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이 기도하는 집
이사야 56장
본래적 기능과 파생적 기능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공간은 본래적 기능과 그로부터 파생된 부수적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카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카페의 본질적 목적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카페는 단순히 음료만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음악을 감상하며, 때로는 공부나 업무를 처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생적 기능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어야 합니다. 파생적 활동이 본래의 목적을 침해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루 종일 카페에서 단 한 잔의 음료도 주문하지 않고 공부만 한다거나, 테라스에서 불판을 펴놓고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면 용납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다양한 활동이 허용된다 해도 그 공간의 본질적 목적을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성전의 본래적 기능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성전의 본질은 기도하는 곳,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드리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예언하던 시절, 유다 백성들은 이러한 성전의 본질을 망각했습니다. 놀랍게도 오히려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참된 예배자가 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이사야 56:3)
하나님과 연합한 이방인들,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유다 백성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늘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이방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실 것이라 두려워했고,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이들은 저주받은 몸으로 태어났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이사야 56:4-5)
'영원한 이름'이라는 약속은 단순히 이 땅에서의 인정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기억되리라는 보증입니다. 출신과 신분, 육체적 조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출애굽 때부터 일관되게 나타난 하나님의 원칙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때, 함께 살던 소수민족들인 '잡족'도 동행했습니다. 그들은 열 가지 재앙을 목격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했으며, 유월절 밤에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으셨고, 그들도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 40년을 함께하게 하셨으며, 결국 이스라엘 12지파에 편입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혈통이나 신분이 아니라 현재의 믿음입니다. 과거의 업적이나 부모의 신앙은 과거일 뿐,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여호와와 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일 뿐입니다. 부모의 믿음과 신앙, 내가 가졌던 직분은 그저 과거의 일이며, 더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사야 선지자가 표현한 것처럼 여호와와 연합한 상태에 있는가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역설적 상황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시절, 이미 북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어 아시리아에 의해 망하게 하셨습니다. 남유다의 문제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님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한 것은 우상 숭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며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들이 오히려 여호와와 연합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겠습니까?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우상숭배하고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아니면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모두가 하나님이 지으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당연히 여호와와 연합한 자들에게 흘러갈 것입니다.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이사야 56:6)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리들이 많았지만 모두가 악한 세리는 아니었습니다. 세리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누가복음 19장의 세리장 삭개오는 구원을 받았으며,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세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세리라고 해서 모두 악한 세리가 아니고, 이방인이라고 해서 모두 비난받아 마땅한 자들이 아닙니다. 직업이나 신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호와와 연합하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사야 56:7)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갈 때 이방인들이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성전을 개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배타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이방인의 뜰을 따로 만들어 그들의 접근을 원천 차단했습니다. 성전 안은 유대인만,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 말기 그 '거룩한' 성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형식적 예배와 탐욕의 제사가 드려졌을 뿐입니다. 반면 이방인들은 성전을 사모하며 단 한 번이라도 그곳에서 기도하기를 갈망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선언에는 두 가지 핵심이 있습니다. 첫째, '만민'입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환영받는다는 뜻입니다. 둘째, '기도하는 집'입니다. 누구나 올 수 있지만, 반드시 기도하러 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돌아간다면 그것은 성전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전이 시장이 되어버렸고, 기도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받으며 이익을 취했습니다. 예수님은 상을 엎으시고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외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제와 친목, 다양한 프로그램과 활동은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예배와 기도가 소홀히 여겨진다면 우리는 성전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성전의 본질은 만민이 기도하는 곳입니다. 다양한 활동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와 기도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현재의 믿음을 보십니다. 과거의 신앙이나 혈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호와와 연합되어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셋째, 하나님께는 차별이 없습니다. 출신, 신분, 육체적 조건과 관계없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이름을 약속하십니다.
성전의 본래적 기능을 회복하고, 기도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귀히 여기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