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은혜 베풀기
사무엘하 9장
자연의 법칙 중에는 참으로 오묘하고 특별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당연하고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만고불변의 자연 법칙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면서 텅 빈 곳을 가득 채웁니다. 메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고 가뭄을 해결합니다.
물이 이렇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역시 위에서 아래로 사람에게로 흘러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방향은 위로부터 아래로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은혜를 베푸는 법은 없습니다. 은혜는 아래에서 위로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존재라면 우리도 당연히 받은 은혜를 가두어 두면 안 되고 흘려보내야 하며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베푸는 은혜의 방향도 받은 대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려보내고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요나단과의 언약
오늘 본문의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평안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절, 힘들었던 시절, 고민이 많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가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의 궁전에 들어온 이후에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했습니다. 사울은 그를 자신의 군대 장관으로 삼아서 이스라엘을 건지고 구원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노래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사울이 질투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창을 던집니다. 각종 음모를 꾸밉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을 살게 하고 그를 보호해 주고 그의 편이 되어준 한 사람이 바로 요나단이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 그는 다윗을 뜨겁게 사랑했고 아버지를 대적해 가면서까지 다윗을 보호해 준 아주 좋은 친구이자 동역자였습니다.
이제 사울의 분노가 극에 달해서 더 이상 왕궁에 머무를 수가 없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이 헤어지면서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사무엘상 20장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다윗과 요나단이 맹세하고 "너와 나 사이에 여호와가 계시고 너의 후손과 나의 후손 사이에도 여호와가 계실 것이다" 하며 두 사람이 언약을 맺고 헤어집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광야 시절을 지나면서 사울도 죽고 요나단도 죽고 사울 왕조는 갈수록 기울어집니다. 다윗은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강성해지고, 결국 다윗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됩니다. 왕이 되고 난 이후에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합니다.
사울의 후손 찾기
다윗이 사울의 집에 남은 자가 있는지 찾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삼하 9:3)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면서 사울의 집에 혹시라도 남은 후손이 있는지를 찾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아주 반갑습니다. 마침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남아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그 아들 므비보셋이 두 다리를 모두 절고 있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나라가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 유모가 이 소식을 듣고 므비보셋을 피신시키다가 그만 떨어뜨려서 그때부터 두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 므비보셋이 지금 누구네 집에 어디에서 기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까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물론 자기 아버지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이 각별했다는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므비보셋은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가 없는 인물 아니었겠습니까?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할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십수 년 동안 광야를 쫓아다닌 것을 알고 있는데, 세상이 바뀌어서 다윗이 왕이 되었는데 어떻게 므비보셋이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사울 왕가의 적손입니다" 하고 어떻게 나설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나섰다가 암살당하기 쉽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존재를 숨기면서 두 다리를 절고 있는 상태로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숨어 있습니다.
잘 숨어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제는 누구도 나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찾아옵니다. "왕이 너를 찾으신다. 어서 가자."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하나님의 은총
6절을 보십시오.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삼하 9:6)
그는 두 다리를 다 저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엎드려 절했다고 했습니다. 두 다리를 저는 사람이 어떻게 절을 할 수 있습니까? 기어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납작 엎드려서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이 말은 살려주시기만 하면 저는 그냥 숨만 붙어서 살고 있겠습니다. 저를 죽이지만 말아 주십시오"라는 부탁입니다. 이렇게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려고, 그를 겁주려고 부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윗의 진심을 이렇게 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삼하 9:7)
"내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이 말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다윗이 이런 말을 할지 주변 신하들은 몰랐을 것입니다. 주변 신하들이 펄쩍펄쩍 뛰며 말렸을 것입니다. "지금은 왕의 권세가 강해서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사람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절고 있지만 사울 왕가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를 살려주면 후환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각각 어떤 이유를 뒤집어 씌워서라도 그를 처리하셔야 됩니다."
아마 그렇게 말했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이 다윗을 배반할 수 있는 빌미를 주는 어떤 행동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사람들은 아마 그렇게 간청했을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가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받은 은혜를 베푸는, 갚아가는 방식입니다.
은혜의 연쇄
은혜를 갚는 것은 돈을 갚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돈은 빌린 사람에게 갚아야 됩니다. 내가 물질을 누군가에게 빌렸다면 그 사람에게 반드시 갚아야 됩니다. 그래야 사람 구실을 하며 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값없이 받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허락해 주시고 나를 택정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를 죄 없다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이기 때문에 교회를 섬기며 우리 예수님께서 피의 값으로 사신 이 교회에서 열심을 다해서 섬기고 봉사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은혜를 갚고 살지 않습니까? 또한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하나님 자녀들,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다면 또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은혜 갚는 방식입니다.
가난한 고학생이 어떤 한 부자에게 장학금을 받고 열심히 공부했다면, 나중에 그가 성공한 다음에 그도 또 다른 사람에게 장학금을 주고 은혜를 베풀며 살면 됩니다. 이것이 은혜를 갚는 방식입니다. 반드시 그 사람을 찾아가서 "제가 그때 당신에게 이만한 금액의 장학금을 받았으니 이제 돌려주려고 왔습니다" 그런 것을 어떻게 은혜 갚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요나단에게 받은 은혜를 그의 아들에게 베풀고 있습니다. 요나단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단은 다윗과 조약을 맺고 다윗에게 언약을 세우고 그에게 사랑을 베풀 때, 훗날 수십 년이 지나서 그의 아들이 다윗에게 은혜를 입을 줄 알고 베푼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가 은혜 베풀만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사랑으로 은혜를 베풀었고 자기도 모르게 은혜를 베풀었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서 그의 아들이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이게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내가 은혜 베풀 만한 위치에 있을 때 적극적으로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진 것, 작은 것이라도 있으면 나누어주고 베풀어주고 사랑을 전하면 결국 우리 자녀들이, 우리 자손들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은혜는 온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가득 채우고 오늘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줄로 믿습니다. 받은 은혜 나누고 또 베풀만한 자리에 있을 때 열심히 베풀고 나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우리도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야 합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면서 메마른 대지를 적시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값없이 받은 은혜를 가두어 두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은혜는 직접적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갚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받은 은혜를 그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베풀었습니다. 돈을 갚는 것과는 달리 은혜는 또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이 참된 은혜 갚는 방식입니다.
셋째는 은혜 베풀 만한 위치에 있을 때 적극적으로 나누고 베풀어야 합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들이 훗날 은혜를 입을 줄 모르고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었지만, 그 은혜가 시간이 지나서 그의 아들에게 돌아왔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가진 것이 있으면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며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은혜가 온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가득 채우며, 오늘도 받은 은혜를 갚아가며 살아가는 은혜에 민감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