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1장

성경
사무엘상

사랑의 율법

사무엘상 21장

국가적 대형 사건이나 재난이 발생하면 반드시 책임 소재를 가리는 과정이 따릅니다. 관할 구청, 소방서, 경찰 등 각 부서가 소환되어 어느 부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지, 어느 부서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희생양 찾기에 골몰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공무원들은 평소 매뉴얼을 아주 세부적이고 정확하게 만들어둡니다. A 상황이 발생하면 어느 부서가 주무부서가 되고, B 상황이 발생하면 또 다른 부서가 주무부서가 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실제 상황이 발생하면 복합적 양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어느 부서가 담당해야 할지 정확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급박한 상황이라면 부서를 따지기 전에, 주무부서나 책임 소재를 가리기 전에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달려들어야 한 생명이라도 더 건질 수 있습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매뉴얼을 펼쳐두고 어느 부서에 책임 소재가 있는가를 따지는 동안 생명은 금세 불씨가 꺼져버립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모두의 일이 결국 누구의 일도 아닌 상황이 되어 그 모든 불행은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됩니다.

율법도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원래 율법은 사랑이 그 근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율법의 핵심이며 근간이 되어야 하는데, 사랑을 배제한 율법은 그저 규정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이 단순한 규정이 되면 사람들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어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율법을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적용한 한 제사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방랑의 시작

다윗은 이제 사울의 진심을 확인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의 진심을 확인한 다윗은 이제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요나단도 아버지의 마음을 다윗에게 알려주는 역할까지 했지만, 요나단조차 아버지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다윗을 더 이상 보호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눈물의 이별을 하고 요나단은 궁으로 돌아가고 다윗은 방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막상 궁을 나온 다윗이 갈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사울의 손바닥 안에 있는데, 어디를 간들 안전하겠습니까? 다윗은 그와 함께하는 최소한의 부하들을 데리고 방랑길에 오르면서 평소에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놉의 제사장이 떠올랐습니다. 그에게로 향했습니다.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삼상 21:1)

다윗이 최소한의 부하들만 데리고 온 것을 본 아히멜렉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명색이 사울의 군대 장관인데 왜 이렇게 초라한 행색으로 다니고 있는지 제사장 아히멜렉도 의아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둘러댔습니다.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삼상 21:2)

한마디로 왕의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왕이 자신에게 아주 특별한 명령을 내려서 이렇게 최소 인원만 데리고 있는 중이라고 둘러댄 것입니다.

거룩한 떡의 나눔

그런데 배고픔은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삼상 21:3)

사실 여기까지 오면 제사장 아히멜렉도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명색이 왕의 군대 장관인데 먹을 것도 없이, 무기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다윗에게 자신의 수중에는 먹을 것이 진설병밖에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삼상 21:4)

진설병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막 안 성소 떡상에 올리는 진설병은 새로운 떡을 올리는 날에 물려내고, 물려낸 떡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 배고파서 죽을 지경이 되자 아히멜렉은 "너희들이 여자를 가까이하지만 않았다면 주겠다"고 말하고, 실제로 다윗과 함께한 자들에게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삼상 21:6)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율법을 어긴 행위였습니다. 원래 그 거룩한 떡은 제사장들만 먹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참정신

그런데 훗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사건을 재해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 밀알을 입에 털어 넣어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어떻게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느냐? 너희 제자들은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비난한 이유는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되는데 밀을 자른 것도 타작이고 손으로 비빈 것도 타작이며, 게다가 남의 밀밭에서 먹은 것도 잘못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윗의 이 이야기를 인용하셨습니다.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다윗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에게도 준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표현하면 사람이 율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율법의 정신을 아주 명확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을 정리하실 때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정리하셨습니다. 즉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을 배제한 율법은 규정에 불과합니다. 그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살피지 않는 율법은 그야말로 사람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율법으로 학대하고 핍박하며 괴롭혔습니까?

그런데 제사장 아히멜렉은 제사장이면서도 배고픔에 떨고 있는 다윗과 그의 동행자들에게 율법상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과 교회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규정들을 사람들에게 올가미로 씌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우리가 매진하고 함께 동역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윗과 아히멜렉의 이 일을 아름답게 평가하셨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린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이며, 사랑이 그 핵심이고 근간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형편과 처지를 살피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이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제공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율법을 어긴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율법의 정신인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을 충실하게 수행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의 형편과 처지를 살피는 지혜로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셋째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는지,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람을 마음에 품는 그 사랑의 정신을 잘 실천하고, 그 사랑의 정신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제사장 아히멜렉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인 사랑의 정신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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