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장

성경
이사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이사야 1장

계시의 종교

이사야 선지자는 기원전 740년부터 681년까지 남유다에서 활동했습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네 왕의 치세를 거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그는,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당하는 충격적 사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에게 아픈 손가락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비록 갈라진 동족이었지만 한 핏줄이었기에, 그들이 당시 최강국 앗시리아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남유다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위협이었습니다. 멸망한 북이스라엘 땅에 앗시리아 군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남유다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국제정세는 날로 복잡해졌고,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남유다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사야가 활동했던 그 시대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이 식어가는 이 시대,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는 이사야의 메시지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이사야 1:1)

'계시'라는 단어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계시란 우리가 보고자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해 보여주신 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계시에는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불편한 진실도, 희망적인 약속도 공존합니다. 인간의 소망과 달리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현실은 때로 가혹하기까지 합니다. 다른 종교들이 인간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을 달래고 조종하려 한다면, 계시의 종교인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짐승보다 못한 백성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보여주신 계시의 핵심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사야 1:2-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소와 나귀보다 못하다고 책망하십니다. 짐승들조차 주인을 알아보고 먹이를 주는 손에 순종하는데,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이들은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멸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계시의 첫 메시지였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사야 1:4)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소돔과 고모라에 빗대신 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이사야 1:9-10)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 시대에 유황불로 심판받아 멸망한 도시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없었고, 의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이 우뚝 서 있고, 매일 예배가 드려지는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라 부르십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형식만 남은 예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사야 1:11-12)

'마당만 밟는 신앙' -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부지런히 출입했고, 제물을 풍성히 바쳤습니다. 예배의 형식은 완벽했고, 종교적 열심은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몸은 성전에 있었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제물은 넘쳤지만 진정한 헌신은 없었습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사야 1:13)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배를 '헛된 제물'이라 규정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절기를 준수하며, 성회로 모였지만, 하나님께는 이 모든 것이 가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왜일까요?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1:17)

예배와 삶이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는 경건한 예배자였지만, 일상에서는 약자를 외면하고 정의를 저버렸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고, 학대받는 자를 모른 척했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그들의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주일마다 예배당은 가득 차고, 헌금은 쌓이며, 웅장한 건물들이 세워집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신자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고, 사회정의에 무관심하며, 약자의 고통에 침묵한다면, 우리의 예배 역시 '헛된 제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교회도 소돔과 고모라라 부르실지 모릅니다.

하나님과의 직접 대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이사야 1:18)

'변론하자'는 초청입니다. 히브리어 야카흐(יָכַח)는 '앞에 나서다', '직면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 뒤에, 종교적 형식 뒤에 숨지 말고 직접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화려한 예물이나 완벽한 의식이 아니라, 벌거벗은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백성과 일대일로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친구라 부르셨고, 모세와는 대면하여 말씀하셨으며, 다윗의 진솔한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계획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보다 다윗이 자신 앞에 앉아 기도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웅장한 건축물보다 한 영혼의 진실한 고백을 더 원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 뒤에 숨어 있습니까? 누군가는 풍성한 헌금 뒤에, 누군가는 열심 있는 봉사 뒤에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나는 충분히 헌금하고 있으니", "나는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으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정작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회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가 메말랐고, 말씀 묵상이 형식적이 되었으며, 진정한 예배는 사라진 채 종교 활동만 남아 있다면, 우리 역시 '마당만 밟는' 신앙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소망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둘째, 예배와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예배를 드려도 일상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가증한 '헛된 제물'일 뿐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종교적 형식이 아니라 진실한 만남을 원하십니다. 제물이나 봉사 뒤에 숨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실하게 대화하고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초청하십니다. 종교적 허울을 벗어던지고, 진실한 영혼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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