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편

성경
시편1권

여호와께 부르짖다

시편 3편

인생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일들을 경험합니다. 기쁜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으며, 힘든 일도 있고 즐거운 일도 있습니다. 즐거운 일과 기쁜 일, 행복한 순간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잔잔히 사라져가지만, 그 기쁨의 흔적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힘이 되어 남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과 힘든 일을 마주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극복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도저히 극복하기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그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특히 견디기 힘든 것은 자녀의 문제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패륜적인 행동을 할 때, 그 고통은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남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부끄럽고, 누가 알게 될까 두려워 입 밖에 꺼내기조차 어렵습니다.

다른 일들은 극복하고 견디면 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부지런히 일하면 극복의 실마리가 보이고, 육체적인 고난도 인내하면 지나갑니다. 그러나 마음이 무너지면 다시 일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자식의 문제, 이 패륜적인 상황은 정말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의 다윗이 바로 그러한 일을 겪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두 번째 광야

시편 3편의 표제어에는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일생 동안 두 차례의 광야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첫 번째 광야 생활은 젊은 날의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군대 장관으로 재직할 때, 그가 나아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패배가 없었고, 백성들의 사랑과 지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사울 왕은 바로 이것 때문에 다윗을 질투했습니다. 그 질투는 단순한 감정으로 끝나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는 집요한 시도로 이어졌습니다. 더 이상 왕궁에 머물 수 없었던 다윗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광야로 도피했고, 그 피난의 세월이 제법 길었습니다. 십수 년의 긴 광야 생활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견딜 만했습니다. 비록 힘들었지만 젊은 날이었기에 하룻밤 자고 나면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고난에는 이유도 있었고 명분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연단하신다는 확신이 그를 견디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사울 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의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든든했고,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광야 생활은 전혀 달랐습니다. 왕이 된 지도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쫓겨나 왕궁을 떠나 광야로 향해야 했을 때였습니다. 그때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전의 광야 생활보다 기간은 훨씬 짧게 끝났지만, 그 시간은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참담하고 비참한 시간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다 알지 않았겠습니까?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난 다윗의 처지를 말입니다. 만일 그가 이 처지를 비관하며 절망했다면, 어쩌면 광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 다윗은 이 시편을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시 3:1-2)

대적이 많습니다. 압살롬 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다윗을 대적하는 자는 그를 따르는 소수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의 반역이 이토록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왕궁에 압살롬과 함께 남아 있는 자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면면을 다윗이 생각해 보면 허탈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그저 쓴웃음만 나왔을 것입니다. 특히 압살롬의 모사가 된 아히도벨 같은 사람의 경우, 그는 원래 다윗의 충직한 모사였습니다. 다윗과 함께 평생의 전쟁터를 누비며 전략을 함께 세웠던 그의 오랜 참모가 이제는 적이 되어 압살롬의 모사로 서 있습니다. 이런 기가 막힌 상황을 다윗은 지금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고,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셨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일을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했던 일도 소문이 꼬리를 물고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심판을 선포하지 않으셨습니까? "칼이 네 집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은 분명 입방아를 찧었을 것입니다. "나단이 예언한 대로 되었구나. 칼이 그 집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하더니, 결국 아들의 칼에 저렇게 쫓겨나는구나. 이제 그는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하겠구나. 하나님께 심판받았으니 그는 다시는 광야에서 돌아올 수 없을 것이야."

이러한 말들이 다윗의 가슴을 짓누르고 아프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입방아를 찧는 소리를 듣게 되면,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참담한데, 어떻게 다시 돌아가서 왕위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다윗은 최선의 선택을 합니다.

나의 목소리로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시 3:4)

이것이 다윗의 참으로 훌륭한 점입니다.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남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나는 지금 기도할 힘조차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기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긴 다윗조차 기도하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못할 상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중보 기도를 많이 부탁합니다. 중보 기도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직접 입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문제인데 내가 가장 간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인생의 문제인데 내가 가장 절실하고 답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시편의 전체 주제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나라 전래동화에서 말하는 복처럼, 자고 일어나니 금덩이가 하나 생겨나 있고 도깨비방망이가 머리맡에 놓여 있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진정한 복이 아닙니다.

시편이 말하는 복은 처절하고 치열하며 투쟁적인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의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며, 시냇가에 심긴 나무가 되어서 언제나 하나님 말씀 앞에서 신앙의 싸움을 싸우는 자입니다. 시편 2편에서의 복은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오늘 시편 3편에서의 복은 어떤 상황에서도 여호와께 부르짖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기도하지 못할 상황이라는 것은 결단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평안의 회복

다윗이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 3:5-6)

한마디로 평안이 찾아온 것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며 쫓겨난 사람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고 물 한 모금 삼키기조차 어려울 텐데,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제 두 다리 뻗고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참 태평하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잠들 수 있고, 어떻게 이런 절박한 처지에 저렇게 태평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능력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비웃으며 말합니다. "기도하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고 말입니다. 그 말은 곧 기도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도했지만 상황 자체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도의 능력은 바로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근심이 사라지고 염려가 사라지며 잠들 수 있게 되고 밥을 먹을 수 있게 되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내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면, 내 안에 있었던 걱정과 염려와 근심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라지고 떠나갑니다.

전적인 위탁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시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라는 이 고백은 자신을 회복시키시는 것도, 회복시키지 않으시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철저한 위탁의 기도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다윗이 압살롬과의 모든 전투가 끝나고 왕권을 회복하여 왕궁에 돌아온 후에 지은 시편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아직 결과를 알 수 없을 때였습니다. 아직 모든 결론이 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고 하나님께 위탁하고 맡기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자는 기도의 결과마저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했고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며,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평화를 주시니 이대로 내 인생이 끝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고, 나를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태도였습니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태도를 지닙니다. 요나가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후에 "구원은 여호와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며 구원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셨지만, 마지막에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기도, 올바르게 드린 기도는 하나님께 위탁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오늘 나의 목소리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결과 역시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가장 선하시고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능력 있는 팔로 안으시고 보호하시며,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패륜적인 아들의 행동으로 왕위를 찬탈당하고 쫓겨난 다윗이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긴 다윗조차 기도했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못할 상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떤 참담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호흡이며 생명입니다.

둘째는 기도의 참된 능력은 내가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다윗이 기도했지만 외적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광야에 있었고, 여전히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근심이 사라지고 염려가 사라지며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내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면, 내 안에 있었던 걱정과 염려와 근심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라져갑니다.

셋째는 구원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다윗은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라고 고백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했습니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의 결과마저도 하나님께 맡깁니다. 전능하시고 선하시며 가장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능력 있는 팔로 안으시고 보호하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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