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하시다
열왕기하 9장
인간은 본능적으로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실현을 갈망합니다. 세상에 악이 창궐하고 불의한 자들이 득세하여 판을 치는 현실을 목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신속히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즉시 개입하여 악인들을 징벌하고 그 권세의 자리에서 끌어내리시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시점에, 우리가 바라는 방식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세상이 불공정하다고 여기며, 하나님마저 정의롭지 못하다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조망하고, 보다 넓은 시각으로 세월의 궤적을 추적해보면 세상에서 악행을 일삼은 자들 중 하나님의 심판을 온전히 피해간 존재는 없었습니다. 앗시리아 제국, 바벨론 제국, 페르시아 제국, 로마 제국과 같은 거대한 패권국가들은 그 시대에 마치 영원불멸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들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무수한 백성들을 억압하고 고통에 빠뜨릴 때, 그 제국의 위용은 결코 꺾이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고, 단지 고고학적 흔적들만이 그들의 존재를 증언할 뿐입니다. 결국 그 어떤 제국도 영속성을 담보받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너져 내렸고, 그 자리를 또 다른 세력이 차지하는 역사의 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근현대사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제국주의와 독일의 나치즘 역시 천년왕국을 꿈꾸며 영원한 지배체제를 구축하려 했으나, 결국 하나님의 심판의 날카로운 칼날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악을 감찰하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징계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역사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야말로 참으로 공평하신 분이라고 확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광석화 같은 심판
하나님의 심판은 전광석화와 같이 순식간에 임합니다. 오랜 세월 인내하시며 지켜보시다가도, 일단 하나님께서 심판을 집행하시기로 결정하시는 순간부터는 그 누구도 그 진행을 막을 수 없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압도적인 속도로 하나님의 심판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아합 왕조와 그와 결탁한 모든 세력들을 심판하실 때 단 한 순간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시는 독특하고도 결정적인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합 왕가를 완전히 제거하시기로 작정하시면서 한 인물을 역사의 전면에 세우십니다. 그는 다름 아닌 아합 왕실의 군대 지휘관이었던 예후였습니다. 6절과 7절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청년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노니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 (왕하 9:6-7)
예후는 원래 아합 왕가의 충실한 신하였으며, 특히 아합의 아들 요람 왕이 거느린 군대의 핵심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에게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 전달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도구로 사용하여 아합 왕조와 그 일족, 그리고 그들과 연합한 모든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시기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후는 자신이 섬기던 주군을 배반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를 준비를 시작합니다.
13절과 14절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이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곧 요람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아람의 왕 하사엘과 맞서서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왕하 9:13-14)
여기서 언급되는 요람은 아합의 아들 여호람을 가리키는 다른 명칭입니다. 요람과 여호람은 동일한 인물을 지칭하는 서로 다른 표기일 뿐입니다. 예후는 지금까지 여호람 왕의 신실한 부하였지만, 이제 그 충성의 관계를 과감히 단절하고 자신이 직접 왕권을 장악하는 대담한 반역을 감행하게 됩니다.
나봇의 포도원
이제 필연적으로 요람과 예후는 대면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요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반역자를 응징하기 위해 나서야 했고, 예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성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전진해야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피할 수 없는 대결의 순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숙명적인 두 인물이 마주하게 된 장소가 실로 의미심장합니다. 21절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요람이 이르되 메우라 하매 그의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의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왕하 9:21)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 바로 나봇의 포도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장소가 갖는 상징적 의미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곳은 바로 요람의 부친 아합과 모친 이세벨이 의로운 신앙인이었던 나봇을 모함하여 처형한 후, 그의 소중한 포도원을 강탈했던 바로 그 현장이었습니다. 선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던 나봇이 억울하게 죽임당하고 그의 가문이 몰락한 그 땅에서, 이제 아합 왕조의 마지막 대결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의미 깊은 장소에서 요람이 예후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 (왕하 9:22)
거짓된 평안
"평안하냐?"라는 이 질문은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니라 "네가 전쟁을 위해 왔는가, 아니면 화해를 위해 왔는가?"라는 정치적 의도를 담은 탐색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평안'이라는 말을 요람이 입에 올릴 자격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요람이 언급하는 평안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편협한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배신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요람의 질문은 본질적으로 이런 의미였습니다. "내가 너를 처단하러 이 자리에 왔는데, 과연 네가 나에게 적대적 행위를 할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 평화적 해결책을 제시하러 온 것인가?" 결국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보전하려는 이기적 동기에서 비롯된 평안에 대한 갈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람이야말로 평안을 논할 자격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부친 아합과 모친 이세벨이 집권한 이래로 북이스라엘 왕국에 진정한 평안이 존재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오히려 그 땅에는 끊임없는 유혈사태와 칼바람만이 휘몰아쳤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는 백성들과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들이 무참히 살해당했고, 이세벨이 추앙하는 바알 신상과 아세라 우상들이 온 이스라엘 땅을 오염시켰습니다. 그런 참혹한 현실을 조성한 장본인들이 어떤 면목으로 지금 평안을 운운하는 것입니까?
