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7편

성경
시편2권

존재의 지평 확장

시편 67편

인간은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완벽하거나 완전한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바깥일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하며, 섬세한 디테일에도 강하면서 동시에 거시적 스케일까지 겸비한 사람을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늘 자기중심적이며 자신의 주변만 살피고 자기 자신만 돌아보기에 실수가 많고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섬세하시어 우리 각 사람, 각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세밀히 살피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무엇으로 인해 슬프고 아파하는지, 또 무엇으로 인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지를 모두 헤아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그 지평을 끊임없이 확장해 가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변을 바라보게 하시고,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으셔서 세상 모든 일에 관여하시는, 실로 광대하고 넓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넓은 지평 아래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가지만 알던 부족한 존재,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던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 지평 아래 머물면서 점차 옆을 바라보고 위아래를 살피며 우리의 지평을 확장해 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타인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믿음 생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의 기자가 바로 이러한 진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성장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시 67:1)

이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라는 표현을 두 차례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지키시며, 그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속적으로 "우리"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시인 자신을 포함하는 이스라엘 예배 공동체 전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전에 예배드리기 위하여 나아온 모든 주의 백성들, 그 안에는 나도 있고 너도 있으며,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이 다 이 "우리"의 범주 안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1절의 고백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디선가 익숙하게 접한 듯한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이 말씀을 듣고 읽어 왔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6장에 나오는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 기도에서 유래한 말씀입니다. 민수기 6장 22절에서 27절에 기록된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 6:24-26)

여기에서는 분명히 "너"라는 단수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얼굴빛을 "너"를 향하여 드신다고 말씀합니다.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신다는 고백을 노래하고 선포해 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지평이 확장되었습니다. "너에게"에서 "우리에게"로, 즉 "나에게"에서 "우리에게"로 믿음의 영역이 넓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신앙의 성장이라 부릅니다.

믿음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누구나 자기중심적입니다. 오직 내 문제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내 문제가 가장 크게 보이고, 내 고통이 가장 심한 고통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오롯이 그 문제만 붙들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이 문제를 풀어 주십시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나아 보입니다. 다들 잘 살아가는 것 같고,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유독 나만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믿음 생활을 지속하다 보면 주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하면 잘 견디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찾아오고, 주변에 이제 막 믿음 생활을 시작한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공동체가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이 공동체에 무엇이 부족하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비록 내 능력은 미미하고 미력하지만 이 공동체를 위하여, 즉 우리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이렇게 공동체와 자신을 연결하여 사유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성장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믿음의 성장을 어떻게 이해해 왔습니까? 신앙생활을 통해 능력을 얻는 것, 남들이 받지 못한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는 것을 단순히 믿음의 성장이라 여기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성장은 "나에게"에서 "너"로, "너에게"에서 "우리에게"로 존재 지평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도 분명히 나타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라는 표현을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범주는 살아가면서, 특히 믿음 생활을 통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게 마련입니다. 처음에는 내 입에 들어갈 양식만을 위해 기도합니다. 점차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그다음에는 내가 아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조금 더 확장되면 북녘 땅의 동포들을 위해 기도하고, 더욱 넓어지면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 그중에서도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린 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범주를 어디까지 확장시켜 가고 계십니까? 존재 지평의 확장이야말로 곧 우리 믿음 성장의 확장이며, 우리 신앙의 성숙도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요 척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하다 보면 내가 다소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내게 조금 불편함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볼 때 공동체에 유익이 된다면 기꺼이 참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참는 것에 서툽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합니다. 내가 싫기에, 내 기분이 상하고, 내게 불편하며, 내가 화가 나고, 내 기준으로는 이것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에게"에서 "너에게"로, "너에게"에서 "우리에게"로 믿음의 확장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교회공동체의 시각에서 상황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잠잠해집니다. 열 마디 하던 것이 한 마디로 줄어들고, 한 마디 하던 것마저 아버지 앞의 기도로 바뀌며, 그렇게 자신을 다스려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지점까지 믿음의 성장이 이루어졌는지 깊이 있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이 시인의 고백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었음을 다시금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민족에게로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2-3)

시인의 존재 지평은 얼마나 광대하게 확장됩니까? 민족들에게로, 모든 나라들에게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아론의 축복 기도는 "너에게"라는 단수로 시작하였습니다. 즉 그 축복을 받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백 년이 흐르면서 이 시인은 "우리에게"로 확장하였고, 이제는 이 세상 모든 민족과 열방을 향해 더욱 광대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같은 시대에 요나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8세기의 선지자였습니다. 요나 선지자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그는 얼마나 폐쇄적이고 자국민 중심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 명하셨습니다. 요나는 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에게 니느웨는 자기 나라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나라였고, 북이스라엘의 원수 된 나라였습니다. "어찌하여 그곳에 가야 합니까?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다면 몰라도, 만일 그들을 용서하신다면 나는 결코 가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요나의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요나가 마지못해 복음을 전하였는데, 놀랍게도 니느웨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고 돌이켰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뜻을 돌이키시어 그들에게 내리려 하셨던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요나는 분노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이 일의 결말을 보고자 요나는 머리에 띠를 두르고 높은 곳에 자리 잡아 하나님 앞에 항변하듯 앉아 있었습니다. 이처럼 폐쇄적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여,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우리에게"로, 나아가 세계 열방에게로 지평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백성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당부는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전도란 경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나 홀로 있으면 얼마나 편안합니까? 내 뜻대로 행할 수 있고, 내 생각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불편함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온 유대까지 존재 지평이 확대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그나마 견딜 만합니다. 우리와 같은 동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까지 나아가라 하십니다. 사마리아는 멸시받는 땅이요 천대받는 곳이었으며, 역사적으로 버림받은 지역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곳까지 가라 명하시고, 더 나아가 땅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까지 나아가라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경계를 허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의 성장은 존재 지평의 확장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신다는 아론의 축복 기도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 년 동안 입술에 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전에서 은혜를 받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신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너에게"에서 "나"로, "나에게"에서 "너"로, "너에게"에서 "우리에게"로 믿음이 확장되고 깊어지며 넓어집니다. 이러한 믿음의 확장이 오늘 우리에게도 허락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옳은 것이라는 편협하고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공동체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참고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견디어 내고 참아 내며, 우리의 입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모든 민족을 향한 기도의 폭을 확장합니다. "주의 도를 땅 위에,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해 달라"는 이 시인의 간구처럼, 우리의 기도가 세계의 열방을 향해 뻗어 나가고 확장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엇을 위하여, 어떠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믿음 생활의 연륜이 40년, 50년으로 깊어지고 길어지며 넓어질수록, 우리의 기도 역시 그 폭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오직 내 자녀만을 위하여, 우리 가정만을 위하여, 내 문제만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도의 영역이 확대되어야 합니다. "나에게"에서 "너"로, "너에게"에서 "우리에게"로, "우리에게"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기도의 폭이 넓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기도가 되고, 아버지께서 기뻐 받으시는 폭이 넓은 기도가 되며, 세계 열방을 품어안는 기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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