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에서
시편 63편
고대 유적지를 거닐다 보면 오랜 세월을 건너온 인간 삶의 흔적들과 조우하게 됩니다. 집터와 학교, 관공서 터들이 흩어져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신전입니다. 가장 뛰어난 입지에 자리 잡은 이 신전들은 고대 문명의 여명과 더불어 발현된 인간 영혼 깊은 곳의 종교성을 증언합니다. 이름 모를 신을 향한 인간의 갈구는 장엄한 신전으로 형상화되었고, 그 규모는 실로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이 신전들 앞에 서면 인간의 종교심이 얼마나 뜨겁게 작동했는지, 그 열망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미지의 신을 향한 이방 종교의 신전만이 거대하고 웅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재와 잿더미로 돌아갔지만, 솔로몬 성전 역시 그 규모와 장엄함에 있어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지금도 세계인의 탄성을 자아내는 웅장함을 자랑합니다. 이처럼 인류가 이방의 신전을, 성전을, 성당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건축해 온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특정한 공간을 절대화하려는 인간의 본능 때문입니다. 그 거룩한 장소에 이르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 그곳에 자신이 경배하는 절대자가 현존하신다는 확신, 비록 그 본질은 온전히 알 수 없으나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성이 그곳에 머무신다는 종교적 확신이 이 모든 건축의 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그 자리를 신성시하고 그곳을 성역으로 여기며, 공간 자체를 아름답고 장엄하게 가꾸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의 절대화는 성경이 증언하는 신앙과는 본질적으로 배치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늘을 보좌로 삼으시며 땅을 발등상으로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만물은 그분의 손으로 빚어진 피조물이며,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주권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정교하게 공간을 설계하고 장엄하게 건축물을 세운다 하더라도, 과연 그곳에만 하나님께서 거하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공간 안에 가두려는 이 시도야말로 인간의 미련함이요, 깊은 영적 무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공간을 절대시하는 것은 참된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이방 종교적 사고이며, 우상숭배의 한 형태입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 다윗은 공간의 절대화를 철저히 거부했고, 광야의 시련 가운데서 이 진리를 하나님 앞에서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유대광야에서
시편의 표제가 증언하듯, 다윗이 유대광야에 머물던 그 시기는 참으로 고단하고 험난한 나날이었습니다. 다윗은 혼자서만 사울을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홀로였다면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었을 터이지만, 그가 최초로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에 피신했을 때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억울한 자들, 원통한 자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들 사백여 명이 다윗의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이 수는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증가하여 마침내 육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다윗과 운명을 함께하게 된 이 수백 명의 무리가 유대광야를 떠돌며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니, 과연 어디에 몸을 숨길 수 있었겠습니까? 산악 지형도 아닌 황량한 광야에서, 메마른 사막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보호하심이 아니고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이렇듯 매 순간 생명의 위협이 도사리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다윗은 이 시를 지어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1)
여기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물 한 방울 찾기 어려운 메마른 황무지에서, 다윗은 영혼으로 주님을 갈망하고 육체로 주님을 앙모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루를 버티는 것 자체가 벅찬데,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님을 갈망하고 앙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항변합니다. "지금 내 앞가림도 힘든데 어떻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루하루 생계를 위해 분투하는데 어떻게 평온한 마음으로 예배당에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온 힘을 다해 뛰어야 할 때이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쳐야 할 때인데,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이 시련이 지나가고, 이 위기가 모두 해소되고, 그래서 여유가 생기면 그때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고백입니까? 인생이 어려울수록, 힘겨운 순간일수록 더욱더 우리 인생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다윗이 수백 명의 무리와 함께 광야를 떠돌면서도 생존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비결은 바로 주님을 앙모하는 이 불굴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한 가지를 보시고 그를 보존하시며 살리셨습니다.
성소를 발견하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광야 생활 가운데 깊은 아쉬움이 하나 있었습니다. 과거 사울의 군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자유롭게 성소에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시간만 허락되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성막으로 들어가 성소에서 하나님과 깊고 긴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일 년에 단 한 차례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지만, 성소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친밀한 영적 교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성소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성막 근처에라도 갔다가는 사울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는 이것이 가장 아프고 간절한 갈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를 그리워하지만 나아갈 수 없는 이 절절한 갈망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윗의 영혼에 놀라운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 63:2)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성소를 향하여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성소에서 주님을 바라보았다"고 고백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지금 유대광야에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성소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성소는 사울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고, 성막은 사울의 군대가 장악한 곳입니다. 그렇다면 유대광야에 고립된 다윗이 어떻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 곧 성소라는 영적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으로 성막 건물 안에 들어가야만 성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바로 이 유대광야가 그에게는 참된 성소였습니다. 그는 공간을 절대시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공간을 절대화했다면 이러한 고백은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소에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한탄하며,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이토록 버려두십니까?"라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공간의 절대화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광야를 떠돌며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해 갈망하고 기도하다가 얻게 된 위대한 영적 발견, "성소에서 주님을 바라봅니다"라는 이 고백이야말로 다윗 신앙의 정수였습니다.
어디서나 예배자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 곧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가정은 성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우리의 일터 역시 거룩한 성소인 줄로 믿습니다. 이 진리를 망각하면 우리도 교회 건물을 절대시하고, 벽돌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물리적 구조물을 우상화할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고대인들이 화려한 신전을 숭배하며 알지 못하는 신들을 섬기던 미련한 행태와 본질상 다르지 않습니다. 참된 성소는 온 세상입니다.
우리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이 성소이며, 일터와 가정과 우리가 오늘 숨 쉬는 이 모든 공간이 성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배당 안에서는 경건한 모습을 연출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듯하다가, 예배당 문밖을 나서자마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 것, 이것을 어찌 성경적 신앙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온 세상이 하나님의 성소라면, 우리 발이 닿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참된 예배자답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러한 영적 깨달음에 이르렀고, 광야가 성소가 되었기에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예배를 드립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시 63:3-4)
자연스러운 영적 반응이었습니다. 유대광야가 성소로 변모하니, 다윗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두 손을 높이 듭니다. 마치 평온했던 시절 사울의 군대 장관으로서 성소에서 예배드리던 그때처럼, 그는 황량한 광야에서도 입을 열어 찬양하고 손을 들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공간을 성소로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믿음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는 소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간의 절대화를 경계하는 영적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다윗은 유대광야의 고난 가운데 처했을 때, 사울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영혼으로 주님을 갈망하고 육체로 주님을 앙모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놓여 있든지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공간을 절대시하는 미련한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고 있든,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성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 곧 참된 성소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다윗은 물리적으로 성소에 접근하지 못했지만, 유대광야야말로 그에게는 진정한 성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곳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임재하시는 곳이었으며, 그리하여 그곳에서 찬양이 울려 퍼졌고 그곳에서 경배의 두 손이 높이 들렸습니다. 우리의 일터가 성소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성소입니다.
셋째는 오늘 하루를 온전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일터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살지 못했고, 가정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소임을 고백하며, 이 하루를 온종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자로 살아가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