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공평
시편 82편
분노와 절망이라는 두 단어는 언뜻 보면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대척점의 감정처럼 여겨집니다. 분노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보이고, 절망은 수동적인 감정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노와 절망은 실로 동일 선상에 놓인 감정들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공동체에서 권력과 모든 이권을 소수의 몇몇 사람만이 독점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공동체에 속한 다른 구성원들은 당연히 분노하게 됩니다. 권력을 함께 나누어 달라고,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함께 누리자고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분쟁이 생기고 갈등이 심화되어 법정에까지 서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법의 심판을 받으면 당연히 자신들이 이길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법의 심판이 엉뚱하게 소수의 권력자들 편을 들어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순간 분노는 곧 절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처음에는 분노하다가 점차 '이렇게 해도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그다음에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주로 국가권력이나 거대한 공권력에 대해 이러한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정의와 공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세상의 왕들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자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가지고 통치하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분노와 절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기반으로 한 공평한 재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저마다 공평이라는 개념을 다르게 정의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공평이라고 여기시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관점에서 진정한 공평이란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심판자 하나님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시 82:8)
시인은 하나님 앞에 세상을 심판해 달라고 간절히 청원합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하나님께 직접 세상을 심판해 달라고 호소하겠습니까? 수많은 억울한 일을 겪고 세상의 재판관들에게 거듭 실망하고 낙심한 끝에, 시인은 마침내 하나님 앞에 세상을 심판해 달라고 청원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셔야 할 이유는 참으로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결국 세상의 최후 심판자는 마땅히 하나님 아버지가 되셔야 옳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나는 세상을 창조하고 그냥 내버려 둔다"라고 하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세상에 깊이 개입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다스리시는 분이시기에 당연히 세상을 심판하시고 관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한 시인이 하나님께 세상을 심판해 달라고 간청할 때에는 그 나름의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깨끗하고 죄가 없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주가 되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죄가 없는 사람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경찰을 보면 두렵고, 재판정에 서기만 해도, 그곳에서 증언을 한다고 생각해도 두려운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재판을 요청하려면 반드시 자신이 깨끗해야 합니다. 죄가 없어야만 그렇게 부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억울한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불의한 재판의 실상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시 82:2)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불공평한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항상 악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재판관들이 언제나 악인 중심의 재판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불공평한 판단을 하게 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정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법적 기준을 가지고 판단을 한다면 불공평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판할 때 적용해야 하는 기준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모세오경, 특별히 신명기 법전이라 불리는 그 율법이 그들에게는 판결의 근거요 기준이 되었습니다. 신명기 법전, 곧 모세오경을 중심으로 재판했다면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공평한 판단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 곧 법전의 기준을 무시했다는 뜻입니다. 설령 그 기준이 있었다 하더라도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기준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권력자가 바로 그들의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악인이라고 표현한 존재는 세상에서 권세 잡은 권력자들입니다. 재판관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의 입맛에 맞추어 판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 억울한 사람들이 세상의 판결에 기대어 이 권력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호소해도, 오히려 그 재판이 권력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되어 버리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시인이 하나님 앞에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억울한 사람들은 어디 가서 호소해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하나님께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약자를 위한 공의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시 82:3)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라, 빈궁한 자와 곤란한 자를 위하여 공의를 베풀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의와 공의, 곧 공평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에 우리가 선뜻 동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의 기준이 어떻게 가난한 자와 곤궁한 자, 빈궁한 자, 고아와 과부가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부자들은 이것이 역차별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공평하지 못하다고 항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정신을 깊이 곱씹어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일들을 살펴보면,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은 철저하게 고아와 과부의 재판관이시며, 가난한 자와 곤궁한 자를 편들어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 원짜리 한 장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억만장자에게 만 원과 가난한 고아에게 만 원은 액면가로는 동일하지만, 그 가치는 전혀 다르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볼 때는 똑같은 만 원짜리 한 장이지만, 그 사람의 상태와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공평이라고 말하는 것은 항상 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고려하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공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제도가 상당히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기업무를자의 법, 곧 고엘 제도입니다. 이 고엘 제도가 성경에 가장 아름답게 나타난 것이 바로 룻을 책임진 보아스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기업무를자의 책임을 다한 보아스 입장에서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룻의 남편이 죽었고, 그들은 가난해졌으며, 가지고 있는 땅을 이미 다 저당 잡히고 팔아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업무를자, 곧 가장 가까운 친족이 책임져야 했습니다. 자기 돈으로 그 땅을 다시 사서 돌려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보아스가 부자라는 이유 하나로 이 책임을 다해야 했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룻을 거두어 그 사이에 자녀를 낳으면 그 자녀는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 죽은 룻의 남편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보아스에게는 손해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도가 이스라엘 법전, 신명기 법전에 엄연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철저하게 고아와 과부, 빈궁한 자와 곤궁한 자를 위한 하나님의 법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셨을까요?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이 바로 그러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적 평등의 관점에서 공평하다면, 죄 지은 자가 그 죄값을 치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셨으니 내가 죄를 지었으면 그 죄값을 내가 지고 내가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약자의 하나님이시기에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대신 죄짐을 지고 가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공평대로 하나님이 그대로 판결하셨다면, 우리는 내가 지은 죄의 값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공평한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약하고 부족하고 연약하기에 하나님의 공평의 덕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하나님의 공평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단순하게 교회 안을 한번 살펴봅시다. 교회 안에서 약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 아닙니까? 소득이 없는 분들입니다. 당연히 교회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중심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약한 이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시다가 이제 등이 굽고 몸이 불편해지신 어른들, 그분들을 돌보는 것이 당연히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교회가 헌금 많이 하는 사람, 목소리 큰 사람, 교회 안에서 크고 작은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을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공평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공동체나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곧 공평의 기준을 가지고 행동하고 판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만이 참된 심판자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재판관과 권력자들이 불공평한 판단을 할지라도, 세상을 창조하시고 소유하신 하나님만이 참된 심판자이십니다. 우리의 억울함과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공평은 약자를 향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공평은 단순한 균등 분배가 아니라, 가난한 자와 고아,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바로 하나님 공평의 절정입니다.
셋째는 우리도 하나님의 공평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세상에서 힘없고 가난한 자들, 여전히 죄짐을 지고 힘겨워하는 자들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약한 자와 어려운 자를 돌보며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는 과연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기준으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살피고 돌아보며, 그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