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절개
시편 137편
논개라는 여인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의 관기였던 그녀는 왜장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 여인이요 기생이었기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연약한 한 여인이 왜장과 함께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진 것입니다. 이날 이후로 일본이 조선을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연약해 보이는 한 여인, 짓밟아도 될 것 같은 한 여인조차 저토록 굳은 절개를 보이고 강력하게 저항하는데, 이 나라를 어떻게 우습게 보고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임진왜란 당시에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신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름 모를 수많은 백성들은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서 의병이 되어 목숨을 바쳤으며, 이 땅에서 죽을 때까지 싸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시인의 충성과 절개, 그 깊은 충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충절은 나라를 잃은 자의 충절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 이전에 나라를 지키고 있을 때 믿음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그의 깊은 아쉬움과 회한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시온의 눈물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1)
여기서 '우리'라고 지칭된 이들은 기원전 586년 남유다가 망한 이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포로들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기원전 586년 유다를 침공했고, 유다를 철저하게 황폐화시켰습니다. 성전을 불태우고 무너뜨렸으며,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기명과 보물들을 다 가져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짓밟았고, 대부분의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끌려간 백성들이 살았던 곳은 바벨론의 여러 지역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여러 강변'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들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그리고 그 강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지류 주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시온을 생각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온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렸던 예배, 그 예배가 항상 드려졌던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인은 잔뼈가 굵었고, 그곳에서 항상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노래했던 옛 기억들을 떠올리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울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서러워서 울고 있는지, 복받쳐서 울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울고 있는지는 1절만으로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깊은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시 137:2)
그 강변에 버드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수금을 걸어둡니다. 수금이라는 것은 악기인데, 악기는 나무에 걸어두면 악기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악기는 연주하고 소리가 날 때 비로소 악기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두어 버렸습니다.
강요받은 찬양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시 137:3)
그들은 노래를 강요받았습니다. 수금 연주를 강요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자들, 바벨론의 권력자들이 그곳에 앉아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합니다. 시온의 노래란 과거 예루살렘 성전에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던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드렸던 찬양을 지금 이 강변에서 그 권력자들을 위해서 부르라고 강요받은 것입니다.
술자리가 벌어졌는지, 아니면 이방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가 드려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그 자리가 술자리라면 그것도 모욕스러운 일이요, 이방 신에게 올려드리는 제사의 자리라면 그 또한 더욱 모욕적인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수금으로 과거 이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양을 부르던 성가대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아름다운 찬양을 직접 지어서 올려드렸던, 찬양을 업으로 살았던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포로로 끌려와서 그곳에서 이방 신을 위한 노래를 부르라고 하니,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는 노래를 부르라고 하니, 어떻게 그가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그냥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둔 것입니다. 못하겠다고 거부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이 시인이 어떤 불이익을 당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죽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죽지 않았으니까 이 시를 기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죽지 않고 그가 당했을 고통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고통과 힘든 일을 겪어야만 했겠습니까? 매 맞았을 것이고, 천대받았을 것이고, 무시당했을 것이고, 이런저런 어려운 일들을 그는 수없이 많이 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시온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그때 아름다운 찬양을 올려드리며, 함께 같은 성가대원들과 올려드렸던 그 찬양의 노래를 기억하며 그가 여전히 탄식하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시 137:4)
이 한 절만 떼어놓고 보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이방 땅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노래는 얼마든지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 땅에서 강요받은, 삶의 자리에서, 이방 신전 제사를 드리는 자리에서, 또는 술판이 벌어지는 자리에서 강요받은 찬양은 찬양대원의 양심으로 부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절개를 지켰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의 감사
우리는 이 상황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이방 땅에서 이 노래를 강요받기 전에 이들에게는 회복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에게 목에 피가 나도록 외쳤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라고,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애굽은 마른 지팡이 같은 자들이니 그를 의지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남유다 왕실에서는 친바벨론파와 친애굽파가 맞서서 싸웠습니다. 어느 나라에 붙어야 우리가 더 안전할 수 있을지 그것만 점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완벽하게 타락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제사장부터 성전에서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 찬양을 부르는 사람들, 예배드리는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진정한 예배자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서 예언하고 선포했습니다. 안전하다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불타버렸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시간의 은혜를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찬양할 수 있는 기회와 은혜를 주셨을 때, 그때 마음껏 찬양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어야 합니다. 이제 와서 나라를 다 잃고 난 이후에, 그 땅에 와서 강요받고 있을 때, 그제서야 생각납니다. 그들이 함께 저질렀던 죄악들이 그제서야 생각납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많이 미련하고 어리석습니다. 다 잃어버리고 난 이후에야 그날의 소중함을 기억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상의 가치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상의 선물들을 우리는 하나님의 정말 귀한 선물로 알고 지키고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 우리 백성들에게 자유라는 위대한 선물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기틀 위에 대한민국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 자유를 지켜가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믿음 생활을 성실하게 잘 감당해야 합니다.
남유다가 망한 것은 국력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권력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병력이 적어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남유다가 언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주변을 통제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그 아래에는 항상 강한 국가 이집트가 있었고, 동쪽에는 제국들, 앗시리아부터 시작해서 모든 제국들이 동쪽에서 흥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지켜주었던 힘은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잃어버리니, 성전 신앙이 타락하니,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 우리의 가정, 내 건강,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일터, 많지는 않으나 하나님이 먹고살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물질들, 이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기억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하고 깨달으며, 잃기 전에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감사를 받으시고 언제나 우리를 지키시며 하나님의 손으로 이끌어 주시고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절개를 지켜야 합니다. 바벨론 강변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받았던 시인은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두었습니다. 이방 신을 위한 자리에서, 술판이 벌어지는 자리에서 강요받은 찬양은 찬양대원의 양심으로 부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절개를 굳건히 지켜가야 합니다.
둘째는 기회가 있을 때 신앙생활을 성실히 해야 합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나라가 망하기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의 은혜를 주셨을 때, 찬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을 때 제대로 신앙생활을 했어야 합니다. 다 잃어버리고 난 이후에야 그날의 소중함을 기억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주신 일상의 선물들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 가정, 건강, 일터, 물질,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잃기 전에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그 감사를 받으시고 우리를 지키시며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선물을 소중히 여기고, 이 자유를 지켜가기 위해 믿음 생활을 성실히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