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과 평안
시편 76편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토록 간절히 고향을 찾는 이유가 건물로서의 고향집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됩니다. 집 자체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이 그립고 소중하기에 명절이면 먼 길도 마다 않고 고향 산천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타향에서 살며,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벗들마저 고향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곳은 더 이상 발길이 향하는 곳이 되지 못합니다. 부모와 형제가 계시고, 정든 친구들이 있으며, 일가친척과 어르신들이 살아 계시기에 그곳은 비로소 우리에게 의미 있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 신앙의 문을 열었던 첫사랑의 교회가 건물이 여러 차례 바뀌었더라도, 그곳에 목사님이 여전히 계시고 성도들이 변함없이 함께한다면 그 교회는 언제나 그리운 곳이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달려가고 싶은 곳입니다. 그러나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렸다면, 그곳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리고 쓸쓸해지는 장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들을 바라보실 때도, 구약시대에 성전을 바라보실 때도 하나님의 심정은 이와 같으셨습니다.
시온에 임재하신 하나님
하나님께는 솔로몬 성전의 장엄한 아름다움이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귀하게 여기신 것은 그 성전에서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사람이 귀한 것이지, 건물로서의 성전이나 화려한 공간 자체는 하나님께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편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생생히 전해줍니다.
이 시의 저자는 아삽입니다. 아삽은 다윗이 세운 세 사람의 찬양대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이 그들입니다. 찬양대 지휘자로서 한평생 성전에서 봉사했던 아삽은 다윗 시절 성막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앞장섰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립한 성전에서도 예배와 찬양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가 지켜본 성도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성막 시절의 성도들도 보았고 성전 시절의 성도들도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진심을 다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온전한 마음이 아니라 몸만 와서 예배 자리를 채우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며, 겉으로만 경건한 모습을 흉내 내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삽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모습의 성도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권면합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이 건물의 화려함에 압도되어 그저 몸을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시 76:2)
살렘은 예루살렘을 줄여 부르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예루살렘에 있고 시온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다윗 시절의 성막과 솔로몬 시절의 성전이 자리한 곳, 바로 시온산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아삽이 평생을 헌신했던 일터이자 성도들이 한데 모여 예배드렸던 그 거룩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전쟁을 멈추시는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참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시 76:3)
거기에서, 곧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화살과 칼과 방패를, 다시 말해 전쟁 자체를 그치게 하셨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이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예배드리는 이들의 헌신을 받으시며, 그 백성과 왕과 나라의 전쟁을 멈추어 주셨습니다.
실로 다윗 시절은 태평성대의 시기였습니다. 전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윗은 단 한 차례도 패배를 맛보지 않았습니다. 솔로몬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았던 전반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그 지역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고, 가장 번영하는 나라였으며, 어떤 전투에서도 패하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이유와 근본 원인을 이렇게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자들의 기도와 헌신을 받으시고 전쟁을 거두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귀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면,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힘이 없으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겸허히 엎드려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전쟁 같은 문제들을 친히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세우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에 두지 않으니 주변에서 수많은 일들이 끊임없이 불거지고 터져 나오며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문제들을 수습하기에 정신이 없어집니다.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 무수한 문제들이 파도처럼 밀려드는데 이것들을 하나하나 감당하다 보면 어느새 인생이 저물어버립니다. 그제야 뒤돌아보면 삶이 얼마나 허망하게 느껴지겠습니까?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철저히 세워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다른 문제들이 발생할 여지 자체가 사라집니다. 말씀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멈추게 하신다고. 우리 삶의 숱한 전쟁 같은 일들과 문제들을 해결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은 한시도 쉬지 않고 당신의 백성을 살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단 한 가지를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를 빚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동산의 모든 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 누릴 것, 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는데 오직 한 가지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순종만 지키면 나머지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순종이 무너지는 순간 모든 것이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땀 흘려 일해야 하고,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며, 에덴에서 쫓겨나고 인생의 온갖 불행이 그때부터 물밀듯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순종의 줄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람 장군 나아만의 이야기도 깊이 새겨볼 만합니다. 이방인이었던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이 불편했고, 자존심이 상했으며, 선뜻 믿기 어려웠지만 그는 끝내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믿음이 미흡했던 이방인도 요단강에 몸을 담그고 일곱 번 씻으니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순종은 우리 인생의 모든 난제를 푸는 가장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 마음속에 불순종의 씨앗을 끊임없이 뿌립니다. 순종하지 않아도 될 온갖 이유들을 속삭이고, 자기 생각과 자기 방식, 교만과 지난 경험들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꾸만 어긋나게 만듭니다. 이로 인해 우리 삶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걱정과 염려가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번 온전히 순종의 길을 걸어 보십시오.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인생의 전쟁 같은 일들이 모두 해결되리라 확신합니다.
온유한 자를 구원하심
아삽은 이 진리를 거듭 강조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 (시 76:6)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깊이 잠들었다고 노래합니다. 전쟁이 완전히 그쳤음을 다시 한 번 선포하는 것입니다. 병거와 말이 잠들어 버렸다면 싸움 자체가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물 그 자체에 의미를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윗의 성막 시절에도, 솔로몬의 성전 시절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예배드리며 온 마음으로 순종하는 이들을 위해 병거와 말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고요히 잠재우시고 전쟁을 완전히 그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시 76:9)
땅의 모든 온유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의 의미는 우리가 통상 떠올리는 온유와는 사뭇 다릅니다. 성경이,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여 일관되게 말하는 온유의 개념은 야생동물의 성품에서 유래합니다. 본래는 거칠고 본래는 길들여지지 않았으나, 좋은 조련사를 만나 주인에게 순하게 길들여진 성품을 온유라고 부릅니다.
타고난 성품은 거칠기 그지없습니다. 본래는 제멋대로이고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 그 말씀에 순하게 길들여진 상태, 이것이야말로 온유의 참된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길들여진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길들여진 사람들을 구원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민수기 12장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어찌 온유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격한 성정을 다스리지 못해 사람을 때려죽였던 인물이 아닙니까? 몇 번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하며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사양했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온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까닭은 바로 하나님께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팔복 말씀에서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모세가 온유했고, 모세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자, 삶에서 전쟁이 그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 그러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땅인 저 천국의 영토를 허락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합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이나 화려한 공간 자체가 하나님께 귀한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진심을 다해 예배드리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야말로 하나님께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둘째는 순종이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는 길은 오직 철저한 순종입니다. 순종하면 전쟁이 그치고, 불순종하면 문제가 끊이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의 교훈이 이것이며, 나아만 장군의 치유가 이를 분명히 증거합니다.
셋째는 하나님께 길들여진 온유한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본래의 거친 성품이 하나님 말씀에 순하게 길들여져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 참된 온유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참된 평안을 넉넉히 허락하십니다.
오늘 이후의 삶에서 건물로서의 성전이나 공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성도의 삶이 귀하다는 진리를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이곳에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며 먼저 하나님께 순종하오니, 우리 삶의 전쟁 같은 일들이 잠잠해지고 온전히 해결되는 은혜가 모든 성도에게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