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마음
사무엘상 10장
갓 결혼한 새색시가 시댁에서 맞이하는 첫 명절은 한없이 조심스럽고 불편한 시간입니다. 대가족이 모이는 집안일수록 그 조심스러움은 더욱 깊어집니다. 어른들이 연이어 찾아오시면 음식을 정성껏 내어 드려야 하고, 낯선 얼굴과 복잡한 촌수를 하나하나 익혀야 하며, 어른들과 함께 오는 가족들과 아이들의 이름까지 일일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처럼 조심스럽고 어색한 모습을 지켜보는 어른들은 오히려 그런 모습에서 더욱 깊은 아름다움과 귀함을 발견합니다. 어른들은 그 순수한 모습에서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습니다. 만약 새색시가 조심스러움 없이 지나치게 자연스럽고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다면, 그 모습이 어른들에게는 오히려 더 큰 불편함을 안겨줄 것입니다. 조심스러움과 처음 마음이 지닌 순수함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행복으로 채워주는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었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조심스럽고 어색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겸손하고 순수한 모습이 하나님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귀하고 아름답게 여겨졌습니다.
순종의 열매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어버렸을 때, 아들 사울에게 사환 한 사람을 데리고 가서 나귀를 찾아오라고 명했습니다. 사울은 아버지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단순히 형식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암나귀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할 때, 사환이 주인에게 제안했습니다. "이곳에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이 있으니 가서 한번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때 사울의 반응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사환의 말을 겸손히 받아들이며 그 제안이 옳다고 인정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귀를 기울였으며,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환을 존중하고 배려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겸손한 태도가 그로 하여금 사무엘을 만나게 했습니다. 그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귀한 만남이었고, 결국 그 만남이 사울을 왕의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삼상 10:1)
암나귀를 찾으러 나섰던 평범한 하루가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 역사적인 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울은 이 신비롭고도 놀라운 경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자신에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어 역사하십니다.
기다림의 은혜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후 앞으로 일어날 몇 가지 징조를 예언했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며,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당부가 있었습니다.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삼상 10:8)
사무엘은 사울에게 먼저 길갈로 내려가되, 자신이 와서 행할 일을 가르칠 때까지 7일 동안 기다리라고 명했습니다. 이 기다림에는 단순히 사무엘의 도착을 기다리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일어난 일들을 함부로 발설하지 말고 침묵하며 때를 기다리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기다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이처럼 특별하고 놀라운 경험을 한 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가까운 친족들에게,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내가 그 유명한 사무엘을 만났다", "사무엘이 나에게 기름을 부었다"고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사무엘의 말씀을 철저히 지켜냈습니다. 심지어 위기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사울의 숙부가 찾아와 캐묻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사울의 숙부가 사울과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디로 갔더냐 사울이 이르되 암나귀들을 찾다가 찾지 못하므로 사무엘에게 갔었나이다 하니 사울의 숙부가 이르되 청하노니 사무엘이 너희에게 이른 말을 내게 말하라 하니라" (삼상 10:14-15)
숙부는 암나귀들은 이미 찾았는데 어디를 갔다가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추궁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만났다고 말하자, 숙부는 사무엘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모두 말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시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이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인물이었기에, 조카가 그런 분을 만났다는 소식에 자연스럽게 호기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울은 하나님의 일,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일을 절대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그의 숙부에게 말하되 그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이 말하던 나라의 일은 말하지 아니하니라" (삼상 10:16)
사울은 7일 동안 기다리라는 사무엘의 말씀을 완벽하게 지켜냈습니다. 내가 왕이 되다니, 내가 기름부음을 받다니 하며 떨리고 두려운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무엘이 정한 그 일주일 동안 철저히 입을 다물고 마음을 지켜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순종이었습니다.
겸손한 왕
드디어 사무엘이 약속한 7일이 지났습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을 모두 소집하여 공개적으로 제비뽑기를 통해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베냐민 지파를 그들의 가족별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삼상 10:20-22)
이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온 이스라엘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으로 선택받은 사람이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은신처를 알려주시자 사람들이 달려가서 그를 찾아 민망해하는 그를 백성들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이는 분명 당당한 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겸손하고 순수한 모습이 하나님과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더욱 아름답게 비춰졌습니다. 사울 자신도 자기가 왜 왕이 되어야 하는지, 갑자기 하루아침에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민망해하고 부끄러워하며 겸손한 모습으로 이 모든 상황을 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풋풋하고 순수한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왕의 자격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진 후에도 모든 백성이 그를 환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 만세!"를 외치며 예물을 가져왔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런 왕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삼상 10:27)
이처럼 자신을 향한 비판과 멸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한마디 항변도 하지 않았습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백성들에게 추대받은 후에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어떤 보복이나 항의도 하지 않고 그저 잠잠히 견디어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첫 번째 왕 사울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초심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이 겸손하고 순수한 모습을 평생 유지했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왕이 되기 전 7일 동안의 기다림을 철저히 지켰던 사울이 왕이 된 후에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약속 시간에 오지 않자 스스로 번제를 드리고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가버렸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인내하며 기다렸던 사울이 왕이 된 후에는 기다림을 포기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자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왕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그 사람이, 나중에는 백성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라고 노래하는 것에 분노하여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지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초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불행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울의 순수한 초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모두가 기뻐하는 이러한 겸손한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그 두려움과 떨림, 하나님 앞에서 느꼈던 놀라운 경외감을 잃지 말고 항상 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는 첫마음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직분을 받을 때의 그 떨리고 조심스러운 마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작은 직분을 어떻게 하면 잘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도 주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는 변질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울처럼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진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경외하는 마음을 간직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인정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그날까지 항상 순수한 초심을 지켜나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