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시편 42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세 가지를 말하라면 대부분 의식주를 떠올립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곳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존재의 필수 요건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거주 공간의 의미를 돌아본다면, 과거에는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비를 피하고 바람을 막을 수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하고 온 힘을 쏟아 수고한 사람이 저녁 무렵 집에 돌아와 허리를 펴고 두 다리를 뻗고 편안히 누워 잘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더없이 넉넉한 공간이었습니다. 극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다면, 대다수 사람들의 거처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생활 형편이 나아지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집은 단순한 거처를 넘어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철학을 담는 공간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집을 설계하기 시작했고, 그곳에 가족의 행복과 꿈을 담아내려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지나침에서 비롯됩니다. 과유불급이라는 지혜의 말씀처럼, 거주 공간에 지나친 소망을 두다 보면 그것이 우리 인생에서 절대화되기 시작하며, 그 순간부터 영적 타락과 삶의 왜곡이 시작됩니다.
고대 왕들의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왕이 거처하는 공간이기에 궁궐은 당연히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쳐 과도한 토목 공사를 벌이면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사회에 큰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왕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바로 그 지나친 욕망으로 인해 잃어버리는 일이 역사 속에 반복되곤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본문은 성전을 사모하는 한 시인의 영적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성전을 사모하는 것 자체는 지극히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마저 과유불급이 되어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면, 신앙의 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시인은 고통의 시간을 통해 성전이 아닌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신앙을 한 단계 더 깊이 성숙시키는 놀라운 영적 도약을 이루어냅니다.
갈급한 영혼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시인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자신이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욕구가 아니라 생명이 걸린 절박한 영적 갈망입니다.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토록 간절히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었습니까?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 42:2)
지금 시인은 성전에 나아가지 못하는 깊은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릴 수 없는 고통, 일상이었던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을 할 수 없는 영적 갈증을, 이처럼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성전에 나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 42:3-4)
과거 시인은 성일을 지키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집, 곧 성전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평범한 신앙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사람, 오히려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떤 이유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는지, 본문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질병으로 몸이 쇠약해졌는지, 아니면 정치적인 이유로 사람들의 음해와 모함을 당해 그 자리에 나갈 수 없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결론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의 3년 동안 하나님의 성전을 마음껏 출입하지 못했을 때의 그 깊은 허전함과 영적 공허함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시인은 그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깊었던 사람이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영혼의 고통을 이처럼 절절하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방황하는 마음
그래서 시인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 고통을 해소해 보려 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시 42:6)
낙심이 너무도 깊었던 나머지, 그는 먼 길을 떠나보기도 했습니다. 남쪽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요단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갈릴리 호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다시 갈릴리 호수의 수원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오르면 헤르몬 산을 만나게 됩니다. 만년설이 장엄하게 뒤덮인 요단강의 생명수요, 갈릴리 호수의 시발점이 되는 헤르몬 산,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인 미살 산까지 그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산 봉우리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신앙을 고백하며, 마음의 괴로움을 잊어보려 애썼습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던 믿음의 사람, 성전 지킴이였던 그가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먼 길을 여행하며 이 영혼의 괴로움과 고통을 잊어보려 애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참된 평안을 찾았습니까?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시 42:7)
그는 오히려 그곳에서 인생의 더 깊은 번민과 고통을 느꼈습니다. "나를 휩쓸었나이다"라는 고백이 그 내면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는 그곳에서 진정한 평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먼 길을 여행했지만, 오히려 폭포의 장엄한 소리와 압도적인 자연의 풍경이 자신의 마음을 더욱 거세게 휩쓸어가는 영적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러나 그런 고통의 수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시인에게 찾아온 놀라운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참된 믿음의 성장은 결국 이 고난의 시간들을 통해서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시인은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여 영혼에게 말합니다. 여기서 '너'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너는 성전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고통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성숙해진 믿음의 고백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11)
지금까지 시인의 인생은 성전에 소망을 두는 인생이었습니다. 평생 성전 지킴이로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성전으로 인도하는 일을 했던 그는, 직업상 성전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나가지 못하게 됨으로써 그가 역설적으로 깨닫게 된 진리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내 소망은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성전 건물이었구나. 이것은 내 신앙에 있어 오히려 나를 괴롭게 하고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큰 병폐였구나. 나는 이제 성전 건물에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 되겠다." 이 거룩한 결단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의 원형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천막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지성소도 있었고 성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영화로웠던 시절, 가장 영적으로 순수했던 시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했던 그 시절, 그곳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생생히 경험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했던 그 아름다운 성막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막 시절이 지나고 정착기가 오자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은 점차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사람들이 성전 자체를 절대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절대시하는 그들의 왜곡된 신앙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성전을 허물어 버리는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모두 약탈당하고 불타 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의 처절한 고통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성전에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된 소망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로구나." 그제서야 그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올바른 신앙의 길을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귀한 교훈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소망의 진정한 대상을 분별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성전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어디에 궁극적 소망을 두고 있는지를 묻는 날카로운 영적 질문입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배웁니다. 특별히 가정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런데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지나치다 보면, 그 자녀와 가족 자체가 우리의 소망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소망은 그 사람을 주신 분, 우리 자녀를 선물로 주신 분, 가족을 맡겨주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둘째는 섬김의 자리도 소망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다 보면, 하나님이 맡겨주신 섬김의 자리와 봉사의 자리가 무척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귀하다 보면, 섬기고 일하다 보면, 어느새 그 자리 자체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어버립니다. 소망이 지나치면 그 소망이 오히려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자리가 소망이 아니라, 그 직분이 우상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참된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성전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이 소망이 아니라, 이 성전을 허락하신 분, 이 자리에 영원히 임재하고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복되고 아름다운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공간이 소망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이 소망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소망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만이 소망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직분이 소망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의 호흡을 주시고 삶을 허락하시고 구원의 은혜와 영생을 선물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소망이 되시기를 믿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가정이 소망이 아니라 우리 가정을 주신 하나님이 소망임을 고백하며, 날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성숙한 신앙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