는 때에도 하나님께서 좌정하셨다는 선언입니다. 홍수가 세상을 집어삼키는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곳에 함께 임재하십니다. 달리 표현하면 내 생애에 극심한 고난과 시련이 엄습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한복판에서 좌정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이니이다"라는 고백의 다른 표현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에 고난과 시련이 임하지 않게 해 달라고, 이 시련을 피할 길을 열어 달라고 간구하거나 그것을 하나님께 구한 적이 없습니다. 홍수가 범람하는 때에도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시면, 내 생애의 모든 것이 휩쓸려가도 하나님께서는 나만은 남겨두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지녔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해치지 않으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신뢰, 이 흔들리지 않는 확신 하나만은 견지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확신으로 자리 잡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생애에 엄습하는 홍수와 같은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홍수 위에 좌정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진리, 이 믿음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직면한 고난과 큰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하는 능력의 원천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이처럼 홍수가 범람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힘을 베푸시고 평강의 복을 허락하신다고 노래합니다. 사실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 평강을 논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미 다윗은 시편 3편에서 이보다 더욱 극심한 상황 속에서도 평강의 복을 찬미한 경험이 있습니다. 시편 3편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치던 때에 기록한 시편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라고 고백합니다. 친아들에게 쫓기며 왕위를 찬탈당하고 도주하는 다윗이 어찌 잠을 청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 이처럼 극심한 시련을 겪는 와중에도 하나님께서 홍수 때도 좌정하고 계시니 나는 평안히 잠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정도의 평안은 반드시 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평안이라는 것은 외적 환경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 놓이더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동행하시면, 하나님께서 나를 품에 안고 손을 붙들고 계시면 우리는 평안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 거하는 아기가 엄마의 품 안에 안겨 있기만 하면 평안히 잠들 수 있듯이,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하며 오늘 하루도 평안의 복을 만끽하며 살아가시기를 간곡히 소망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생애에 임하는 모든 환경을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은 평탄하지 않습니다. 주변 정황들이 녹록지 않을 때가 있고 시련이 끊임없이 엄습합니다. 폭우가 쏟아지고 많은 물이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며 천둥도, 벼락도 낙하합니다. 내 생애의 암사슴들이 낙태하는 일도, 내가 오랜 세월 정성으로 가꾸었던 산림의 나무들이 모조리 뿌리째 뽑히는 일도 발생합니다. 그러나 내 생애의 홍수 때에도 좌정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며, 그 하나님께서 영광의 왕으로 좌정하신다고 선포하는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으로 자리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극한의 상황에서도 능력과 은혜와 평강을 베푸심을 신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극심한 상황 속에서도 힘을 부어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평강을 허락하십니다. 평안히 누워 잠들 수 있게 하십니다. 평안이라는 것은 외적 환경이 부여하는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우리 손을 붙들어 인도하시며, 갖가지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과 팔로 우리를 보호하시니 우리는 평안하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셋째는 오늘 하루도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생애를 이끌어주시고 도우시는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의 아기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품 안에서 참된 평안을 만끽하며 살아가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