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1편

성경
시편1권

배신과 온전함

시편 41편

인간의 감정은 실로 광대하고 복잡합니다. 한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그 모든 감정의 스펙트럼을 온전히 경험하거나 누리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좋은 감정들을 미처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기도 하지만, 그러나 차라리 누리지 않는 편이 나을 부정적 감정들 또한 우리 삶 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특히 경험하지 말아야 할 감정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배신당했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진심으로 믿고 의지했던 사람, 깊이 신뢰하며 교제했던 이에게 배신당할 때 밀려오는 복합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는 우리 삶에서 마땅히 피해야 할 고통입니다.

누군가의 배신을 경험하게 되면 어떤 감정의 파도가 밀려오겠습니까? 가장 먼저 그 사람을 향한 분노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와 우리 전체를 휘감아 버립니다. 내가 그에게 어떻게 대했는데, 우리가 어떤 관계를 쌓아왔는데 하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들면서, 배신감과 분노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몰려옵니다. 그 다음으로는 이처럼 부적절한 사람을 진심으로 신뢰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치욕과 수치, 그리고 판단력을 잃었던 자신에 대한 깊은 실망감으로 오랜 시간 괴로워하게 됩니다.

상대를 향한 분노와 자기 자신을 향한 치욕, 수치의 감정이야말로 배신이 가져다주는 가장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서로 얽히고설켜 우리 내면 깊숙이 뿌리를 내리며, 우리를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경험은 앞으로 누구와도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 어떤 사람도 온전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불안감까지 우리 마음속에 각인시킵니다. 그렇다면 한번 배신당한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타인을 믿고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시인 다윗이 바로 이러한 배신감으로 얼룩진 상황 속에서, 그 격렬한 감정을 어떻게 극복하고 승리하였는지를 아름다운 시의 언어로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원수의 악담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시 41:5)

원수가 악의에 찬 말을 퍼뜨립니다. 그가 언제 죽을까, 그의 이름이 언제쯤 완전히 사라질까 하며 입에 담기도 민망한 저주의 언어들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원수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본래부터 악한 길을 걷던 사람이었고, 처음부터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대적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원수의 악담은 전혀 낯설지도 의외스럽지도 않습니다. 다윗의 주변에는 그를 해하려는 원수들이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원수는 본질상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물론 그 말을 들으면 충격이 밀려오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일말의 수긍도 함께 자리합니다.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이런 말을 했던 사람이 과연 처음부터 원수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시 41:6)

"나를 보러 와서는"이라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을 찾아올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허락된 사람, 그만큼 가깝고 신뢰받던 이였다는 점입니다. "나를 보러 와서는 중심에 악을 쌓는다"는 표현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 깊은 곳에서 악한 계획을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다윗을 방문할 때마다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겉으로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환하게 웃고, 다윗의 귀에 듣기 좋은 온갖 아첨과 격려의 말들을 아낌없이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중심, 가장 깊은 내면에서는 악한 의도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의 처소를 나서면 곧장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해, 그가 언제쯤 죽을까, 그의 이름이 언제쯤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워질까 하는 저주와 비방의 말들을 거침없이 퍼뜨렸습니다. 다윗은 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느꼈을 배신감의 깊이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처음에는 이 사람이 결코 그럴 리 없다는 부인, 분명 무슨 오해나 착오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 추측부터 시작해서, 결국 사실로 확인되었을 때의 격렬한 분노까지, 실로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그의 내면을 휩쓸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병상의 다윗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여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시 41:7-8)

이러한 악담과 비방을 듣고 있는 다윗의 상황은 매우 좋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다"는 표현이 생생하게 보여주듯이, 지금 다윗은 병상에 누워 있는 처지입니다. 어떤 연유로, 무슨 일로 인해 그가 몸져누워 자리를 보전하게 되었는지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가 상당히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 이런 절박한 상황을 마주했다면, 그가 느꼈을 절망감과 무력감은 더욱 극심했을 것입니다.

육신이 극심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으며, 언제쯤이면 이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 기약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절박한 순간에, 그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말했던 자들이 찾아와 그 앞에서는 온갖 달콤한 위로와 아첨의 말들을 쏟아내다가, 막상 밖으로 나가서는 그가 언제 죽을까, 그가 언제 이 세상에서 사라질까 하는 저주의 말들을 사람들 사이에 퍼뜨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다윗이 느꼈을 배신감의 무게는 실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무거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습니까? 겉과 속이 판이하게 다른 사람,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전혀 다른 사람, 나를 대면했을 때의 태도와 타인들에게 나를 평가하는 방식이 완전히 상반된 사람들을 경험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합니까? 사실 그런 이중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처음에는 몹시 당황스럽습니다. 이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내 속에 쌓인 감정들을 한꺼번에 쏟아놓고 따져 물을까 하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그냥 모른 척 애써 외면하고 넘어갈까 하는 회피의 유혹까지, 실로 다양한 생각들이 마음속을 어지럽게 오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화는 쉽게 풀리지 않고 분노는 가라앉지 않으며, 어떻게 해도 마음에 새겨진 치욕과 수치의 상처는 씻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친구의 배신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시 41:9)

