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42편

성경
시편5권

소리내어 간구하는도다

시편 142편

요즘은 건축 기술이 많이 좋아져서 고층 빌딩 짓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도시마다 초고층 빌딩이 높이 높이 올라갑니다. 사람들이 초고층 빌딩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곳 가장 높은 곳에 전망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망대에 올라서서 발 아래 펼쳐진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면 묘한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정복의 욕구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발현되는 것입니다. 고층 아파트에도 가장 높은 곳에 넓은 평수의 펜트하우스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높고 높은 곳을 좋아하는 경향성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낮은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낮고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더구나 음습하고 바람이 통하지 않으며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 공간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고 기피하고 싶은 공간입니다. 공간적으로도 그러하고,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은 좋아하지만, 낮은 곳, 사람들이 별로 기뻐하지 않는 곳에 거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표제를 보면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깊은 곳, 인생의 가장 연약한 자리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지어 올린 시입니다.

굴 속에서의 부르짖음

다윗이 굴에 있었다 하면 우리는 금방 두 가지 사건을 떠올립니다. 우선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그의 방랑 초창기에 아둘람 굴에서 400명의 용사들과 함께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또 다윗이 사울에게 지속적으로 쫓겨 다니다가 정신없이 굴 속으로 피해 들어갔는데, 사울은 다윗이 그 굴에 있는 줄 모르고 그곳에 뒷일을 보러 들어왔습니다. 다윗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살려 보냅니다. 옷자락만 베어내고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우리가 기억하는 다윗이 굴에 있을 때의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그가 십수 년을 사울을 피해 쫓겨 다녔고, 그의 방랑의 시간이 굉장히 깊고 길었는데 어찌 이 두 가지 사건만 굴 속에 있었겠습니까. 이와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기록되지 않은 여러 가지 다양한 저 깊고 깊은 심연의 경험들을 그는 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는 하나님께 간구했고 부르짖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곳, 가장 밑바닥에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시를 지어 올렸습니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시 142:1)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우선 "소리 내어"라는 말입니다.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소리 내어, 소리 내어. 사실 깊은 굴 속에 있으면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아도 그 굴의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버립니다. 굴 속에 들어가면 침묵이 나를 주도하고, 나를 압도하며, 짓눌러 버립니다. 그만큼 무겁고 어두운 공간입니다. 어둡고 깊은 침묵 속에 갈수록 내가 침잠해져 들어갑니다. 굴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나의 처지도 무거운데, 그 굴 속의 분위기가 나를 압도하면 거기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깊은 굴 속에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간구했다는 말, 소리 높여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소리 높여 기도했다는 것은 이 굴 속의 분위기에 내가 압도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곳이 주는 어두운 분위기에 지속적으로 침잠되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오히려 내가 소리 질러서 이 분위기를 극복하고 이 무거운 분위기를 반전시켜 나가겠다는 소망입니다. 이런 소망이 입으로 터져 나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힌 일이 있습니다. 지하 감옥입니다. 이곳도 역시 어두운 동굴보다 더 깊은 곳입니다. 언제 끌려나가서 죽을지 모릅니다. 언제 끌려나가 사자들, 짐승들의 밥이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분위기에 압도되지 않았습니다. 그 공간이 주는 무게감에 지속적으로 짓눌려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성령께서 그 찬송과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 살아가다 보면 이런 일이 왜 없겠습니까. 한마디 소리 내지 않아도 깊은 침묵 가운데 계속 내가 끌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 지속적으로 이런 분위기가 나를 짓눌러서 도무지 숨조차 쉴 수 없는 그런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 상황에 계속 짓눌리면 우리는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고 찬송해야 합니다. 오히려 내가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때 찬양이 필요합니다. 찬양은 기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즐거울 때 내 입에서 나오는 콧노래 같은 것이 아닙니다. 가장 깊은 곳, 절박한 시간에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내 인생의 몸부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찬양하고 열심히 기도해서 동굴의 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뜨려 나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올바른 방향을 향한 간구

