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깊은 곳에서
시편 130편
캄캄하고 어둡고 좁은 산길을 걷다 보면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과연 이 길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캄캄한 길의 끝자락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런 불안감이 불현듯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을 엄습합니다. 그런데 산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저 산 아랫마을에 불빛이 보인다면, 그때는 '아, 이제 살았구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 빛을 따라 산길을 잘 내려가면 결국 그곳에 사람이 있을 것이고, 이 어두운 길이 끝날 것이라는 안도감이 우리 마음을 위로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캄캄하고 어둡고 좁은 산길을 헤매는 것 같은 불안감이 있지 않습니까? 어찌하다가 이런 산길로 내가 접어들었을까? 이 길에서 과연 벗어날 수는 있을까? 모든 것이 뒤엉켜 있고, 이 길에서 과연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불안감이 우리 인생을 휩씁니다. 그때 한 줄기 빛을 따라 그 방향을 따라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다양한 가짜 빛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빛을 따라 걸어가라 하고, 저 빛이 진짜라고 말하며, 다양한 형태의 가짜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 가짜를 따라가면 그 길이 곧 사망의 길입니다. 돈이 길이 될 수 없고, 사람이 길이 될 수 없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참된 길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캄캄한 인생의 어둠을 지나면서 방향을 올바로 잡았습니다. 그 빛을 따라 방향을 잡고 걸어가는 이 사람에게 새로운 서광이 비칩니다.
깊은 곳의 부르짖음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 130:1)
시인은 지금 자신의 삶의 처지를 '깊은 곳'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깊은 곳으로 들어갔는지, 얼마나 깊은 곳인지, 빛은 들어오기나 하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이 정말 잘한 것은 캄캄한 어둠의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머리로는 이해가 됩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저 깊은 곳에서 손을 내밀고 목청을 높여 주께 부르짖어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머리로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막상 그 어둠에 갇히게 되면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둠에는 어둠을 지배하는 또 다른 권력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자기 인생에 어둠이 있었습니다. 그의 대적 브닌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나의 남편은 한나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실제로도 사랑했고 그를 어여삐 여기고 불쌍히 여겨서 여호와께 드릴 제물을 두 배나 주는 아주 좋은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나에게는 대적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켰습니다. 한나의 인생의 어둠 속에는 대적 브닌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대적을 꺾어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이것을 짓눌러야만 나에게 인생의 새로운 빛이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브닌나와 뒤엉켜서 싸웠을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한나는 참으로 지혜로웠습니다. 인생의 깊은 곳에서 그 어둠을 지배하는 그의 대적자 브닌나와 싸우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렸습니다. 성전에 올라와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마치 술 취한 자가 지속적으로 입을 움직이는 것처럼, 엘리 제사장이 이 여인을 술 취한 여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한나는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어둠을 지배하는 권력과 어둠의 세상의 문법과 싸우지 않고 성전에 올라와서 기도하고 부르짖었던 한나, 결국 그가 이기지 않았습니까?
다니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포로로 끌려간 그 자리는 어둠의 문법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남유다를 유린하고 성전을 불태웠으며 성전의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간 악한 자들입니다.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그곳의 문법대로, 그들의 법칙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뜻을 정했습니다.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단하고 환관장에게 구하여 채식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런 다니엘의 믿음이 결국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세월이 흘러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 시대가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다니엘을 끌어내릴까 하는 것만 연구했습니다. 그를 모함하기 위해서 법을 새로 고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둠의 세력들과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맞서 싸워 이기려면 더 악해져야 하기 때문에 다니엘은 그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창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하루 세 번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는 어둠 속에 갇히지 않고, 어둠의 지배자들과 싸우지 않고, 주께 부르짖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다니엘이 이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봉하시고 그를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인이 정말 잘한 것은 깊은 곳, 어두운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시편의 표제어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이 깊고 어두운 곳에서 주께 부르짖기 위해서 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기도하는 삶
우리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너무 치열하고 힘겨워서 그곳에 빠져 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할 수 없다고. 지금 내가 내 정신이 아닌데, 이것저것 수습하고, 여기 맞고 저기 맞고 하느라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신앙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느냐고. 그런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편할 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편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상황이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깊고 어두운 곳에 있을 때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어둠 속에 갇혀버리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그곳에 가두려 하는 것입니다. 그때 다시 일어서서 주께 부르짖고, 다시 성전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삶은 그곳에 산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 악한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살아야 한다 할지라도, 시선은 하나님을 향하고 성전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편안해서, 시간이 많아서, 새벽잠이 없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주께 부르짖고, 살기 위해서 나온 우리 각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아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 130:2)
깊은 곳에서 시인이 부르짖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면서 너무 마음이 급한 시인은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기도 전에 올라가는 길에서 주께 부르짖습니다. 내 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요나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고,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우리가 들어가 보지는 않았으나, 그 속에 빛이 있겠습니까? 그 속에 방향이 보이겠습니까? 절망적인 곳입니다. 오죽했으면 요나가 그 속에서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간다'고 말했겠습니까?
그러나 요나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절망의 저 밑바닥에서, 바닷속에 던져졌는데, 거기서도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삶을 놓아버리지 않고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삶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한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새 희망을 주시고 그를 살게 해주셨습니다. 물고기를 명하사 니느웨 해변가에 그를 토하게 하시고, 그에게 다시 사명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서 기도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곳에서 기도하든, 어떤 상황에서 기도하든 분명히 반드시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파수꾼의 소망
그런데 기도하는 자가 늘 궁금하고 늘 불편하고 답답한 것은, 도대체 이 기도를 이루어 주시는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시인도 역시 그런 불안감과 불편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 130:6)
파수꾼은 높은 망루에 올라가서 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파수꾼은 성을 지킨다는 그 사명감과 함께 기다리는 것이 있으니 바로 아침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자는 항상 기대합니다. 아침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파수꾼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고, 일주일 전에도 그랬고, 아침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둠이 짙어지고 어둠이 깊을수록 아침이 밝아오는 그 시간은 점점 다가온다는 것을 파수꾼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것을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렇게 답답하고 깊은 어둠 속에서 기도하는데, 이 기도가 언제 이루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아침은 반드시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분명히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은 어둠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시 130:7)
딴 데 한눈 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오늘 기도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올라온 우리의 형편과 사정이 각자 다 다를지라도, 방향을 잘 정하고 이 자리에 올라오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구하면서, 아침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한 간구에 응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다른 데 한눈 팔지 말고 여호와를 바라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한나는 대적 브닌나와 싸우지 않고 성전에 올라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다니엘은 어둠의 세력들과 맞서 싸우지 않고 창을 열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인생의 깊은 어둠 속에서 어둠의 문법과 싸우지 말고,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둘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 캄캄한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바빠서, 힘들어서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오히려 깊고 어두운 곳에 있을 때 살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셋째는 파수꾼처럼 아침을 확신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파수꾼은 경험적으로 아침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아침은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기도의 응답이 언제인지 알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다른 데 한눈 팔지 말고,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는 여호와만을 바라며 소망하는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