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감각으로 하나님을 만나라
이사야 44장
오감의 한계
인간은 오감을 통해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며 종합적으로 결정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훈련받아 왔습니다. 오감을 종합적으로 분별하고 판단해야만 문제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식할 때는 하나님께서 이 오감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시다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므로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고, 볼 수 있는 형상이 없으시므로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과 인간이 대화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시므로 우리 귀에 직접적으로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느끼려면 인간의 오감이 아닌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하면서도 동시에 일반적이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는데, 바로 기도와 말씀이라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당신의 음성과 마음을 모두 계시해 주셨고, 그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기록된 성경으로 완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 또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하는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과 기도라는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오감 이외의 방법을 사용하려 하지 않고, 단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감각만으로 하나님을 찾으려 하니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상을 만듭니다. 자신의 다섯 가지 감각 이외의 모든 것들을 부정하기 때문에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근원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인데, 훗날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 이유 중 핵심이 바로 우상숭배였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 (이사야 44:8)
왜 유다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겁을 냈을까요? 하나님께서 자주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백성들이 상당히 많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항상 겁에 질려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두려워하고 겁냈다는 것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 실로 두려울 만하고 겁낼 만했기 때문입니다.
앗시리아의 군대를 보면 겁이 납니다. 두렵습니다. 바벨론의 위대하고 화려한 모습들을 보면 주눅이 듭니다. 우리의 성전을 살펴보면 솔로몬 성전이 위대하고 아름답다 할지라도 이방의 신전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방의 신들을 모신 신전들이 얼마나 장엄한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집트의 신전이 그러했고 바벨론 신전이 그랬고 앗시리아의 신을 섬기는 신전이 그랬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던 성전에 가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없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만 덩그러니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성소에도 대제사장이 1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소에 가보면 아무것도 없이 그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제단만 있을 뿐입니다. 섬기고 싶어도 섬길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적들은 그 섬김의 대상이 어마어마하게 웅장해 보입니다. 거기서부터 압도됩니다. 군대를 봐도 그렇고 신전을 봐도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거기서부터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 한없이 초라하고 연약하며 가진 것도 없고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대단히 크고 화려해 보이며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엄청나게 좋아 보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하는 실존적 근본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우상의 허망함
유다 백성들이 두려움 때문에 흔들려서 만든 것이 엉뚱하게도 우상이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이사야 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허망하다"는 표현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토후(תהו)"입니다. 토후라는 말은 사막이라는 뜻으로, 즉 황폐함을 의미합니다.
기껏 열심히 노력하여 만들었습니다. "이방인들처럼 우리도 우상을 한번 만들어보자. 우리도 그 우상 앞에 한번 엎드려 절해보자. 나도 든든하게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우상 앞에 한번 기대어보자" 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막같이 황폐한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우상은 나무나 철로 만드는 것인데, 결국 나무를 깎아 만드는 것 아닙니까? 철을 깎아 만드는 대장장이들이 만드는 것 아닙니까? 성경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 나무로 땔감을 만들어서 불을 때기도 하고 그 나무로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는데, 결국 그 나무로 우상을 만들어서 "너는 나를 인도할 신이라"고 엎드려서 구하는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너희들이라고 하나님이 책망하고 계십니다.
결국 그 우상이 허망하고 황폐한 사막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상은 결국 우리 인생도 사막같이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엎드린 인생들의 마지막 결말을 보십시오. 그 인생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솔로몬은 그것을 깨닫고 전도서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습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헛되다"는 말은 전도서의 핵심 사상인데 "헤벨(הבל)"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숨, 한숨, 수증기라는 뜻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숨처럼 입에서 나와서 사라져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한 줌의 한숨처럼, 수증기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헛된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솔로몬의 젊은 시절을 보십시오. 그는 아버지 다윗에게 물려받은 그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정략결혼을 합니다. 이방의 공주들을 데려옵니다. 이방의 공주들이 함께 가져온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우상이 자신을 구원했습니까? 그 나라를 구원했습니까?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반토막납니다. 국력은 완전히 땅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우상 자체가 허망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생도 사막같이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깎아 만든 우상 같은 것들은 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사람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내 자식이 우상이 되고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내가 섬길 만한 대상이 되며, 내가 붙들고 있는 물질이 나의 우상이 되어서 그것들을 섬기고 거기에 기대고 살면 그 또한 토후, 황폐한 사막 같은 것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라지면 내 인생도 황폐화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나를 배신하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섬길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또 한 번 깨닫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각성의 필요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져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 44:18)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오감, 눈이 가려져 보지 못하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의 눈을 밝히고 마음을 밝힐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기도밖에 없습니다.
시편 기자가 노래하지 않습니까?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내 인생을 환하게 밝힙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암중모색처럼 어둡고 캄캄한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등불처럼 들면 그 말씀이 내 눈앞을 환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세상에 많이 배운 지식인들이 미래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떠들어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미래를 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미래는 하나님의 말씀이 밝혀줍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따라가면 우리는 낭떠러지로 가지 않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길 끝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영접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재하십니다. 내 마음에 찾아오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내 마음의 어두운 것들은 몰아내고 걱정과 염려와 불안은 사라지게 하며, 아무리 세상이 크고 아름다워 보여도 거기에 마음 두지 않고 기도를 통해서 성령께서 밝혀주시는 내 마음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게 할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오감이 아닌 영적 감각으로만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므로 인간의 오감으로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말씀과 기도라는 영적 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소통하고 그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감의 한계를 인정하고 영적 감각을 계발해야 합니다.
둘째, 우상은 허망하며 우리 인생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허망하다고 하셨습니다. 나무와 철로 만든 우상뿐 아니라 사람이나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들에 의지하면 그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 인생도 사막같이 황폐해집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의지처가 되십니다.
셋째, 말씀과 기도로 영적 눈을 밝혀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가려지고 마음이 어두워져 깨닫지 못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길의 등불이 되고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밝혀주십니다. 세상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 인생의 미래를 말씀과 기도를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디 오늘 하루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 인간이 가진 오감이 아니라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