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족보
창세기 5장
하나님이 기록하시는 역사
성경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들의 기록이며 사람과 함께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정말 별것 아닌 것 같고, 우리가 볼 때는 아무런 업적이나 능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사람이 참 훌륭하고 위대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하실 말씀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성경에서 아주 많은 기간을 아주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그분의 삶과 그분의 죽음까지를 기록해둡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12장부터 25장까지 장장 14장을 통해서 그분의 삶과 그분의 인격과 그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면, 우리가 볼 때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역사의 훌륭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처럼 보이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분에 대해서 별로 기록할 말이 없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은 성경의 단 몇 줄로 혹은 아예 기록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북이스라엘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여로보암 2세입니다. 여로보암 2세 때 북이스라엘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안보, 국방, 어떤 것 하나 빠질 것 없이 위대한 중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솔로몬 이후에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분의 치세에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 2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믿음에서 떠난 그런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로보암 2세에 대해서는 단 몇 줄로 요약하고 기록해둡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또 한 가지 성경에서 중요하게 하나님이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은 족보를 통해서입니다. 족보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의 물줄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누구를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 뻗어나가는지를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두 개의 대조되는 족보
창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족보는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족보와 오늘 읽은 5장에 나오는 아담-셋-에노스의 족보입니다. 가인의 족보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비참한 역사의 기록입니다. 반면, 아담-셋-에노스로 이어지는 이 족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자리를 지키고 예배 공동체를 지켜나간 하나님 자녀들의 승리의 기록입니다.
"아담은 일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 5:3)
원래 아담은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나서 아벨은 자녀 없이 하나님 나라로 떠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만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을 스스로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 성을 쌓고 하나님과 단절하고 지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담의 후손을 다시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을 스스로 떠난 가인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기록할 수 없었기에, 가인은 스스로 자기가 죄악된 길로 가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기에 하나님은 이 가정에 또 다른 아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셋입니다.
4장 말미인 4장 26절을 보면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로소 셋의 아들 에노스 때부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셋-에노스로 이어지는 이 족보, 그 이후의 후손들, 5장에 기록된 이들의 후손들은 예배 공동체를 성실히 지키며 하나님 앞에서 예배 드리는 것을 생명처럼 여기는 자들,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예배드려 그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진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예배를 존중하는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두 길의 차이점
가인의 후손들은 화려해 보입니다. 두 개의 역사의 흐름이 나타났는데, 이들의 대척점에 서 있던 가인의 후손들은 화려한 인생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힘을 자기들에게 최고의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힘이 있으면 최고입니다. 힘으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왕국을 건설합니다.
성을 쌓고 도시를 세울 만큼 그들은 위대한 문화를 발전시킬 능력도 가진 자들입니다. 악기를 만들어서 풍류를 즐길 수 있는 문화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겉보기에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해 보입니까?
그런데 예배 공동체에 살고 있는 사람은 별다른 재미가 없어 보입니다. 성을 쌓을 만한 기술도 없고 자신들의 힘을 자랑할 만한 힘도 없으며 풍류를 만들고 풍악을 울리고 악기를 만들 만한 그런 수완도 없어 보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가인의 후손처럼 사는 것이 아주 멋진 인생인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의 눈이 아닌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예배 드리며 하나님 자녀로 믿음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 땅이 아무리 오래 살고 아무리 세속의 권력을 누린다 하더라도 100년 남짓한 인생을 사는데, 그것도 건강하게 사는 인생은 몇십 년 되지 않는데 땅에서 그 권력과 그 물질의 향유를 누리느라 천국을 준비하지 못하고 사는 인생은 가장 불행하고 안타까운 인생이 아닙니까?
이 땅은 나그네처럼 흘러가는 인생입니다. 천국을 향해서 나아가는 나그네 인생길에서 주와 함께 동행하고 말씀 붙들고 살아가고 세상에서 좋아 보이는 것 잠시 잠깐 견디고 참고 살아가는 자들이 참으로 지혜로운 자들이라 믿습니다.
예배 공동체 성도들의 특징
오늘 5장에 기록된 사람들, 이분들은 그 자리를 굳게 지키며 믿음 생활을 성실하게 했습니다. 이분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져서 자손 대대로 몇천 년 동안 오랫동안 이렇게 이름이 남아 있을 줄 그들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믿음 생활하고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지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세속적 아름다움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해 두실 것입니다.
또한 오늘 성경의 저자는 예배 공동체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 두 가지를 두 사람을 통해서 깨닫게 해줍니다.
에녹: 자기부인을 통한 하나님과의 동행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1-24)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예배 공동체 성도들의 특징은 자기부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자기를 부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을 가지고 어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달리자 하는데 나는 쉬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쉬고 싶다는 내 생각을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동쪽으로 가자고 하시는데 나는 서쪽으로 가고 싶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서쪽으로 가고 싶은 내 생각을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과 동행하려면 자기부인이 우선입니다.
예배공동체에서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가 되려면 오늘도 자기부인을 해야 합니다. 에녹 같은 사람은 300년 동안 자기 부인을 성실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이 땅에 두지 않고 하늘나라로 바로 데려가셨습니다.
한 발은 예배 공동체에 두고 있는데, 또 다른 발은 세상에 두고 철저한 자기부인 없이 자기 욕망대로 살고 있다면 우리는 몸만 이곳에 나와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영혼이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가 되려면 오늘도 철저하게 말씀 앞에서 자기부인을 하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노아: 세상을 위로하는 자
"라멕은 일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 5:28-29)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위로하다', '안위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의 뜻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배 공동체는 세상을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성도들끼리도 서로 위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노아는 세상을 위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위로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는 악한 세상에서 희망을 주는 위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힘든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손을 잡아주는 위로자가 되어야 하고, 우리 성도들끼리도 쓰러져 있고 넘어져 있는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위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는가? 오늘 노아처럼 그 이름처럼 위로하는 자가 되고 있는가?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 창세기 5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믿음의 기준으로 역사를 기록하십니다. 세상적으로 위대해 보이는 여로보암 2세는 단 몇 줄로 기록되었지만, 평범해 보이는 믿음의 사람들은 족보에 길이 기록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무명의 용사로 살아도 하나님과 깊은 관계 가운데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해 두실 것입니다.
둘째, 예배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은 두 가지 특징을 가져야 합니다. 에녹처럼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과 노아처럼 세상과 성도들을 위로하는 삶입니다. 자기부인 없이는 하나님과 진정한 동행이 불가능하며, 위로하는 마음 없이는 참된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에녹처럼 자기 부인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노아처럼 손을 내밀어 이웃과 교회 안 공동체를 위로하는 하나님 자녀로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우리 이름은 하늘나라 생명책에 온전히 기록될 것입니다. 그런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오늘도 악한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