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3편

성경
시편2권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시편 43편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그 억울함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소해야만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억울함과 분함을 가슴에 품은 채 세월을 보내다 보면, 그것은 서서히 내면의 병이 되고 깊은 상처로 자리 잡아 언젠가는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고 맙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 경험한 억울함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되면, 그것은 평생 마음의 질곡이 되어 인격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법과 제도가 온전히 정비되기 이전, 억울함을 당한 이들에게는 호소할 곳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법적 구제의 길도 막혀 있었고, 사람들에게 하소연해도 누구 하나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사회가 성숙해지면서 법체계가 정비되어 갔고, 억울함을 당한 이들의 문제가 상당 부분 법적 절차를 통해 해소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법에는 명백한 한계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법은 본질적으로 증거를 요구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명백하고 정황이 뚜렷이 범죄를 가리키고 있어도, 결정적인 물적 증거가 없으면 법적 구제를 받기 어렵습니다. 혐의 없음으로 석방될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법을 능숙하게 다루는 권력자들과의 분쟁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이들은, 호소할 곳조차 찾지 못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억울함의 호소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의 저자가 바로 이러한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깊은 억울함을 겪었으나 그 고통을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 괴로워하던 그는, 마침내 이 문제를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가지고 나아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시 43:1)

시인은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을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와 '간사하고 불의한 자'로 표현합니다.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란 실제 국가일 수도 있고, 국가에 버금가는 권세를 지닌 강력한 개인일 수도 있으며, 어떤 조직이나 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간사하고 불의한 자란, 법도 그를 제어할 수 없고 제도도 그에게 통하지 않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세력과의 대립 속에서, 시인에게는 호소하여 해결받을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상 시인이 활동하던 시대, 이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 이와 같은 문제는 결코 드물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을 보호해주거나 문제를 풀어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와 간사하고 불의한 자들로부터 받는 고통과 억울함을, 시인은 오직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왔습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시 43:2)

얼마나 억울했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느낄 정도였겠습니까?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경건하지 않은 나라와 간사하고 불의한 자로부터 받는 고통이 너무나 깊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감에 사로잡힐 정도였습니다. 우리 역시 삶의 여정에서 크고 작은 억울함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까?

복잡한 감정

이러한 억울함을 당할 때, 시인의 내면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합니다. 첫째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이에 대한 원망과 증오심이 가슴을 가득 채웁니다. '어떻게든 보복하고 싶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수를 갚고 싶다'는 마음으로 증오가 격류처럼 흘러넘칩니다.

둘째로, 자기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절망감이 몰려옵니다.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은 타오르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절망감이, 오히려 자신을 더욱 비참한 나락으로 밀어 넣습니다.

셋째로, 시인이 토로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일어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셨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사람인데, 이렇게 저를 버려두실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이러한 원망의 감정이 파도처럼 마음속에 일렁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진정으로 탁월한 점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분을 떠나버립니다. 혹은 하나님께 냉담한 마음을 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빛의 요청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 43:3)

시인은 하나님 앞에 두 가지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첫째는 주의 빛이요, 둘째는 주의 진리입니다. 그가 주의 빛과 진리를 구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함입니다.

먼저 주의 빛을 구합니다. 왜 빛을 간구하는 것일까요? 원수를 미워하고 정의감에 불타오르며,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다 보면, 마음이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는 것과 같아집니다. 분명히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이는 저 사람이고, 자신은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데, 정작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빛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짙은 어둠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빛을 간청합니다. "하나님, 제게 빛을 비춰주십시오."

빛이 임하면 어둠은 물러가지 않습니까? 시인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빛이 자신의 마음에 임하여, 마음속의 증오감도 사라지고, 자신을 향한 절망감도 사라지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도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시인이 진정으로 경이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원수를 멸하여 달라고 호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원수의 악한 행실을 조목조목 참소하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먼저 살아야겠기에, 이 문제로 인해 무너져가는 자신이 먼저 일어서야 하겠기에, 주의 빛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첫날 창조하신 것이 바로 빛이 아니었습니까? 빛이 이 세상에 임하면서 일어난 가장 극적인 변화는 어둠이 물러간 것입니다. 어둠은 곧 죄악이요, 어둠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인데, 빛이 이 세상에 임함으로써 우리를 무너뜨리는 어둠과 죄악이 물러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것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이 세상은 죄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 선언하셨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악한 이들 때문에, 원수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는 가까운 이들이나 주변 사람들 때문에 원망하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하거나 고통받고 있다면, 자신의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실상 자신은 정의를 세운다고 여겼지만, 그 정의를 세우는 과정에서 마음속이 캄캄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았습니까?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이 빛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빛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밝히실 수 있습니다. 악한 이들과 대적하다 보면, 원수 갚는 일에 골몰하다 보면, 원수를 갚기는커녕 자신이 그 원수보다 먼저 쓰러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끊임없이 빨려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시인처럼 하나님 앞에 빛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되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빛으로 임재하시면, 우리는 이 악한 세상의 어둠을 밝히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리의 요청

시인은 두 번째로 주의 진리를 간구합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는 어제는 이러하고 오늘은 저러하며 내일은 또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천 년 전이나 이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또 천 년 후에도 변함없이 동일한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 그러한 것이 존재합니까? 사람도 변하고, 가장 사랑하는 이도 변하지 않습니까? 법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는 세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진정으로 변하지 않고 영원히 동일한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제 마음속에 진리의 말씀을 주십시오."

악한 세력과 대적하다 보면, 경건하지 않은 나라와 간사하고 불의한 자들과 맞서다 보면, 자기만의 논리가 형성되고 자기 방어의 벽이 쌓여갑니다. 말이 많아지고 자기 의로움이 극도로 강화됩니다. 그러다 보면 진리의 말씀은 사라지고 자신의 의로움만이 가득 차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의 진리의 말씀을 붙들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참되게 살기 위해, 진정으로 승리하기 위해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단

시인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가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 43:4)

시인은 세상 법정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왜곡된 세상 법정, 강자와 부유한 자들이 주도하는 세상 법정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해결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빛과 주의 진리로 주의 거룩한 제단에 이르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자 시인의 내면에 기쁨이 회복됩니다.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는 문제가 해결되어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와 간사하고 불의한 자가 사라져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에 주의 빛이 임했고 주의 진리의 말씀이 임했으며, 그것을 가지고 주의 제단에 나아가기에 기쁨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원수 갚는 일에 골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억울하게 만드는 이들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삶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의 빛과 진리를 품고 기쁨 가운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3:5)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억울함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 우리 주변 사람들이나 경건하지 않은 세력, 간사하고 불의한 자들로 인해 마음이 혼란스럽고 억울한 감정이 치밀어 오릅니다. 저 사람을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분노가 끓어오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무력감이 엄습하며, 하나님을 향한 원망까지 일어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단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피난처입니다.

둘째는 주의 빛과 진리를 우리 마음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캄캄한 어둠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에 주의 빛을 비춰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 빛으로 다시 한번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의로움으로 무장한 마음에 주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말씀으로 우리의 내면이 진정으로 정화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큰 기쁨이 우리 마음에 회복되고, 그 기쁨을 품고 악한 세상을 이겨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는 원수 갚는 일에 몰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리석게도 원수 갚는 일에만 골몰하면 오히려 우리 자신이 먼저 무너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의 진리와 주의 빛을 품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며 승리하는 날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복된 하루를 살아가시기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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