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7장

성경
이사야

티끌에 앉으라

이사야 47장

절정과 몰락의 법칙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통해 우리는 인간 능력의 한계와 영광의 덧없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세계 최고의 기량을 지닌 선수들이 최상의 경기력으로 치열하게 시합에 임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세계인들은 열광하고 기뻐합니다. 그들이 금메달과 월드컵 우승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금메달리스트가 결정되고 월드컵 우승팀도 가려집니다. 그들은 인생 최고의 기쁨과 영광을 그 순간 만끽합니다. 그런데 4년이 지나 또 다른 올림픽과 월드컵이 개최될 때, 지난 대회에서 우승했던 선수가 다시 그 자리에 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아주 특수한 종목의 천재적 선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금메달 주인이 바뀌게 됩니다. 4년 전에는 전혀 무명이었던 선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선수가 메달을 따고 그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그 자리의 주인은 교체됩니다.

절정의 기량을 4년, 8년, 12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고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불태워도 그 기량을 유지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금메달을 획득하고 그 성취에 도취되어 '나 한 달만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절대로 다시는 그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다른 선수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자리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최고의 선수다', '내가 금메달리스트다'라는 자만심을 품는 순간 교만이 스며들어오고, 그 교만은 그를 그 영광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가장 치명적인 적이 되어버립니다.

바벨론의 교만과 하나님의 심판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바벨론의 교만이 그들을 멸망하게 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따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 (이사야 47:1)

처녀딸 바벨론이 이제 티끌에 앉아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보좌의 자리, 높고 높은 영광의 자리에 있었으나 이제는 그 자리를 비워주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은 강력한 제국으로 군림했습니다. 앗시리아가 최강의 제국이었으나 바벨론이 이를 극복하고 멸망시킨 후 그 패권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의 세계 지배를 도모했으며, 그들은 전쟁술에 뛰어났고 신속하고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습니다. 그 군대로 타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바벨론은 인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식민지 각국에서 뛰어난 두뇌를 지닌 명문가 출신의 인재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와서 갈대아인의 학문과 언어를 교육시켰습니다. 다니엘도 그렇게 포로가 되었으며, 각국의 유망한 인재들을 모아 그들 나라의 법제와 문화를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바벨론 제국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염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위대했던 바벨론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바로 페르시아에 의해 왕좌를 내어주고 그들은 다시 낮은 자리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흙의 본질과 겸손의 사명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녀딸 바벨론이 앉는 자리입니다.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티끌은 흙이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재료로 삼았던 그 흙을 가리킵니다. 바로 아파르(עָפָר)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처녀딸 바벨론이여, 너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라"라는 뜻입니다.

흙의 기능과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흙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무를 흙에 심고, 각종 식물들이 흙을 먹고 흙 위에서 성장하고 자랍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도 흙에다가 씨를 뿌립니다.

흙은 그 자체로 생명을 품고 생명을 돋게 하며 생명을 자라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강한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모든 존재를 포용해주고 그 존재를 포용한 이후에 흙을 통해서 생명이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흙의 기능은 모양을 다양하게 바꾸는 것입니다. 도자기를 굽는 도공이 흙에서 재료를 가져갑니다. 작은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또 귀히 쓰는 큰 도자기, 좋은 백자나 청자 같은 것을 만들어서 집에 두고 감상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그릇으로 흙은 자신의 모양을 바꾸어냅니다.

또 흙의 기능은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입니다. 침을 뱉기도 하고 오물을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흙은 이 모든 것을 다 받아내주고서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오랫동안 유지합니다.

"너는 티끌로 돌아가라, 너는 흙으로 돌아가라"라는 이 말씀은 "너의 원래 존재가 흙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어떠했습니까? 바벨론을 통해서 생명이 자라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벨론은 생명을 파괴하고 생명을 죽이고 생명을 짓밟는 존재였습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타인들을 괴롭게 하여 바벨론이라는 토양 아래에서는 어떤 생명도 성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벨론은 자신의 모습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다양하게 타인을 위한 그릇으로 쓰임받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은 높은 곳 보좌 위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밟히거나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내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런 바벨론을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시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의 존재가 원래 흙에서부터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높고 높은 보좌는 흙과 자꾸만 멀어지는 자리이며, 나의 원래 존재가 흙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지금 앉아있는 그 자리가 불편해야 합니다.

