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4장

성경
사무엘하

과정의 중요성

사무엘하 14장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보여준 경기력은 이전의 그 어느 대회보다 훨씬 더 탁월하고 특별했다고 평가받습니다. 12년 만에 16강에 진출한 성과만 가지고 하는 평가가 아닙니다. 과거의 한국 축구를 지칭하던 표현은 소위 '뻥 축구'였습니다. 수비진에서 공을 높이 띄워 올리면 전방의 장신 선수가 머리로 받아 마무리하는, 운에 의존하는 단조로운 축구 전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는 과정이 살아 숨 쉬는 축구를 선보였습니다. 공격수들 간의 호흡, 수비수들 간의 연계, 그리고 공격과 수비를 아우르는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선수들이 패스를 주고받으며 템포를 조절하고, 그 과정에서 공간을 창출하여 득점 기회를 만들어내는 정교한 빌드업(buildup) 축구로 발전한 것이 한국 축구의 눈부신 성장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축구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서 의사결정에 이르는 과정은 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공동체나 조직이든 적절한 과정 없이 결과만 성급하게 도출한다면 그 공동체는 반드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민주적 과정 없이 최고 권력자 한 사람의 독단적 결정만이 발표된다면, 과연 그 나라를 민주국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정의를 수반하는 사랑

과정에서는 예상치 못한 진통이 수반될 수도 있습니다. 여론 수렴 과정에서는 처음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과정을 성실히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인간사의 모든 일이 그러한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 또한 이와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하나님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무분별하게 하나님을 사랑이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나아가시는 과정에는 반드시 정의라는 요소가 개입됩니다. 정의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진정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무조건적인 사랑 그 자체로 여기기 쉽지만, 그 사랑 안에는 정의라는 이름의 공의로운 심판도 있고, 필요한 채찍도 있고, 교정하는 징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절정에 달한 장소가 바로 십자가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십자가는 본래 죄를 범한 인간, 우리 각자가 죄의 대가로 죽어야 할 처형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쏟아부어야 할 의로운 진노를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아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실현된 그 십자가에 이르는 과정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와 징계, 죄에 대한 심판이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에게 임하는 정의가 분명한 과정으로 존재했습니다.

과정을 생략한 다윗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에는 중요한 과정을 생략해버린 다윗이 등장합니다.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훗날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사건은 명백한 잘못이었습니다. 어떤 동기나 이유를 막론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것, 더욱이 그토록 잔혹하게 형제를 살해한 것은 용납될 수 없는 범죄였습니다. 압살롬 자신도 자기 행위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술땅으로 도피한 것입니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다윗의 애절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그리워졌습니다. 암논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살아있는 아들이 머나먼 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괴로웠습니다. 이는 아버지로서 당연한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의 복잡한 심경을 요압 장군이 예리하게 간파했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거기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 왕께 들어가서 그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라고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 (삼하 14:1-3)

요압은 본래 절차적 정의나 원칙을 중시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실용주의자였습니다. 그가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해 기울어져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연기에 능숙한 한 여인을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입에 교묘하게 짜맞춘 거짓 이야기를 넣어주었습니다.

그는 그 여인을 과부로 꾸며 상복을 입히고 왕 앞에 나아가게 했습니다. 여인은 요압이 지시한 대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형이 동생을 들판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동네 사람들이 형까지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그를 처벌하겠다고 합니다. 이 아들마저 사람들의 손에 죽게 될까 봐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제발 우리 아들을 보호해 주십시오." 물론 이 모든 것은 꾸며낸 이야기였습니다.

다윗이 이 여인과 대화를 나누어보니 요압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여인에게 직접 물어봅니다.

"왕이 이르되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령하였고 그가 이 모든 말을 왕의 여종의 입에 넣어 주었사오니" (삼하 14:19)

요압은 부왕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해 기울어져 있음을 간파하고 그럴듯한 명분을 제공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여인으로 하여금 가상의 사연을 토로하게 함으로써, 여인을 보호하려는 다윗의 측은지심을 자극하여 멀리 떠나있는 압살롬을 불러들일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압의 치밀한 계략을 환히 알면서도 결국 압살롭을 데려오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삼하 14:21)

왕의 이중 실패

바로 여기서 다윗은 치명적인 오판을 범하고 맙니다. 아버지의 애정으로서는 당연히 멀리 떠나있는 압살롬을 곁으로 불러들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한 가정의 아버지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온 나라를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야 할 최고 통치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들에게 합당한 국법에 따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정당한 법적 절차를 통해 그의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살인죄, 그것도 형제 살해라는 중대한 범죄에 대해 아무런 사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징계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사면해버린 것입니다.

설령 사면을 결정하더라도 모든 백성이 충분히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는 투명한 절차적 정의가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정당한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감정적으로 아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이것이 백성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겠습니까?

왕이 이처럼 자의적으로 아들을 용서하고 복귀시켜버린 행위... 압살롬이 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어떤 공식적인 징계나 처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다윗이 당시 보유하고 있던 왕권과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그술 땅에 있는 압살롬을 언제든 소환하여 합당한 처벌을 내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백성들이 감히 입을 열어 항의하지 못해서 그렇고, 신하들이 왕 앞에서 직언을 할 수 없어서 그렇지, 과연 그들이 이 나라의 정의와 법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겠습니까? 아버지로서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왕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삼하 14:24)

왕으로서도 잘못한 다윗, 이제 아버지로서도 해서는 안 될 일을 합니다. 왕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했다면, 적어도 아버지로서는 역할을 해야 했는데, 불러놓고서는 얼굴도 보지 못하게 하고 물러가게 합니다.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삼하 14:28)

마치 이 세월이 2년입니다. 2년 동안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불러놓고서 다윗은 양손에 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왕으로서도 백성들에게 정의로운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아버지로서도 아들을 화끈하게 끌어안고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쳐버렸습니다.

이런 애매한 상황이 지속되는 동안 압살롬은 점차 위험한 인물로 변해갔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불러들이고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는 진정한 회개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키워나갔습니다. 결국 이 억눌린 분노가 왕권에 대한 반란으로 폭발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이 과정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압살롬을 처음부터 엄정하게 징계했더라면, 그를 법에 따라 처벌한 후 아버지의 큰 사랑과 왕의 관대한 결단으로 사면하고 용서해 주었더라면, 나라는 안정을 되찾고 왕은 권위를 유지하며 동시에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까지 보여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과정을 무시한 대가로 결국 처참한 반란이라는 비극적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론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과정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 살아가는데 어떤 과정에 있든지 과정을 성실하게 이행해야 합니다. 그 과정의 끝에 결과가 있습니다.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99%고, 그 과정이 잘 이루어지면 좋은 결과를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이 정의를 수반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은 정의를 수반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떤 결과로 가든 과정은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윗이 아들을 용서하고 싶었으나 징계 없는 용서는 괴물을 만든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는 절차적 정의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백성들에게 정의를 보여 주지 못하는 미련한 왕이 된 다윗을 보았습니다. 결과가 아무리 급하고 중요해도 과정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오늘 하루하루 주의 백성들이 서 있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일들을 행하고, 꼭 필요한 결정들이 고통스럽더라도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임을 깨닫고, 과정과정마다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복된 과정을 이루어 가시는 오늘 하루, 승리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icon
핵심 주제
icon
제목

날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