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는 용사의 기도
시편 88편
우리 각자의 삶을 한 편의 영화라고 가정해 본다면, 과연 우리 영화는 재미있는 영화일까, 아니면 무미건조하고 무료한 영화일까. 재미있는 영화라 함은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주인공이 초반에는 어려움을 겪다가 시간이 갈수록 그 어려움을 조금씩 극복해 나가며, 마침내 고귀한 성취를 이루어 가는 서사를 갖춘 영화를 말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고 즐거운 코미디 영화도 재미있는 영화에 속한다.
반면에 재미없는 영화는 밑도 끝도 없고, 기승전결도 불분명하며, 주인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생만 하다가 아무런 반전 없이 끝나버리는 영화다. 중간에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영화가 바로 재미없는 영화다. 그런데 우리 인생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안타깝게도 재미없는 영화에 가까운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우리 인생에서 극적인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저 고생하며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고생하고 있으며, 부모님도 착하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사셨지만 호강 한번 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내 인생 또한 딱히 즐겁거나 재미있는 것이 별로 없으니, 따져보면 우리 인생은 그저 그렇고 그런 인생 같다. 오늘 읽은 시편의 시인은 아마도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처지에서, 자기 인생의 반전 없는 고통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인의 고통과 상황이 어쩌면 오늘 우리의 인생과 무척 닮아 있고 비슷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의 피폐함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시 88:3-4)
시인은 영혼이 스올에 내려가고 육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고백한다. 곧 몸과 영혼이 모두 피폐해져 있음을 토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을 아주 역설적으로 잘 표현하는 말이 있으니, 바로 "힘없는 용사와 같다"라는 부분이다. 힘없는 용사라는 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표현이다. 용사가 가지는 이미지란 무엇인가. 말을 타고 달리며 한 손에는 활을 들고 적을 쏘고,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서 적들이 오면 베어 넘기며, 힘 있고 용맹스러운 모습으로 적진을 휘젓고 다니며 승리하는 자의 모습이다. 우리는 용사의 이미지를 그렇게 떠올린다. 그런데 시인은 용사 앞에 "힘없는"이라는 단어를 두었다.
힘없는 용사란 패배한 용사, 싸움에서 진 용사,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용사, 곧 자신의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을 의미한다. 시인은 자신의 인생이 이처럼 힘없는 용사와 같다고 말한다. 사실 이것은 시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역시 이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사업을 하는데 돈이 없는 사업가를 생각해 보라. 사업가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 일터를 누비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런데 돈 없는 사업가는 사실상 자신의 인생에서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다. 수상 경력이 없는 운동선수는 또 어떠한가. 요즘 올림픽이 한창인데, 수상 경력이 있는 운동선수가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다. 그런데 트로피 하나, 메달 하나 목에 걸어보지 못하고 받아보지 못한 운동선수야말로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영혼과 육체가 가장 피폐해져 있는 사람일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 인생은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시도하고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힘없는 용사처럼 영혼과 육체가 피폐해져 있는 것 같은 삶을 지금도 여전히 살고 있을지 모른다.
고독한 절망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시 88:8)
힘없는 용사와 같은 삶이 오래 지속되니 주변에서 나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렸다. 힘없는 용사 곁에 누가 있고 싶겠는가. 실패한 인생 곁에는 주변 사람들마저 아무도 없이 다 떠나버린 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편을 읽으면 욥이 생각난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고 큰 부자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재산을 모두 잃었고, 자녀들도 잃었으며, 건강도 잃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몸을 긁고 앉아 있는데, 이 모습을 본 욥의 아내가 너무나 울화통이 터져서 당신을 이렇게 만든 하나님을 차라리 원망하고 죽어버리라고 말할 정도였다. 멀리서 찾아온 세 명의 친구들도 욥을 위로하지 않았다. 위로하러 온 것 같았지만 사실은 욥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를 멀리했다. 사람이 모두 떠난 것이다. 자녀들은 죽어서 세상을 떠났고, 아내마저 이렇게 그에게서 마음이 떠나버렸으며, 주변의 친구들도 진심으로 위로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이 다 피폐해져 있는데 주변 사람들마저 없다.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시 88:11)
시인은 하나님께 이처럼 절망적인 호소를 한다. 이 말은 곧, 하나님 내가 죽고 난 뒤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실하심을 내가 알고 있는데, 내가 멸망당하고 난 뒤에 하나님의 성실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주의 진리와 주의 사랑이 내 무덤 속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제가 지금 목숨이 붙어있으니, 지금은 제가 숨 쉬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나를 건져 주십시오 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오죽 답답하고 힘들었으면 이렇게 고백하겠는가. 이제 자신이 이런 상황을 더욱 견디기 힘들어서 죽음이 코앞에 왔다는 것을 절감하며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시 88:15)
시인의 이런 고난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이런 고난을 당했다고 했다. 하루 이틀 당한 고난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당한 고난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 몹시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내 인생은 한 번이라도 피어보는 날이 없습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호소한다. 시인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지 않는가. 한 번도 행복해져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러한 고통을 하나님께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시 88:18)
시인은 고백한다. 여전히 내 인생은 흑암투성이라고. 나를 사랑하는 자, 내 친구가 멀리 떠났고, 내 인생도, 나를 아는 모든 사람도 모두가 흑암 가운데 있다고. 시는 이렇게 끝나고 만다. 반전이 없다. 반전과 놀라운 역사가 없고, 내가 이렇게 주를 기다렸더니 내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하는, 우리가 기대했던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그대로 끝나버린 것이다. 이 시인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이 사람의 끝이 정말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행복이 찾아왔을까, 아니면 정말 이렇게 죽음으로 가버렸을까. 너무나 궁금하다.
구원의 하나님
그런데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시인이 이 시의 첫머리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는 사실이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시 88:1-2)
시인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는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르지 않는가. 시인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상정하고 있다. 시인이 말하는 구원은 이 세상에서 자기 인생이 획기적으로 반전되고 달라지는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혼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기대하며 부르는 노래다. 결국 이 시인은 현세적인 세상, 자기 눈앞에 보이는 세상만을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의 절망을 이토록 절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80년 혹은 백 년 남짓한 짧은 세상만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오고 오는 모든 인류의 삶까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저 천국 백성이 되고 그다음에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삶까지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눈에 보이는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내 눈에 보이는 인생이 전부라면 사실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믿음 생활하고 살아가는 우리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복된 것, 즐거운 것,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낙을 누리지 못하고 절제하고 허리띠 졸라매며 하나님 섬기는 우리가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생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삶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면 그곳에서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 거기는 영원한 인생인데, 하나님은 그 인생까지도 우리를 주장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시인은 자기의 인생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기억한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호소하는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처럼 우리 인생도 힘없는 용사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재난이 가득하고 생명에 힘이 없으며 언제나 약하고 악한 세상에 지고 쓰러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시인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께 호소하는 믿음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삶이 끝이 아니라 내 인생 너머에서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셋째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흑암에 두지 마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을 마치고 영생복락을 누리는 천국으로 가야 할 터인데, 천국에서의 그다음 삶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온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고 우리의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하나님과 함께 오늘 하루를 복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