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여호와의 성전에서
시편 134편
밤이라는 시간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지만, 밤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와 마음가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밤은 안식의 시간입니다. 저녁이 되면 가정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하루의 피로를 풀며, 다음 날을 준비하는 평온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세상의 쾌락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밤은 오히려 활동의 시간이 됩니다. 그들에게 밤은 내면의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시간이며, 어둠 속에서 죄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깊은 고민과 낙심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밤은 길고 긴 불면의 시간입니다. 잠을 청해도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누워 있어도 머릿속과 마음속이 온통 염려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뒤척이다가 어느새 새벽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처럼 밤은 각 사람의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인생의 깊은 밤
오늘 본문의 시편 저자에게 밤은 바로 불면의 밤이었습니다.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하고, 인생에서 도무지 풀리지 않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가득한 밤이었습니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1)
'밤'이라는 단어와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표현이 별로 조화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밝고 빛나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캄캄한 밤에 하나님의 성전을 찾지 않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깊은 밤에 가정에서 쉼을 취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시인은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왔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으로서의 밤이라기보다 자기 인생에 깊은 밤을 보내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진정으로 잘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생의 깊은 밤, 피할 수 없는 문제로 고민하고 염려하는 그 깊은 밤에 그가 방향을 잡아 성전으로 올라왔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분명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세상에서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이 일도 저 일도 시도해 보고,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만나보았을 것입니다. 갈 수 있는 곳, 원하는 것 다 해보았으나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인생의 깊고 깊은 밤에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온 것입니다.
이 선택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친히 인도해 주시고, 그 인생의 깊은 밤을 새로운 회복과 기쁨과 환한 빛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겨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모두 잃고, 건강마저 잃었습니다. 먹고 살 것이 없어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허기를 채워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배부른 일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일만 열심히 하면 배를 굶지 않는 일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떠올리며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탕자가 진정으로 잘한 것은 딱 한 가지,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인생의 깊고 깊은 밤을 보내던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가니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맞아 신발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새 옷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기쁘고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깊고 깊은 밤에 해답은 바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와야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그 깊은 밤, 절망의 밤이 회복과 은혜와 찬양의 시간으로 바뀔 것입니다. 고민에 사로잡혀 있던 니고데모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란 산헤드린 공의회의 관원이었다는 뜻입니다. 입법과 사법과 행정을 모두 관장하던 유대인 최고 권력기관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권력도 있었고, 물질도 있었고, 부귀영화를 모두 누리고 있었으나 나름대로 양심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우리가 과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 하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예수라는 젊은이가 나타나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2장의 성전 정화 사건을 경험한 후 그는 결심했습니다. 깊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 두려워 그는 깊고 깊은 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과 거듭남의 비밀에 대해 대화하고,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훗날 시간이 흘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그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정리하고 예수님의 마지막을 함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깊고 깊은 밤, 낙망하고 절망하는 밤에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새로운 회복과 은혜가 임합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 새벽 이 자리에 나왔는지 하나님께서 다 아실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고민을 가지고, 혹 지난밤에 불면의 밤을 보내다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이 자리에 나온 분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나온 것 자체가 큰 복이 될 것입니다. 낙심하고 절망하는 인생이 주님 앞에 나오면 새로운 회복과 기쁨으로 새롭게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복의 손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2)
이 시인이 인생의 깊고 깊은 밤을 보내다가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서 한 가지 행동을 합니다. 성소를 향하여 자기 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든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찬양할 때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 자아를 모두 내려놓고 항복할 때입니다. 이 시인은 찬양할 상태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살았던 인생의 방식을 온전히 내려놓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복의 의사를 전하며 두 손을 들고 항복하겠다고 결단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전에 올라와서는 자신이 지난날 살았던 모든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몸에 문제가 생겨서 의사에게 가면 의사는 약을 처방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생활습관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생활습관을 바꾸라고 권합니다. 식단도 바꾸고 운동하라고 권하며 다양한 형태의 생활습관 처방을 합니다. 약을 아무리 먹어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병을 고치기 어렵습니다. 삶의 패턴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삶이 새로워지기 어렵습니다.
인생의 깊은 밤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잠시 잠깐 위로를 받고 내려간다 할지라도 그의 삶이 똑같다면 다시 인생의 깊은 밤을 헤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나와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인생의 방식을 바꾸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물질이 우상이었다면 이제는 그 물질 우상을 정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아가 우선이었고 자기 경험을 앞세웠다면 이제는 자아와 경험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 의미로 두 손을 드는 것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을 이 시인이 왜 보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죄와 욕망 때문이라면 이제는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를 새롭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소돔 땅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잘 살려고 떠났으나 결국 잘 살지 못했습니다. 왕들의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사인을 주셨습니다. 다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를 찾아가서 구해내어 데려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마땅히 따라와서 하나님 앞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롯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남았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항복하지 않고 똑같은 자기 패턴대로 소돔 땅에서 물질을 쫓아 살았던 롯과 그의 가정은 모두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서 잠깐 은혜 받고 잠깐 두 손 들고 항복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인생이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통회하며 온전히 바뀌고 완전히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의 근원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시 134:3)
시인은 시온과 복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복을 세상에서 찾습니다. 물질이 세상에 있고, 사람이 세상에 있고, 권력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복을 찾습니다. 그러니 공허하고 지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참된 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평생 동안 세상에서 복을 찾으려고 쫓아다녀도 그것은 헛되고 헛된 신기루일 뿐입니다. 잡을 것 같은데 잡히지 않습니다. 내 것이 될 것 같은데 결단코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참된 복이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 천지만물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이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의 처절한 삶이 우리 인생에 깊은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의 근원이시고 만복의 근원이신 아버지 앞에서 오늘 하루를 시작하니 이 하루가 진실로 복된 날이 될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깊은 밤에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 모든 것이 회복되었듯이, 니고데모가 깊은 밤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거듭남의 비밀을 알게 되었듯이, 우리도 인생의 깊은 밤에 하나님의 성전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합니다. 그곳에서 절망의 밤이 회복과 은혜의 시간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참된 항복이 필요합니다. 성소를 향해 손을 드는 것은 찬양과 항복의 표현입니다. 잠시 은혜를 받고 돌아가면서 삶의 패턴을 바꾸지 않는다면 다시 깊은 밤을 헤매게 됩니다. 자아를 내려놓고, 물질의 우상을 정리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새로워지겠다는 진정한 항복이 있을 때 비로소 인생이 바뀝니다.
셋째는 참된 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복을 찾으려 하면 공허하고 지칠 뿐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시기에 시온에서, 곧 하나님 앞에서 복을 구해야 합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아버지 앞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모두에게 참된 복이 넘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