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전환
시편 121편
어린아이들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 모습을 닮은 사람 모양의 인형도 좋아하고, 동물의 모습을 닮은 인형도 좋아합니다. 남자아이들은 자동차 모형을 좋아하고, 특별히 공룡 모양의 인형은 더욱 좋아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 형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에게는 추상적인 사고의 능력 또한 있습니다. 아이들이 의외로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옛날이야기입니다. 부모님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런데 옛날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장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그토록 좋아합니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방금 들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 보라고 하면 매우 훌륭하게 그림을 그려냅니다.
인간의 내면 속에는 이처럼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추상적 사고의 능력을 억압해 버리면 그 능력을 발현하지 못하게 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만 보여주고 손에 들려주면 추상적 사고의 능력이 퇴보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손에 잡히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추상의 영역 가운데 계시지만,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갈망하며 항상 기대하고 소망하는 매우 특별하고 탁월한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도 역시 그런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의 표제어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가 성전을 향하는 순례자의 노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구하는 시선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 121:1)
오늘 이 시편의 시인은 도움을 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사람들은 누구나 다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을 한평생 살면서 자기의 능력으로만, 자기 힘으로만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물질적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고, 누군가의 힘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데 시선이 산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향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동네에 살고 있고, 마을과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권력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성 안에 있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성 안 사람들, 권력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시선을 향하지 않고 산을 향하여 자신의 시선을 돌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산은 시온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온산은 예루살렘이고, 그 예루살렘에는 예루살렘 성전 곧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도움을 위해 하나님을 향하여 시선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한다'는 말은 지금까지 자신의 시선이 동네와 마을의 힘 있는 권력자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어떤 도움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줄 수 있는 도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구원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시선을 새롭게 한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신앙이, 특별히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되는 것은 시선과 관련이 있습니다. 무엇을 보느냐, 어디를 향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성장과 믿음의 방향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산을 향한다는 것, 곧 신적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은 이 사람의 믿음이 드디어 올바른 방향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38년 된 병자의 교훈
요한복음 5장을 보면 38년 된 병자가 나옵니다. 그 배경이 베데스다 연못가였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각색 병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물이 동하기만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씩 천사가 그 연못에 내려와서 물을 휘저어 놓고 가면,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그 물에 들어가는 자가 병 나음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 전설 하나를 믿고 38년 동안이나 그곳에 머물면서 병 낫기를 구하는 안타까운 병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 앞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참으로 의아한 질문입니다. 38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병 낫기를 구하는 사람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묻는 것이 과연 질문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질문을 들은 그 병자의 대답이 어떠했습니까. "물이 동할 때 나를 저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제가 이 모습으로, 이 모양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 줄 수 있는 예수님이 바로 자기 눈앞에 계십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질문하시는데, 그의 시선은 여전히 연못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지금까지 자기를 못에 넣어 주지 않고, 물이 동할 때마다 자신을 밀쳐냈던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원망의 시선으로 그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고, 여전히 지금도 예수님과 대화 나누는 이 순간에도 혹시라도 물이 동할까 하여 그의 눈은 여전히 연못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38년 동안 병이 나을 수 있었겠습니까.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하면서도 여전히 '한 번쯤 물이 동하지는 않을까?' 하고 저 경쟁사회인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어서는 우리 믿음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 생활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 사람들을 원망의 시선으로 보고 있어서는 우리 믿음이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의 시선을 이 물에서, 혹은 사람들에게서 돌려서 나를 보고 내 음성을 들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시선을 옮겨서 팔자를 고쳤습니다. 병이 나았습니다.
우리가 산을 향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세상을 향할 때 우리의 삶이 어떠했는지, 허무한 권력을 향할 때 우리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향하여 아귀다툼할 때 그때 우리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살피고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시선을 옮기라는 뜻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러한 믿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2)
시인은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시선을 산을 향하고 있습니다. 시온산 예루살렘 성전, 그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면서 자신의 도움을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으로 향한 그의 발걸음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세상과는 멀어지고,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 자신을 실망시켰던 세상과는 등지고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라는 것이 항상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본질은, 항상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 실제로 우리를 건지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가 되실 것입니다.
세상에 힘이 있고, 마을과 동네의 권력자들이 사실 우리를 건져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중심적입니다. 자신에게 힘이 되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손을 내밀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살려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인도하시는 아버지야말로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실족을 막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3)
이 시인은 세상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실족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실족한 자가 이제는 방향을 돌이켜서 성전을 향하면서,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하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건지시고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시 121:7)
인간은 항상 육체와 영혼, 이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하루 세 끼 먹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우리의 영혼도 반드시 돌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도 돌보시고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삭개오의 시선 변화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삭개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삭개오는 육신적으로는, 육체적으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큰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항상 갈급했습니다. 누구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누구도 그의 영혼을 생각하거나 돌봐 주지 않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영혼의 문제 때문에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결국 그의 시선이 주님과 마주쳤고, 예수님께서 "오늘 밤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고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한 삭개오에게 그날 밤 그의 집에 구원이 임했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시고, "오늘 구원이 네 집에 임하였다"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구원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높은 곳에 올라갔던 삭개오, 그는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질을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시선을 두었다가 여러 가지로 실족했던 삭개오가 드디어 그의 영혼의 구원을 얻은 순간이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면 인생의 문제도 해결될 뿐더러, 우리의 영혼까지 우리 주님이 돌보시고 책임져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부디 오늘 하루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첫 시작을 주의 전에서 시작하시고, 말씀 듣고 시작하시고, 기도하고 시작하시니 오늘 온종일이 은혜 가운데 복되고 행복할 것을 믿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선의 방향이 믿음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세상을 향하고 사람들을 향할 때 우리는 실족하고 상처받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시선을 돌릴 때 비로소 참된 도움과 구원을 얻게 됩니다. 38년 된 병자가 연못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병 나음을 얻지 못했으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을 때 치유를 경험한 것처럼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느냐가 우리 인생을 결정합니다.
둘째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참된 도움의 근원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힘 있는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야말로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돌보시는 분입니다. 삭개오처럼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영혼이 갈급했던 자가 주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영혼의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하시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우리의 영혼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산을 향하여 눈을 드는 시인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시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그들에게 힘을 얻고자 했지만, 실족하고 상처받아서 다시 성전에 올라가며 하나님을 향하여 시선을 돌렸습니다. 자기 눈앞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시는 주님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38년 된 병자처럼 살지 않고, 오직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향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지키시고 돌보신다 하셨으니, 모든 문제를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나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