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씨
이사야 6장
파레토의 법칙
파레토의 법칙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수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파레토가 기업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이 법칙은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전체 기업 매출의 80%가 그 기업의 주력 산업 약 20%에서 창출된다는 것입니다. 기업에서 주력으로 만들어낸 제품, 주력하는 모델들 20%가 기업 전체를 먹여 살리는 현상입니다.
이는 국가 경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국민총생산의 약 80%가 국가가 주력하는 산업 20%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결국 그 국가 전체를 이끌어가는 경제적인 힘은 그 나라의 주력산업에 있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이 법칙은 공동체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100명의 사람이 그 공동체에 있다면, 열심을 내고 최선을 다하며 열정을 가진 20명 정도의 사람이 전체를 이끌고 나갑니다. 교회 공동체도 예외가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있어도 그중에 열심을 내고 주의 일에 헌신된 사람은 그만큼 적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일꾼이 필요한데, 그 일꾼은 언제나 부족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일꾼을 택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택하시는 그 장면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을 택하시는지, 또 하나님은 그 택한 자를 어떻게 하셔서 이 세상으로 내보내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왕의 죽음, 성전의 영광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 6:1)
때는 기원전 740년이었습니다. 남유다의 왕 웃시야가 세상을 떠난 해입니다. 유다왕 웃시야는 참으로 훌륭한 성군이었습니다. 일도 잘했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이었으며, 외교도 탁월하게 다루었던 임금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이후에 웃시야 왕이 그만 교만해졌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분향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을 왕이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왕을 가만히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나병을 내리셨습니다. 결국 나병에 걸린 웃시야 왕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별채에 거하게 됩니다. 그가 별채에 거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웃시야 왕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은 복잡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왕이었습니다. 이 왕을 통해서 나라는 번성했고 안전했으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만한 나머지 벌을 받았고, 오랜 세월 형벌 가운데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백성들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당시 국제 정세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동쪽에 있는 제국 앗수르가 애굽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 북이스라엘이 있고 남유다가 있습니다. 결국 앗수르의 군대가 기회만 되면 북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이어서 그 다음 표적이 남유다가 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이중적인 마음,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왕이 세상을 떠났고, 국제정세는 불안정하며, 다음 왕은 어떤 정치를 펼칠지 모르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국내외 정세가 결코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성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세상이 복잡할 때, 믿음의 백성들은 우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정치적인 입장을 표시하고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는 것도 물론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와서 엎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성전에 나와서 방향을 찾고 답을 얻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자들과 믿는 자들의 차이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과 견해를 따라서 움직이고, 그 견해에 따라서 구호를 외칩니다. 그러나 믿음의 백성들은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먼저 성전에 나와서 아버지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다음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바로 이런 복잡한 상황에 성전에 나와서 엎드린 것입니다. 국내외적으로 여러 복잡한 환경과 상황이 있을 때, 먼저 하나님께 나와서 엎드리고 주의 뜻을 구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만났습니다.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천사들이 춤을 추고 날갯짓을 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천사들의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부정한 입술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 6:5)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후에 두려움에 떨며 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입술이 부정하다고 말했을까요? 사실 입술만 부정하겠습니까?
이사야가 말한 "입술이 부정하다"는 고백은 단순히 입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가 부정함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입술로 나오는 말은 마음에서 시작되고, 그 마음의 생각은 머리에서 형성됩니다. 머리의 사고와 마음의 생각이 하나가 되어 입술을 통해서는 말로, 손과 발을 통해서는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전 존재가 부정하다는 의미입니다. "성전에 나와서 엎드려 기도하지만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도 죄뿐이고, 마음에 품은 것도 죄악이며, 손과 발이 행하는 것도 죄악된 길로 달려갑니다. 이런 존재가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으니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절망적인 탄식이자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죄인이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대면할 때 느끼는 두려움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죄 많은 인간이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 6:6-7)
하나님은 이사야를 이렇게 다루십니다. 그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제단에서 핀 숯을 그의 입술에 대고 "너의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죄를 왜 용서해 주시는 걸까요? 그의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생각으로, 마음에 품은 죄, 입술로 내뱉은 죄들, 손과 발이 범한 모든 죄들을 왜 하나님은 정결하게 하시는 겁니까?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사야 6:8)
하나님이 그의 죄를 사해주시는 까닭은 그를 정결하게 하여서 아버지의 일을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역자로 삼으시는 자,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시는 자는 깨끗하기를 원하십니다. 정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꾼을 세우시는 방식이 여기에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사람을 하나님은 과거에도 찾으셨고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일꾼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겸손입니다. 겸손하여 엎드리는 자는 하나님께서 다루시기에 합당합니다. 반면 목이 곧은 백성, 교만한 백성,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고 자기 주장이 강한 자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주의 일에 사용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일꾼의 자격을 정하실 때 사람들이 중시하는 능력을 보지 않으십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도 능력도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필요할 때 그 사람에게 주시면 됩니다. 능력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입술에 숯불을 대서 죄를 사해 주시고, 이제는 정결해졌으니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누가 나를 위하여 일할꼬"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기도하던 이사야, 죄 사함을 받은 이사야는 "내가 가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부디 정결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늘 회개하고, 내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기도하며,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거룩한 그루터기
또한 하나님은 일꾼을 보내실 때 그냥 보내지 않으십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이사야 6:13)
이 나라가 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돌아선다 할지라도, 모든 백성이 다 떠났다 할지라도, 이 땅에 거룩한 씨가 남아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직까지 이 나라, 이 땅, 이 유다 땅에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거룩한 그루터기들이 남아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야,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의 동역자들이 남아 있으니 외롭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힘을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사야를 보내신 하나님, 그를 부르시고 일하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일터로, 세상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면서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거룩한 씨들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혼탁합니다. 기원전 740년 웃시야 왕이 죽고 앗수르의 침공이 가시화되었을 때, 그 복잡한 상황에서 성전에 엎드렸던 이사야를 기억합니다. 자기 주장 이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성전에 나온 이사야처럼, 우리도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을 살면서 새벽을 깨우며 주 앞에 나아가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자기 주장으로 가득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맡기실 때 동역자들에게 먼저 죄사함을 주시고 깨끗하게 정결하게 빚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받고 정결함으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먼저 죄에서 떠나고 아버지의 뜻을 매 순간 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부르실 때 순종하고 엎드리며, 주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동역자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거룩한 씨인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일하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위기의 때일수록 성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복잡하고 어려울 때, 정치적 견해나 자기 신념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겸손하고 정결한 일꾼을 찾으십니다. 능력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깨끗하고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거룩한 씨들이 곳곳에 남아있으며, 하나님은 동역자를 주셔서 함께 일하게 하십니다.
이사야를 부르시고 정결케 하셔서 보내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거룩한 씨들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쳐가는 동역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