또한 1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볼 것은 그가 "여호와께" 간구했다는 점입니다. 굴 속은 보이지 않는 공간입니다. 어둠 속의 공간입니다. 깊고 깊은 심연 속에 어두워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올바른 방향을 찾았습니다. "여호와께"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이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들어와 있으면 내 인생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왜 여기까지 왔을까, 나를 이곳으로 내몬 자들은 누구일까, 내가 나가서 원수를 갚아야 되겠다 하며 한탄과 원망과 저주가 먼저 나옵니다. 다윗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를 이 굴 속으로 몰아넣은 인간이 사울입니다. 사울에 대한 원망과 저주, 불신 이런 것들이 자기 인생을 휘감기 시작하면 그곳에서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방향을 올바로 잡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방향이 올바로 설정될 때 그곳을 빨리 탈출할 수 있습니다.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될지가 우리 인생의 깊은 굴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됩니다.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환경을 탓하고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탓하며 원망하기 시작하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기억하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간구하는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시는 주의 백성들 되시기 바랍니다.

토로와 진술의 기도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 142:2)

"토로"와 "진술"은 상반된 개념입니다. 토로한다는 것은 격정적으로 쏟아낸다는 뜻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소리 내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소리 내어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기도하면서 감정이 격해집니다. 자신의 감정을 전심으로 쏟아냅니다. 울부짖고 기도하고, 눈물 흘리면서, 때로는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때로는 뒹굴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진술했다"고 했습니다. 진술했다는 것은 법정의 용어입니다. 판사 앞에서, 법정에서, 증인들 앞에서 자신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경험한 것들을 또박또박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토로도 하고 진술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토로만 하는 인생은 자신의 감정선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인생입니다. 아무리 내 인생이 어려운 깊은 심연의 절망, 굴 속에 있다 할지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또박또박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 겪고 있는 이 상황 때문에 나의 정신 세계와 내 마음의 모든 둑들이 다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깊은 굴 속에서 그는 또박또박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굴 속을 하나님께서 나가게 해 주신다면 제가 이렇게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인생 계획을 하나님께 아뢰고 진술하며, 하나님 앞에서 또박또박 자신의 계획을 말할 수 있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정신 바짝 차린 사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상황을 하나도 남김없이 진술할 수 있는 차갑고 이성적이며 냉철한 태도를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거룩한 상상력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 142:5)

다윗은 지금 굴 속에 있는데, 이곳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허락하신 피난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금 이 깊은 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을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들어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피난처인 것처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절망에 처하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아름다운 상상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아름답게 보일 리가 없고, 들에 핀 꽃이 아름답게 보일 리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낙심천만하고 절망적인 내 상황만 보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고 내가 제일 가련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거룩한 상상력을 지녀야 합니다. 다윗은 굴 속에 있으면서 이 동굴 속이 하나님의 위대한 날개 그늘이라고 상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시선의 전환이요, 생각의 전환이며, 거룩한 상상력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백성들이 꿈을 꾸는 방식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시절을 생각해 봅시다. 로마의 식민지,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 가정의 한 가난한 가정에 예수님은 태어나셨습니다. 너무나 가난하게 식민지 치하에서 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을 보고도 꿈을 가졌고, 들의 꽃을 보고도 꿈을 가지셨습니다.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인 겨자씨를 보시고 우리 주님께서는 이 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될 꿈을 꾸셨습니다. 이것이 상상력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베드로를 보시고 "너는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만난 시몬을 보고 "너는 장차 반석 위에 세워진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람을 보시는 상상력입니다. 거룩한 상상력은 혼자 헛꿈을 꾸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할 때 꿈꿀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비록 깊고 깊은 굴 속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날개 그늘이라고 생각하고 이곳이 피난처라고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됩니다. 다윗은 이곳을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그를 가장 높은 곳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 거룩한 상상력의 꿈이 오늘 우리를 지배하는 능력이 되고, 그 꿈이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소리 내어 기도하며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합니다. 깊은 굴 속의 침묵과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처럼 찬송하고 기도하여 그 분위기를 깨뜨려야 합니다. 찬양은 기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인생의 몸부림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환경을 탓하고 사람을 원망하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듭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간구할 때 그 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방향을 올바로 잡는 것이 탈출의 열쇠입니다.

셋째는 거룩한 상상력을 품어야 합니다. 다윗은 깊은 굴 속에서도 그곳을 하나님의 피난처로 보았습니다. 주님과 함께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상상력이 우리 인생을 바꾸어 놓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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