지금 이런 위기의 상황이 도래하니까, 왕이 병상에 누워 거동조차 못하고 이제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드리워졌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져나가기 시작하니까, 놀랍게도 나를 신뢰하며 함께 떡을 나눠 먹던 친구마저 발꿈치를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떡을 나눠 먹던 친구라는 표현은 단순한 지인이 아니라 식탁 교제를 함께 나누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지 않습니까? 실로 깊이 신뢰할 만하고 온전히 믿을 만한 가까운 사이였는데, 바로 그 친구가 발꿈치를 들었습니다. "발꿈치를 들었다"는 표현은 배신했다는 뜻을 담은 히브리적 관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시편 41편 9절의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이 예언적 말씀을 인용하시며 가룟 유다를 향해 "발꿈치를 들었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유다야말로 예수님과 함께 떡을 나눠 먹던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며 한 상에서 식사하고,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며,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공동운명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가룟 유다가 결국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 발꿈치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는 "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다 아시면서도, 그가 발꿈치를 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시면서도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발을 친히 씻어주셨습니다. 마치 주인이 아니라 종의 자리에 서신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 정성스럽게 발을 씻어주셨는데, 유다의 발도 예외 없이 씻어주셨습니다. 유다만 건너뛰고 다른 제자들의 발만 씻어주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발꿈치를 이미 들기로 작정한 가룟 유다, 그의 배신을 환히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 주님은 여전히 그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주님께서 배신을 대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몰려오는 분노와 마음속 깊이 치밀어 오르는 치욕과 수치를 다 뒤로하시고, 주님은 사랑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행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셔서, 우리 주님은 배신자 유다의 발까지도 씻어 주셨습니다.

온전함의 비결

그렇다면 다윗은 발꿈치를 드는 이 충격적인 사건, 결코 자기 인생에 일어나서는 안 될 참담한 배신을 경험한 이후에 과연 어떻게 대처하고 처신했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시 41:10)

다윗은 무엇보다 먼저 나를 일으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병상에 자리를 보전한 채 누워만 있어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 하나님 제발 나를 일으켜 주십시오, 나를 먼저 고쳐주십시오, 나를 다시 세워주십시오 하고 애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야 원수에게 정당한 보응을 하든지, 아니면 용서의 결단을 내리든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처럼 무력하게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우선 나를 일으켜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병상에 무력하게 누워있는 육신을 일으켜 세워 달라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낙심과 절망 속에 깊이 빠져 있는 내 마음과 영혼을 일으켜 세워 달라는 영적 간구이기도 합니다. 배신을 경험할 때 무엇보다 먼저 마음이 무너지고 영혼이 좌절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 무너진 마음을, 산산조각 난 영혼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나를 세워 주십시오, 다시 일으켜 주십시오. 다윗은 원수 앞에 먼저 나서지도 않았고, 발꿈치를 든 그 사람 앞에 서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세워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 41:12)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라는 이 표현이야말로 핵심적인 열쇠입니다. 배신의 감정과 분노가 마음에 들기 시작하면 사람은 결코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우선 외적으로 나를 배신한 사람 앞에 서게 되면 분노가 치밀어 올라 평정심을 완전히 잃게 되고, 또한 내적으로 자기 연민에 빠지기 시작하면 한없이 불쌍하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추락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온전함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온전하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주여 나를 일으켜 세워주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동시에 "나를 온전한 중에 세워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온전한 상태를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수를 마주하고 발꿈치를 든 사람 앞에 서 있으면 내가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이어서 말합니다. 주 앞에 나를 붙들어 달라고, 주 앞에 나를 견고하게 세워달라고 간청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거할 때, 바로 그때만이 온전함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을 미리 다 알고 계시면서도 그의 발을 씻어주실 수 있었던 까닭은, 예수님께서 항상 하나님 앞에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다라는 한 사람 앞에만 서 있었다면 온전함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배신을 경험하고 나면, 그 원수를 만나게 되면, 그 사람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내 마음이 요동치며 무너져서 일상이 흔들리고, 그렇게 되면 결국 내 존재 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최종적으로 손해 보는 것은 배신한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합니다. 원수를 만날수록, 나를 배신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람을 마주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전함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원수라는 도구를 십분 활용합니다. 나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서 배신의 감정을 몇 배로 증폭시켜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전쟁을 경험할 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이 진리를 말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온전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온전함을 되찾은 자, 그리고 나서 비로소 그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결론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배신의 감정 앞에서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원수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부터 악한 길을 걷던 사람이었고 처음부터 우리의 대적자였다면, 우리는 그 원수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경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를 친히 찾아오고 온갖 선한 말로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그 사람이, 나와 함께 떡을 나누며 깊은 교제를 나누던 바로 그 사람이 발꿈치를 들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 올라 나 자신조차 붙잡을 수 없을 만큼 한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원수의 발까지도 사랑으로 씻어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나를 일으켜 세워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나를 일으켜 세워 달라고 애절하게 간구한 다윗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며, 온전한 중에 나를 붙들어 주시고 영원히 주 앞에 굳건히 세워 달라고 기도했던 다윗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원수 앞에 서면 결코 온전할 수 없으니,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닥쳐와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 앞에 서게 하시고 기도의 자리 앞에 서게 하시며, 신뢰의 반석 위에 우리를 든든히 세워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 앞에서만 온전함을 회복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원수가 우리를 괴롭고 힘겹게 할지라도, 우리는 함께 원수를 갚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에 빠져들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부르짖으며 기도하고, 우리의 억울함과 고통을 오직 하나님 앞에만 아뢰어야 합니다. 그 길이야말로 나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유일한 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온전함을 회복해야만 하나님과 깊은 믿음의 교제, 진정한 영적 교제를 풍성하게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귀한 교훈을 깊이 새기시고,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이 있어도 굳건히 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전한 마음과 영혼으로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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