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6장

성경
이사야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사야 66장

부모의 마음

부모는 자녀의 표정과 행동만으로도 그들의 마음 상태를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굳이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자녀가 지금 즐거운지, 불편한지를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생명을 낳고 사랑으로 키우며 깊은 관심으로 지켜본 은혜로운 관계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부모라 하더라도 자녀의 모든 속마음을 완전히 꿰뚫어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획하는 모든 것,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들, 깊은 내면의 동기까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속일 수도 없고 감출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마음이 힘들면서도 괜찮은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 66:1)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 온 세상 모든 만물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친히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성전 중심의 신앙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성전 중심 신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이해가 심각하게 왜곡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 아래에 모으시고 그곳에서 두 가지 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의 율법이요, 또 하나는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제한되어 계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들과 하나님께서 만나는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또한 그 백성들을 사랑하실 때, 그때 만나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의 자리가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이후부터 성전에 대한 이해가 심각하게 왜곡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 무조건 거하시는 분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때는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그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나실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는 그들이 어떤 형태의 예배를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그들을 만나주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유다 백성들이 한편으로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적으로 성전에 나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하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심각하게 착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예배드리면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분이라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이방신들에게나 하는 무례한 일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사 66:2)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를 하나님께서 친히 돌보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떨다'라는 동사에 있습니다. 히브리어 '하레드(חרד)'라는 단어가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한 번 떤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떨고 있다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오는 자가 가난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주의 말씀을 받을 때, 두렵고 떨림으로 나와야 한다는 깊은 뜻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나오는 자가 막연한 공포심을 가지고 나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두렵고 떨림이라는 것은 나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나를 주관하고 계시는 나의 존재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거룩한 경외감입니다.

감히 나 같은 존재가 어제도 죄를 범하고 오늘도 죄를 범하며, 항상 입술에는 불평과 불만이 있고, 내 마음에는 더러운 죄악을 품고 사는 이런 존재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겠는가? 이러한 두렵고 떨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가난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와서 수많은 제물을 드린다 해도, 심지어 10마리의 소를 번제단에 올려놓고 100마리의 양을 번제단에 올려서 태워드린다 해도, 그러나 두렵고 떨림이 없다면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겠다고 엄중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예배를 드리지 않아서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남유다가 예물을 적게 드려서 심판받은 것이 아닙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에서 매우 열심히 예배드렸습니다. 남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실히 예배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두렵고 떨림이라는 거룩한 경외감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진정한 두렵고 떨림이 있었다면 과연 그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했겠습니까? 종교 지도자들과 제사장들,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받았다면, 그들은 반드시 말씀을 지키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사야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 에스겔 선지자, 하박국과 미가 선지자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소수의 참 선지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당시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심과 탐욕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배드리는 자들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 이러한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있는지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경건한 모습으로 와서 찬양하고 많은 예물을 드리며 예배드린다 해도, 예배당 문을 나서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두려움과 떨림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경외감을 가지고 산다면, 당연히 세상에서도 말씀을 지키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당 밖을 나서면 우리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말씀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삽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살다가 다시 예배당에 올라옵니다. 이것은 참으로 뻔뻔한 일이며, 두려움도 없고 떨림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위선의 덩어리로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심판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시며 지금도 인내로 지켜보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운 마음과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가지고 정결하게 우리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그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지금도 간절히 요구하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사 66:5)

여기서도 역시 '여호와의 말씀으로 떠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까? 하레드, 즉 두렵고 떨림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경외감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모두 보고 계시며 아시고 계신다는 엄중한 사실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서 말씀은 1장 18절에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야카흐, יכח)"는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숨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변론이라는 것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가 듣는 응답하는 것이 변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죄를 고백하는 것이 변론입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과의 변론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의 마지막은 하레드, 즉 두렵고 떨림으로 마무리됩니다. 결국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우리는 새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5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새하늘과 새 땅은 반드시 심판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심판을 받고 나서 새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비참한 자들이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실한 변론을 나누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듣고, 그 말씀을 굳게 붙들고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며, 담대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을 새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66:22)

새하늘과 새 땅은 결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받게 되면 새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새하늘과 새 땅이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실한 변론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많은 제물을 가지고 와서 종교적인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며 그 제물을 기계적으로 드리는 자가 되어서는 새하늘과 새 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경외감으로 말씀을 지키고 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세밀하게 알고 계십니다.

부모도 자녀의 마음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완전히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속일 수도 없고 감출 것도 없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받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아무리 많은 제물이나 화려한 예배라 해도,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받는 자를 하나님께서 친히 돌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의미합니다.

셋째, 오직 두렵고 떨림이 있는 자만이 새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경외감을 품고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새하늘과 새 땅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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