신앙이 없는 인간들의 평안 개념은 언제나 자기중심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물질적 풍요로움이 있으면 평안하다고 착각하고, 육체적 건강이 유지되면 평안하다고 여기며,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없으면 평안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위 평안이라는 것들은 결국 타인의 희생과 고통을 발판으로 삼아 구축된 허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평안은 그런 차원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선사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의 극한 고난을 감내하셨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평안과는 거리가 먼 존재입니다. 죄악의 권세가 우리를 끊임없이 불안으로 내몰고, 죽음과 멸망의 그림자가 우리를 공포로 사로잡습니다. 죄와 사망의 현실은 인간을 결코 진정한 평안의 경지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셨고, 당신 자신을 십자가 제단에 완전한 제물로 드리셨으며, 죽음의 고난을 통과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참된 평안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영광으로 다시 사신 후, 십자가의 대속 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가장 먼저 찾아가신 분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전하신 첫 번째 메시지가 바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는 축복의 선포였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성격의 평안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누려야 할 평안은 죄악과 사망의 절대적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자유의 평안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 희생제물로 내어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선물하신 은혜의 평안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권력자들이 추구하는 평안은 자신들의 물질적 부귀와 세속적 영화를 통해서만 유지되는 일시적이고 허무한 평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요람은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평안을 결코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예후의 날카로운 칼날 앞에 무력하게 쓰러집니다. 23절과 24절의 기록입니다.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하니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겨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화살이 그의 염통을 꿰뚫고 나옴에 그가 병거 가운데 엎드러진지라" (왕하 9:23-24)
이로써 아합 왕조의 직계 후손 중 하나인 요람이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하게 되었습니다.
예후의 다음 목표는 악명 높은 이세벨이었습니다. 이세벨을 찾아가는 예후를 맞이하는 이세벨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평안이라는 말을 입에 올립니다. 30절과 31절을 보겠습니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이르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며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예후가 문에 들어옴에 이르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하니" (왕하 9:30-31)
평안이라는 고귀한 개념을 이세벨이 거론하는 것 자체가 극도로 부적절한 일입니다. 이 한 여인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당했습니까? 그런데 자신의 인생이 막다른 절벽에 다다른 순간에 이르러서야 그녀 또한 평안에 대한 절망적인 갈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후가 살육의 칼을 들고 나를 제거하러 왔구나. 혹시라도 네가 나에게 평화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러 온 것은 아닌가?" 이런 마지막 희망을 품고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세벨을 그냥 평안히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32절과 33절의 말씀입니다.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이르되 누가 나와 함께 하느냐 누가 나와 함께 하느냐 하니 두 세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이르되 그를 내려 던지라 하니 내려 던짐에 그의 피가 담과 말들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 (왕하 9:32-33)
결국 이세벨에게도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평안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아합 왕조와 그들과 결탁했던 모든 세력들이 평안과는 정반대의 참혹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은 생전에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착취하고 수탈하면서 자신들만의 안일한 평안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평안이란 죄악과 사망의 근본적 문제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임을 그들은 끝내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는 심오한 영적 교훈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실현됩니다. 비록 악이 일시적으로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고, 불의가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절망적 현실 앞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은 결코 좌절되지 않습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통해 우리는 이 진리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시리아와 바벨론, 나치 독일과 일본제국주의 등 모든 압제적 권력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방치하지 않으시며, 당신의 때가 되면 반드시 공의로운 판단을 내리십니다.
둘째는 참된 평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요람과 이세벨이 추구했던 평안은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의 희생을 전제로 한 허상에 불과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선사하시는 평안은 당신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죄악과 사망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얻어진 진정한 평안입니다. 이 평안만이 우리 영혼 깊숙한 곳의 실존적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근원적으로 치유해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우리 또한 평안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평안을 선물받은 우리는 이제 그 평안을 세상에 전파하는 거룩한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자기희생과 섬김의 삶을 통해, 땀과 수고와 기도와 눈물로써 이 세상의 수많은 영혼들과 우리의 가족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평안을 전하는 복된 사명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놀라운 평안을 마음껏 누리며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시고, 특히 이 사순절 기간이 그 거룩한 평안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 전체에 깊이 스며들어 체화되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