내가 높아지는 것, 더없이 높아지고 창공을 비행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인식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흙의 자리가 원래 나의 자리라는 것을 깨닫고, 나를 통해 생명이 성장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나를 만나는 사람들의 죽어가는 영혼이 다시 소생하게 되고, 그들이 숨을 쉴 수 있게 되며, 새로운 존재로 호흡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흙의 사명과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 모습을 고집하지 않고 때로는 사기그릇이 되고, 때로는 볼품없는 질그릇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주인이 쓰시기에 귀한 그릇이 되기도 할 때 우리는 흙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남들에게 밟히기도 하고 누군가가 오물을 버리기도 하는데, 그것 또한 묵묵히 받아낸다면 참된 흙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존재의 가치이며,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교만의 결과와 심판의 필연성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였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이사야 47:10)

바벨론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세상에는 나밖에 없다.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내가 최고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높고 높은 보좌에 올라가서 땅의 존재로 내려오기를 거부했던 바벨론을 하나님께서는 끌어내리셨습니다. 그보다 더 강력한 제국 페르시아를 일으켜서 그들을 끌어내리셨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라는 이 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주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바벨론은 자기 스스로를 신적 위치로 끌어올려 놓고 있었습니다. 이런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 겸손한 자리를 버리고 내가 흙이 아닌 척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있으면 주인이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너는 너의 원래의 자리, 아파르 흙의 자리로 돌아가라. 너는 원래가 그런 존재였는데 왜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세상에 대해서 군림하려고 하느냐?"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신 이유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공생애 삶을 살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흙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을 통해서 생명이 살아납니다. 우리 주님이라는 토양을 통해서 우리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살아납니다. 그들이 모두 회복되고 그들이 은혜를 입고 그들이 자기 존재의 가치를 깨닫고 느낍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는 대로 쓰임받으셨습니다. 때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께서 빚으시는 대로 쓰임받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모욕과 수치와 침 뱉음을 수시로 당하셨습니다. 벌거벗김 당하고 매 맞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분이셨습니다.

스스로 낮아지고 낮은 자리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자리로 들어가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높이셔서 가장 존귀한 이름을 그분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높아지고 보좌 위 높은 곳에 자리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목덜미를 잡아다가 땅바닥에 내팽개치십니다. 그런 굴욕과 수치를 당하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 연약하고 낮아지는 흙의 자리를 인식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이사야 47:11)

바벨론에게 재앙이 임하는데,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보좌 위에서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데 이유를 알지 못하면 고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더 큰 비극이고 재앙입니다.

문제가 일어나는데 문제의 근원을 모르는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타는 자동차가 자꾸 고장이 나는데 문제의 근원을 모른다면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꾸만 시동이 꺼지는 차를 불안해서 어떻게 타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에 문제가 일어나고 재앙이 닥치는데 근원을 알지 못하는 것은 내가 겸손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흙의 자리로 내려가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원래 나를 창조하신 아파르(עָפָר) 흙의 위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자신이 원래 흙에서 나온 존재임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높고 높은 보좌는 흙과 자꾸만 멀어지는 자리이며, 나의 원래 존재가 흙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지금 앉아있는 높은 자리가 불편해야 합니다. 더없이 높아지고 창공을 비행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흙의 사명과 기능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 생명이 성장하고 있는지 늘 점검하며, 나를 만나는 사람들의 죽어가는 영혼이 다시 소생하게 되고 새로운 존재로 호흡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참된 사명입니다. 때로는 사기그릇이 되고 질그릇이 되기도 하며, 주인이 쓰시기에 귀한 그릇으로 쓰임받아야 합니다.

셋째, 겸손한 자리를 끝까지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남들에게 밟히기도 하고 오물을 받아내는 것도 묵묵히 감당하는 것이 흙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겸손한 자리를 버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려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십니다.

이런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를 지금까지 사용하시고 세우시며 호흡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도 하나님 앞에 흙의 존재로 겸손하게 살아가시는 주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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