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4편

성경
시편1권

곤고한 자의 기도

시편 34편

인지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아이는 위험의 본질을 직접 경험해야만 비로소 깨닫습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뜨거운 불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외쳐도, 아이는 스스로 불에 다가가 작열하는 열기를 얼굴로 느껴본 후에야 그 경고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반면 성숙한 성인은 모든 것을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이성적 판단만으로 무엇이 위험한지, 무엇을 삼가야 하는지, 어떤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를 충분히 분별해냅니다. 이러한 능력을 우리는 성숙한 인지라 말합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이는 성경을 삶의 동반자로 삼으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호흡합니다.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와 미워하시는 바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성경 속 무수한 인물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비결과 외면당한 이유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인지를 충분히 통찰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접하면서도, 직접 경험하고 몸으로 부딪혀보아야만 선과 악을 분별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여전히 영적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미성숙한 신앙인임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접하는 시편은 다윗의 생생한 경험이 녹아든 고백입니다. 다윗이 겪은 절박한 순간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람을 기뻐하시는지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의 표제어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무엘상 21장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집요한 추격을 피해 도망치던 다윗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지자, 마침내 적국인 가드의 왕 아기스에게로 망명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는 그곳이라면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 기대했으나, 현실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곳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미친 사람 행세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시를 올려드렸으니, 이것이 바로 오늘의 시편 34편입니다.

절박한 선택

사울은 끈질기게 포위망을 좁혀왔고, 다윗에게 남은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산도 제대로 없는 광활한 광야에서 은신할 만한 곳을 찾지 못한 다윗은, 궁여지책으로 가드의 왕 아기스에게 몸을 의탁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가드는 다윗에게 있어 결코 편안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다윗이 직접 쓰러뜨린 거인 골리앗의 고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곳이라면 자신을 숨겨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에게도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의 장관이었던 자신을 가드의 왕 아기스가 정치적으로 활용할 것이라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역시 상당한 각오를 하고 그곳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치밀한 계산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을 끊임없이 의심했고, 골리앗의 원수를 갚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가드의 왕 아기스조차 그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다윗은 그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에서 간신히 탈출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 34:6)

여기서 '이 곤고한 자'는 누구를 지칭하겠습니까? 당연히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였습니다. 영혼이 짓눌린 곤고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완전히 삼킬 듯 목전까지 다가왔다가, 간신히 그 손아귀에서 벗어난 직후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핵심적 진리는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부르짖었겠습니까? 잠시 그 긴박한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기스와 그의 신하들이 다윗을 빙 둘러싸고 포위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에게 칼을 겨누고, 또 누군가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 그가 두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통성기도를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부르짖었다는 표현은 하나님 앞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간절하게, 온 영혼을 다해 기도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절망의 나락에 빠진 다윗을 주목하시고, 그의 간절한 기도에 귀 기울이시어, 그 위태로운 순간에 그를 건져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다윗은 이 경험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신을 반드시 건져주신다는 확고한 진리를 체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믿음의 백성들은 어떤 순간에 기도하든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을 항상 믿고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혹은 환경이 허락되어서, 형편과 처지가 안정되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성전에 올라와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길을 걸어갈 때도, 누군가를 만날 때도, 바로 이 순간 판단력이 필요할 때도, 좌로 갈 것인지 우로 갈 것인지, 아니면 잠시 멈추어야 할 것인지, 그 순간 지혜가 떠오르지 않을 때, 바로 그때도 하나님께 순간순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진리를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8)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진리를, 그리고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권면합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직접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맛보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인지를 넘어 '온전히 경험하다'라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이제 위기를 벗어나고 보니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훈련하시기 위해 사울이라는 시험을 허락하시고 광야 기간을 주셨는데, 다윗은 하나님의 시험과 훈련을 피해 가서는 안 될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위기에서 벗어나 돌아온 후에야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얼마나 미련했는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기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다시 살려주신 하나님, 그 놀라운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의 무한하신 선하심을 맛보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법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한 가지 깊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가드의 왕 아기스는 눈앞에 선명하게 보입니다. 당장 손에 잡힐 듯 코앞에 서 있습니다. 그쪽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드 왕 아기스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도대체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께 어떻게 피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 피하는 방법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 손에 잡히지도 않는 하나님. 만약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존재로 우리에게 보인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한 공간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면, 우리는 주저 없이 그분께 달려갈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방법을 다윗은 이렇게 명확히 증언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시 34:15)

그분의 눈, 그분의 귀, 즉 하나님의 귀는 언제나 우리의 간구에 열려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피하는 참된 방식은 바로 기도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 발이 달려가서 하나님께서 계신 특정한 장소로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교회에 나오면, 성전에 오면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반만 옳은 생각입니다. 성전이라는 물리적 공간 그 자체가 곧바로 하나님의 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에 와서도, 바로 여기에 앉아 있어서도 하나님께 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단순히 공간이 주는 안도감만으로는 참으로 하나님께 피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우리가 광야에 있어도, 일터에 있어도, 가정에 있어도, 내가 서 있는 모든 장소에서 우리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 향하여 기도하고 있다면, 전심으로 이 곤고한 자처럼 부르짖고 있다면, 바로 그곳이 우리가 하나님께 피하는 참된 처소입니다. 다윗의 일생이 바로 이 진리를 증명해 주지 않습니까?

그가 광야에 있을 때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되었지만, 안전한 왕궁에 있을 때 전심으로 기도하지 않고 밧세바 사건을 저지르며 죄를 지었을 때는 하나님께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진심을 다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께 피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시 34:17)

여기서 '의인'은 항상 하나님께 피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을 손으로 만질 수 없으나, 그럼에도 하나님께 피하는 자, 그가 간절히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의인의 간구와 기도를 반드시 들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피하는 의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살아갈 수많은 공간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자리를 떠나 일터로 가야 하고, 하루 종일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상황이든지,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그 순간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서라도, 곤고한 자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피하는 의인들이 될 수 있고, 하나님께 피하는 의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들으시고 이루어 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경험을 우리 삶의 매 순간마다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절박한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환난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고 맛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무모한 선택과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건져주신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도 실수와 연약함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그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날마다 맛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는 참된 피난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방법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전심을 다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전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든 일터에서든 가정에서든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께 피하는 의인이 됩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전심으로 그분께 피하는 의인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르짖음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시고, 모든 환난에서 반드시 건져주실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언제 어디서든 기도의 능력을 충만히 누리며, 하나님께 피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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