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함께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7장
든든한 동행자
초등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때 그들에게 두려운 것은 학교 공부가 아닙니다. 그들은 학교 생활이 두렵습니다. 덩치도 크고 무섭게 생긴 선배들과 함께 학교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 어린 아이들에게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만약 그때 동네 친한 형이 같이 등교를 해주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그 형이 나를 지켜줄 것이고, 그 형과 내가 마치 친형제처럼 학교를 다니면 나를 해롭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혼자 살아간다고 느끼면 그것보다 무섭고 두려운 일은 없습니다. 누군가 나와 함께하고 내 속마음을 덜어주고 내 마음을 나눌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일터도 그리고 이 세상도 살만한 세상이 됩니다. 가정에서도 나와 통할 수 있는 가족이 있어서, 일터에서 힘든 일을 집에 돌아와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살만한 세상이 됩니다.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이 세상은 얼마든지 살아갈 만한 세상이 되는데, 만약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얼마나 힘이 나고 든든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리라 하는 그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집니다.
두 번째 위기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기원전 8세기, 전 세계 패권은 앗수르가 제국의 상태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주변의 나라들은 앗수르 제국 때문에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 나라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제국으로서 영토를 계속 지속적으로 확대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나름대로 군사대국이었던 아람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먼저 동맹을 맺습니다.
두 나라가 힘을 합쳐서 앗수르에 대항해 보겠다고 동맹을 맺었습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이 두 나라는 남유다에도 동맹을 제안합니다. 세 나라가 힘을 합치면 못할 것이 없지 않겠느냐고 동맹을 맺어보자고 합니다. 하지만 웃시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하스 왕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우리는 동맹을 맺을 생각이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먼저 남유다를 치기 위해서 침공합니다. 이때가 기원전 735년의 일이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기원전 740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 이후 5년이 지나고 나서 일어난 일입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이사야 7:1)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연합군이 남유다를 쳤으나 1차 침공에 실패합니다. 즉 남유다의 아하스 왕이 이들을 물리쳤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물리쳤는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으니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훌륭하게 1차 침공을 저지해냅니다. 그런데 이에 가만히 있을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두 번째 침공을 결의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이사야 7:2)
첫 번째 침공은 어떻게든 이겨내었는데 2차 침공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아하스 왕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백성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두 번째 침공을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1차 침공에는 그들이 우리를 얕보고 덤비다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겼지만, 두 번째 침공은 작정하고 달려들 텐데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이 그들에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사탄이 얼마나 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한 번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악한 세력들은 두 번, 세 번, 아니면 그 이상 집요하게 계속 약점을 파고듭니다. 사탄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한 번의 시험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에게조차 이렇게 세 번이나 시험하는데 우리는 두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시험할 때 한 번의 시험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동침을 청했는데 거절당하자 날마다 그를 유혹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백성들은 한 번 승리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같은 문제로, 비슷한 문제로 사탄은 여러 번 지속적으로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고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백성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악한 사탄 마귀의 시험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는 말씀으로 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징조를 구하라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아하스 왕에게 보냅니다.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할 테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예언의 말씀을 전하라고 합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이사야 7:3-4)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이제 아하스는 걱정하지 말고 백성들과 함께 전쟁하고 방어에 나서면 됩니다. 하나님이 책임진다고 하시는데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이사야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만약 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렵다면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직접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고 엎드려서 증거를 달라고 말하라고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이사야 7:10-11)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입니까?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여전히 믿지 못하는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아하스가 직접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정말 우리를 구원하실 겁니까? 그러면 나에게 징조를 보여주십시오"라고 구하면 됩니다. 마치 기드온이 하나님이 자신을 부른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양털의 시험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면 됩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 7:12)
믿음이 좋아 보이는 말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믿음이 좋은 말이 아니라 계속 두려움에 있겠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도 두렵습니다. 나는 기도할 힘조차 없습니다. 징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믿음 없음을 아하스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아하스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지만 이런 상황을 여러 번 직면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힘을 내라, 용기 내라, 지금까지 너의 인생을 책임지신 하나님께서 이번 일도 너를 돌보시고 책임지실 것이다. 절대로 너를 무너지지 않게 하시고 망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엎드려 기도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하지 못합니다. 힘이 없습니다. "기도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하며 그냥 드러누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마치 아하스처럼 우리도 그렇습니다.
괴로워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런 아하스를 향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3-14)
이것은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 나와서 직접 엎드려 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쳐서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매우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지음받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된 자의 사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화를 시도한다는 뜻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좋으신 우리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 이 약속은 당시 아하스에게만 주신 약속이 아닙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 말씀이 700년 이후에 그 땅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그 약속은 700년 이후에 팔레스타인에서 아기 예수님이 오신 것으로만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도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엎드려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힘주시고 이겨내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께 털어놓기 위해서 왔습니다. 기도하는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놀라운 영적 임재 체험을 함께 누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아하스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에게 징조를 보일 것이니 너는 징조를 직접 구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기도할 힘조차 없습니다"라고 무너져 앉아버린 아하스처럼 우리는 살지 않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능력 가운데 일하시는 주님, 기도할 때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영화롭다 하시는 주님, 우리와 오늘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나아갑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700년 전에도, 700년 후에도, 오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사탄의 시험은 반복적이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한 번의 승리로 끝나지 않으며, 집요하게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기에 말씀으로 무장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둘째,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입니다. 피조물된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그것은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셋째, 임마누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700년 전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고, 오늘도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동행자가 되신다는 것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도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