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나무
이사야 61장
시간의 절대성과 상대성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것입니다. 시간은 절대적인 것인 동시에 상대적입니다. 시간이 절대적이라 함은 하루에 24시간, 1년 365일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차별도 차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한 시간이 상대적이라 하는 것은 똑같이 같은 시간을 부여받았다 하더라도 같은 능률을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하루에 24시간을 48시간처럼 사용하고 자기가 시간을 주도적으로 사용해서 꼭 필요한 일들을 성실하게 제대로 해내는 반면, 또 어떤 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해서 시간을 그냥 흘려보냅니다. 그런 이들은 결국 마지막에 궁지에 몰려서 시간이 없어서 허둥대다가 일을 그르치고 맙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3년의 짧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중에서도 복음서에 기록된 시간은 3년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살아가신 이 3년의 공생애에는 그 어떤 이들의 평생보다도 훨씬 더 밀도 있고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3년간 하신 일 가운데 정점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나머지 모든 사건들은 십자가 사건을 향하여 달려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 온 세상 인류의 죄를 구속하신 십자가 영혼구원의 사건이 그 어떤 이들의 일평생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놀랍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시간을 분초로 나누며 상대적으로 만들어 가며 행하신 일들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실 일들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이사야 61:1)
우리 주님께 여호와의 영,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임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어떤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성령이 내리신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도, 특별히 사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증거 없이는 어떤 일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성령 충만하여서 하신 일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등 여러 가지 텅 빈 영혼을 가진 자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산상수훈에 따르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세상 일들에 치여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늘의 위로를 기다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오셔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소식이 무엇이겠습니까? 물질이 없는 자에게 돈을 준다는 소식이 아름다운 소식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소식은 천국복음입니다. '이 땅에서는 너희가 이렇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너희의 가난함을 잘 견디고 이겨내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면 결국은 너희들이 이 땅을 떠나서도 영원한 천국에서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그 아름다운 소식,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천국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상한 자들이 있습니다. 물질 문제로, 자녀 문제로, 자신의 건강 문제로 등등의 문제로 마음이 상하면 고침 받을 데가 없습니다. 몸이 상하면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의사에게 가면 되지만, 마음이 상하면 이 마음을 고쳐줄 데가 없습니다. 그런 자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찾아다니면서 위로해 주시고 그들의 마음, 심령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을 여러 번 바꾸었지만 여전히 진정한 사랑은 찾지 못해서 사람들의 손가락질 때문에 마음을 다쳐서 대낮에, 한낮에 누구도 나오지 않는 그 시각에 우물에 물을 길러 나오는 마음이 상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을 우리 주님께서 찾아가시고 만나주시고 대화 나누신 이후에 사랑에 목마른 여인의 마음을 고쳐주셨습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자유와 놓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발에 차꼬를 차고 손에 수갑을 차서 감옥에 들어 있어서 자유를 잃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은 죄에 매여 있습니다. 죄악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들은 죄로부터 그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이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들은 죄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주님께서는 선포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결국은 자유를 허락하는 피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서부터 일어나는 여러 가지 죄의 권세가 내 발목을 잡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덧입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죄는 우리를 함부로 이끌어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죄의 권세를 제어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들은 바로 이런 일들이었습니다.
위로자 예수님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이사야 61:2)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위로 사역도 하셨습니다. 인간이 줄 수 없는 위로를 우리 주님께서는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슬픔에 빠진 이들,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보면 힘내라고 말하며 내가 너와 함께 할 테니 너는 얼른 일어나서 다시 너의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사람들은 해결해 주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정말 우리의 위로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진정한 위로자,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 주님 앞에 와서 엎드립니다. 주님과 함께 자기 집으로 가던 길에 딸의 죽음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때 야이로가 얼굴이 파래지고 생각이 아득해집니다. 그때 야이로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우리 주님께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 진정한 위로는 함께 가셔서 사랑하는 딸을 살려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려서 그 어머니에게 돌려보내주셨습니다. 주님의 위로는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울지 말라' 하셨다면 정말 그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시고 다시는 울지 않도록 근원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 위로자이신 우리 주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의의 나무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사역을 하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일들을 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통해서 이 일을 하고 계신 이유가 바로 3절에 나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근심을 대신하게 하사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것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려 함이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61:3)
우리를 의의 나무가 되게 하려고 주님께서 이런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 우리의 마음속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 주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쳐주시고, 매여있는 자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시며, 진정한 위로를 주시는 까닭은 우리 각자를 의의 나무로 심으시고 기르시고 세우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무를 심고 나무를 기르는 일은 농부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 농부의 수고는 우리 주님께서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다 나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나무에게 맺히기를 원하는 열매는 바로 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의는 공의를 의미합니다. 체다카, 이사야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미쉬파트와 체다카, 정의는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으로 절대 불변의 말씀이라면, 공의 체다카는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어가야 하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의의 나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면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서 심으신 의의 나무라면 우리는 주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그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로 한 열매이어야 합니다. 이 열매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맺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내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피를 받아먹고 그 피를 통해서 구원받았는데 열매 맺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실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봉사자
이제 구체적으로 의의 나무가 맺어야 할 열매의 구체적인 상징과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들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이사야 61:4)
여기서 '그들'이라 함은 의의 나무로 심겨진 자들을 의미합니다. 의의 나무가 된 자들은 황폐한 곳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사탄이 쓸고 간 자리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황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의 나무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면 황폐한 곳을 아름답게 세워갈 것입니다.
우리의 일터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가정, 모든 곳이 나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열매가 가득 차고 넘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는 곳에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흘러나가는 성령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황폐한 곳을 새롭게 중수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부르십니까?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이사야 61:6)
이런 사람들을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하나님의 봉사자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봉사자가 된다는 것은 그저 교회에 와서 교회에서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진정한 봉사자가 된다는 것은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가지고 살아서 의의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물질적 가난뿐만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복음이라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찾아가셔서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의의 나무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면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의의 나무들입니다.
셋째, 의의 나무는 황폐한 곳을 회복시키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성령의 은혜가 흘러나가서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황폐했던 곳들이 아름답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 부디 이 하루 살아가시면서 우리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의의 나무로 여러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그들을 풍성하게 만드는 믿음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