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와 현재는 연결되어 있다
시편 79편
우리가 눈으로 보며 살아가는 이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직 살아가지 않은 미래의 세계가 지금 현재와 연결되어 있고, 조상들이 살아왔던 과거의 세계가 오늘의 현재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을 초연결 사회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바로 그러합니다. 전혀 낯선 사람,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사람을 만나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사람과 나를 연결하는 연결고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아는 사람을 그분이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어쨌든 얽히고설킨 관계가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존재합니다. 한 다리, 두 다리만 건너면 모든 인간관계는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역과 지역이 연결되어 있고, 나라와 나라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도 가고, 각 나라는 무역을 하며, 갈등하는 나라는 전쟁도 합니다. 초연결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세상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세상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은 과거 세상의 연장일 뿐입니다. 조선 시대, 그 이후의 구한말 시대, 그리고 지금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한말의 무능한 정치인들과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던 자들의 작태가 일제강점기를 만들었고, 그 이후로 한국전쟁을 촉발했으며, 그 이후에 각성한 사람들이 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수고한 결과로 오늘의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는 현재를 만들어가는 큰 우물이 되고, 위대한 과거의 역사가 오늘의 현재를 만들어냅니다. 마찬가지로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는 오늘 우리의 행동과 삶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와 참으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멸망의 현장
오늘 본문 시편 79편의 시인이 쏟아내는 절규와 탄식이 바로 이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의 저자를 아삽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삽의 이름을 빌린 그 후손이 기록한 시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시 79:1)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언제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기원전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남유다가 완전히 멸망했을 때, 바로 그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시인의 눈으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똑똑히 목격하고, 마치 사진으로 현상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시 79:2-3)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쳐들어와서 성전을 유린했습니다. 성전의 모든 집기들을 다 빼앗아 갔고, 성전을 불태웠으며,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포로로 잡혀 가려면 건강해야 그 멀고 먼 바벨론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칼날에 처리되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들, 건강하지 않아서 죽고, 저항하다가 죽은 사람들, 나라를 잃고 끌려가는 자들과 죽은 자들, 그 시체가 길에 있는데 그것을 처리하지 못하고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는 아픔과 슬픔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웠겠습니까? 이러한 참상을 직접 눈으로 경험했던 사람이기에 지금 이토록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시 79:4)
아삽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 시인도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삽은 성전의 찬양대 지휘자였으니, 아마 이분도 이런저런 일로 성전에서 음악을 담당하거나 다양한 일을 맡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불탄 것보다, 나라가 망한 것도 물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성전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성전, 하나님의 집이었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 세우셨던 이 성전이 무너져 내린 것이 그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눈물이며 아픔이었습니다.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한탄하고 조롱하며 조소합니다. 그것을 시인은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상의 죄
그런데 이 시인이 참으로 의미 있는 탄식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시 79:8)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참으로 가련하지 않습니까? 나라를 잃어서 가련하고, 부모 형제가 죽고 끌려가서 가련하고, 더 이상 희망이 없어서 가련하고, 언제 다시 이곳이 회복될지 몰라서 가련합니다. 그런데 지금 매우 가련하게 된 까닭을 시인은 '우리 조상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죄를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 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죄를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조상들의 죄를 보시고 지금 여기서 재앙을 내리시고 심판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북이스라엘이 망한 것, 남유다가 이렇게 망한 것,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시절에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도 초기까지는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솔로몬도 하나님 앞에 듣는 마음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후기에 그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처첩과 후궁과 빈궁들이 무려 천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방의 여인들이 우상을 가지고 들어왔고, 솔로몬도 우상 숭배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솔로몬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셨으나, 솔로몬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 때는 건드리지 않으셨지만, 솔로몬 사후에 나라를 나누셨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누신 것입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여로보암이 죄를 지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웠고, 절기를 마음대로 바꾸었으며, 레위인 아닌 일반인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통치했습니다. 결국 성경을 읽어보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죄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 나라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기원전 722년에 멸망했습니다.
남유다는 또 어떠했습니까? 남유다는 위대한 성전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전은 가지고 있었으나, 성전 신앙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모여든 종교 지도자들, 정치 지도자들, 그들 모두가 다 타락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그들은 백성들을 아끼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망할 때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위대한 선지자들이 모두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했으나,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볼 때, 결국은 조상들의 죄가 흘러흘러 후손들에게까지 들어와서 이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의 죄를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 부디 우리를 긍휼히 여겨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책임
사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하루의 삶이 우리 자녀들에게,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지 못할 미래 세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때로 거추장스럽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말아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취사선택해서 지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보고 있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다 보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다음 세대, 미래 세대들이 그것을 다 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여로보암의 죄를 짓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판단하고, 타협하고, 지키고 싶은 것은 지키고, 버리고 싶은 것은 버린다면 우리 후손들이 가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후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부모의 죄를 기억하지 마시고 우릴 긍휼히 여겨 달라"고, "우리를 가련하게 여겨 달라"고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를 드리게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후손들의 기도가 "하나님, 우리 부모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믿음 생활 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나도 그 신앙을 가지고, 부모님 살아계실 때는 몰랐는데 지금 떠나고 나니 나도 그 뜻을 알고 믿음 생활 잘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해야 부모가 부모다웠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이 이스라엘 백성들, 이 시인의 절규처럼 조상들이 잘못 살아서 후손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신앙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합니다. 초연결 사회는 단지 물리적인 연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세대와 세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상들의 신앙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오늘 우리의 신앙이 다음 세대의 믿음을 형성합니다. 이 연결의 원리를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는 오늘의 신앙생활이 후손들에게 유산이 됨을 자각합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한 세대로 끝나지 않고 북이스라엘 멸망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솔로몬의 타락은 나라를 둘로 나누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신앙적 선택과 삶의 모습이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축복이 될 수도 있고, 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취사선택하지 않는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키고 싶은 것만 지키고 버리고 싶은 것은 버리는 신앙은 결국 후손들에게 잘못된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며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의 삶에 정신 바짝 차리고 믿음 생활 제대로 하여,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신앙의 유산을 남기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