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6장

성경
사무엘하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6장

현대 스포츠 경기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동시에 가장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심판입니다. 경기가 끝난 후 관중들이 심판의 얼굴과 이름을 생생히 기억한다면, 그것은 심판이 경기를 망쳤다는 증거입니다. 심판이 카메라에 자주 잡히고, 경기가 자주 끊어지며, 선수들이 끊임없이 항의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관중들은 자연스럽게 심판의 존재를 각인하게 됩니다.

축구 심판은 적재적소에 정확한 휘슬을 불어야 하고, 야구 심판은 스트라이크와 볼, 세이프와 아웃을 명확하게 판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정확한 판정이 이루어질 때 선수들은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관중들은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원리를 교회 공동체와 신앙의 영역에 적용해보면, 목회자와 장로님들, 그리고 중직들의 역할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두드러지게 나서고, 모든 것을 이끌며, 전면에서 역할하는 것은 특별한 한시적 상황에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며, 성도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중직들과 먼저 된 자들이 감당해야 할 진정한 역할입니다. 만약 이러한 역할이 뒤바뀌어 버린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잘못된 방식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과 아비나답, 웃사, 아효는 모두 자신들의 역할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이 되었을 당시 이 언약궤가 예루살렘 성에 없었습니다.

과거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언약궤를 전장으로 가지고 나갔다가, 전쟁은 패배하고 언약궤는 빼앗기며 그들 자신은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보다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빼앗은 것을 더욱 기뻐하며 다곤 신전에 두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상한 현상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했습니다. 다곤 신상이 넘어져 목이 부러지고 팔다리가 끊어져 몸뚱이만 남게 되었습니다. 언약궤가 머무는 곳마다 심각한 역병이 돌아서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그 언약궤를 실로로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스라엘 변방인 기랏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그냥 방치해 두었습니다. 결국 아비나답은 자신의 집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무려 20년 동안이나 모시고 살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들 웃사와 아효도 함께 이 일을 담당했습니다.

20년이 지나서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 그는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고 그 성의 이름이 다윗성이 되었으며, 명실상부한 통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왕이 되었는데 한 가지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만 모셔와서 이 성에 있으면 자신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완벽한 왕이 될 것이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랏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가서 언약궤를 모셔오는 대대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삼하 6:1-2)

다윗은 무려 3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동원했습니다. 사실 언약궤를 옮기는 일은 민수기 율법에 따르면 레위 후손 몇 사람이면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언약궤가 이동할 때는 레위 자손이 어깨에 메고 걸어서 이동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3만 명을 동원한 것은 왕의 위엄을 과시하고, 연도에 사람들을 길게 늘어서게 하여 박수하고 환호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기획한 일종의 대규모 퍼레이드였던 것입니다.

공로주의의 함정

문제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삼하 6:3-5)

다윗, 아비나답, 웃사, 아효 모두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성경에 능통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레위 자손이 어깨에 메고 나와야 한다는 규정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당연히 이 규정을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윗은 새 수레를 준비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열광하고 환호할 만한 화려한 새 수레였습니다. 어깨에 메고 가는 것보다 수레에 싣고 가면 더 빨리 갈 수 있고, 3만 명의 연도에 늘어선 사람들이 모두 놀랄 만한 왕의 위엄을 보여줄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실었습니다.

아비나답은 여기에 편승했습니다. "왕이시여, 제가 20년 동안이나 이 귀한 성물을 모셨는데, 이제 우리 두 아들을 출세시켜 주십시오"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를 몰며 앞장서게 된 것입니다.

이들도 하나님의 언약궤는 레위 지파 레위 자손이 어깨에 메고 나와야 한다는 규정을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저렇게 하니까, 백성들 앞에서 자신들의 얼굴을 알리고 기랏여아림 산골짜기에서 벗어나 예루살렘 성에서 왕과 함께 출세의 길을 걷기 위해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로주의입니다. "내가 20년 동안 이 일을 했으니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하나님에게도 복을 받아야 하며, 이제는 이 산골에서 벗어나서 사람들에게 박수받으며 살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이 모든 것이 공로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서고, 자기 스스로 백성들 앞에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순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갚아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20년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상황에서 잘 모시고 돌보았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나답과 웃사, 아효는 이 기회에 편승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 6:6-7)

민수기 4장 15절에는 "여호와의 성물을 만지지 말라 그가 죽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뛰었고, 언약궤가 흔들리며 넘어지려 하자 웃사가 반사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즉시 그를 치셨고 웃사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태도

우리는 여기서 웃사의 20년 동안의 평소 행실을 읽어야 합니다. 그가 20년 동안 자기 집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런 식으로 관리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이 작은 언약궤 안에 가두어 놓고 자신이 관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좁은 성전에 계시는 분도 아니고, 그 작은 궤짝 안에 계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언약궤는 하나님 말씀의 상징으로서 연약하고 미련하고 부족한 백성들에게 이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십계명의 두 돌판을 보고 말씀을 따르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약궤 자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모셔야 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그들이 살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내가 이것을 가지고 한몫 톡톡히 잡으리라. 언젠가는 내가 이것을 이용해서 우리 자녀들과 나 자신을 출세시키리라"는 마음으로 언약궤를 출세의 도구로, 다윗과의 협상 도구로 삼은 대가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아비나답은 아들을 출세시키려고 보냈는데 아들이 죽어서 돌아왔습니다. 웃사는 죽었고 아효는 가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관리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씩 교회의 목회자들과 중직들에게서 하나님을 자기가 관리하려고 하는 태도가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섬기는 대상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관리받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섬기고 봉사하는 자들이지,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함부로 관리하고 재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말씀대로 잘 섬기고 따라야 합니다.

만약 레위지파 자손들이 소박하게 내려가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조용히 올라왔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비나답과 웃사, 아효, 그리고 다윗이 뒤로 물러서고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면,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다윗과 아비나답, 웃사, 아효를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관리할 수 없다는 사실, 절대로 하나님은 내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로주의의 위험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20년 동안이나 성실하게 모셨던 아비나답과 웃사, 아효의 마음속에 공로주의가 들어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다윗과의 협상에서 한몫을 단단히 챙기겠다"는 악한 마음이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열심히 했으니 복을 주십시오", "봉사를 열심히 하고 사명을 받아 열심히 살았으니 복을 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협상하려 하고 공로주의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모습을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말씀으로 모셔야 합니다. 웃사는 2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모신 것이 아니라 궤짝을 관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모시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관리하려고 하는 자들입니까? 우리의 모습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아버지의 말씀을 모시며 말씀이 이끄는 대로 뒤따라가는 지혜롭고 성실하며 하나님께 사랑받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드러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목회자와 중직들, 먼저 된 자들은 하나님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이름은 지우며 성도들이 마음껏 활동하고 일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앞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사랑받고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복의 자리에 서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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