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지기 쉬운 인생
시편 9편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그릇들을 떠올려 봅니다. 스테인레스로 만든 그릇은 특별히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아도 됩니다. 거칠게 다루어도 깨어질 염려가 없으며, 심지어 던져도 끄떡없습니다. 그러나 도자기로 빚은 그릇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값비싼 도자기 찻잔은 금이 가거나 이가 빠지기 십상이고, 설거지 중에도 조금만 부주의하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자기 그릇을 다룰 때면 늘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한계를 지닌 존재이며, 흙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듯이 언젠가는 부서지고 무너지며 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단지 육체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는 물론이거니와 영혼도, 마음도 모두 부서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사람이 사람을 다룰 때는 상처를 주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야 합니다. 항상 선한 말, 따뜻한 말, 그 사람을 세워주고 배려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상처를 주어 그를 깨뜨리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인간의 본질이 이렇게 깨어지기 쉬운 그릇 같은 존재임을 깊이 인식하고 기억하는 다윗이 오늘 이 시편을 지어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시 9:1)
시편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고백이기에 이런저런 이유를 처음부터 나열하지 않습니다. 다만 감사의 마음만을 쏟아냅니다. 그런데 다윗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하나님께 감사할 특별하고 구체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를 올려드린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를 다윗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시 9:4-5)
하나님께서 의롭게 심판하신 것에 대해 다윗은 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의롭게 심판하시는 장면을 수없이 목도했습니다.
우선 다윗은 젊은 시절 이스라엘 군대의 장관으로 섬기며 수많은 전쟁터를 누볐습니다. 그 전쟁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무리들, 하나님을 비방하는 이방 민족들이 심판받는 모습을 그는 셀 수 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라는 사람의 칼을 통해서, 그의 군대를 통해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장면을 얼마나 많이 경험했겠습니까?
사울 왕에게 쫓겨 십수 년을 도망 다니던 시절에도,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이는 악한 사울이었습니다. 다윗은 무죄했고 잘못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악한 자를 심판하셨지 선한 자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말년에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쫓겨났을 때도 가슴 아팠지만, 하나님은 반란을 일으키고 죄를 범한 압살롬을 심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정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는 정확하고 분명하며 확실한 판결이 내려집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깨닫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일들, 화가 치미는 일들,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다고 여겨질 만한 모든 일들이 결국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의로움과 공의로 명확하고 정확하게 판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믿고 하나님의 법정을 신뢰하며 기다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됩니다.
내가 직접 판결을 내릴 이유도 없고, 내 손으로 악을 처단할 필요도 없습니다. 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것을 붙들고 화내고 분노하고 있어 봤자 우리 가슴만 아프고 소중한 시간만 낭비할 뿐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의 법정
그런데 하나님의 법정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악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윗 자신도 하나님의 정의로운 법정에서 심판받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밧세바 사건으로 인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세 가지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가 눈물로 통곡하며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셨지만, 죄에 대한 책임만큼은 다윗이 짊어지고 가게 하셨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리신 징벌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밧세바와 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선포, 네 집에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 그리고 너는 은밀한 곳에서 이 악을 행했지만 네 아내들은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욕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밧세바가 낳은 아이는 죽었습니다. 다윗의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의 반란 때 그의 후궁들이 왕궁 옥상에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압살롬에게 욕을 당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은 다윗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봐주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를 원수에게만 적용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의로운가? 나에게는 문제가 없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타인에게만 적용시키는 것,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래되고 고질적인 병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나를 통해서, 나에게 우선적으로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이 말씀 앞에서 자유로운가? 나는 하나님의 법정 심판대 앞에서 깨끗한가?
우리 스스로를 먼저 살피고 돌아볼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법정에 정의와 공의를 나와 온 세상을 통해 공평하게 세워가실 것입니다.
자기 꾀에 넘어지는 악인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시 9:15-16)
자기가 판 웅덩이에 자기가 빠지고, 자기가 친 그물에 자기 발이 걸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해도 아이러니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방 나라들,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왜 이런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는 것일까요?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그들의 시야에 하나님이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자기 꾀에 자기 스스로 넘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조차 밧세바 사건을 완전범죄로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죄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숨길 수 있다고 믿으며 자기 인생의 죄악을 도모하는 자들은 결국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지고, 스스로 친 그물에 발이 얽혀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함이 최고의 미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곧 정직하라는 뜻입니다. 숨기지 말고, 가리지 말고, 포장하지 말고, 그저 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악을 도모하거나, 자기 생각을 가지고 포장하려고 시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이 바로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임을 깨닫는 지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시 9:20)
여기서 '인생'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여기서 인생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에노쉬'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에노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부서지기 쉬운 존재,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에노쉬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느낌이 듭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6)
아담이 셋을 낳았고, 셋은 에노스를 낳았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에노스는 아담의 손자이며 셋의 아들입니다. '에노쉬'라는 단어의 인명 명사형 표현이 바로 '에노스'입니다.
아담의 손자가 에노스가 되었습니다. 아담의 아들 셋이 자기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부서지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로 지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담은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 모두 하나는 세상을 떠났고 하나는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셋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셋이 자녀를 낳았습니다. 셋이 자신의 인생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은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떠나가고, 연약하고, 상처받고, 미련한 우리의 존재. 결국 우리 조상 아담을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셨다는데, 우리 존재가 바로 이러한 존재로구나. 이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때부터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연약한 존재가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부르는 것 외에 무슨 다른 길이 있겠습니까? 인생인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우리 스스로 깨어지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나의 현실을 자각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오직 그 길뿐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손자 에노스 때부터, 그 먼 옛날부터 이미 사람들에게는 모두 알려진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생임에도, 깨어질 수밖에 없는 질그릇임에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있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한 교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만이 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을 보듬어 주실 수 있습니다. 온통 박살 나고 깨어진 우리의 심령도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새롭게 복원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육체는 깨어진다 할지라도, 천국에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로운 법정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지혜를 배웁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모든 억울함과 불의를 정확하고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다만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정은 누구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십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미덕임을 기억합니다. 자기 꾀를 부리며 악을 도모하는 자는 결국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지고 자기가 친 그물에 걸리게 됩니다. 숨기고 가리고 포장하려 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모습을 사랑하십니다.
셋째는 우리가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인생임을 겸손히 자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에노스, 곧 죽을 수밖에 없고 부서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학대하지 말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믿음의 형제들을 향해서도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기억하며 서로를 조심스럽게,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삶을 온전히 의탁하는 복된 날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