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칠해진 방주
창세기 6장
성경을 읽는 올바른 자세
성경은 과학책이나 역사책이 아니라는 명제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날에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계셨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역사의 현장을 역사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입증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만약 성경이 과학책이라면 가설을 세우고 이를 입증하기 위한 여러 실험적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과학적으로 보고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게 하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생각 자체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담백하고 깔끔한 한 문장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말씀하시므로 성경이 믿음의 책임을 확정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경을 역사책으로도 규정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성경이 역사책이라면 세상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중요한 비중에 따라 하나부터 빠짐없이 다 기록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건이나 사람들만 기록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을 때는 무언가 빠진 것 같아 보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믿음으로 읽는 책이지 역사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방주의 참된 의미
오늘 읽은 6장 말씀도 노아의 방주에 대한 기록입니다. 세상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 사실 유무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노아홍수가 과연 실제적인 사건인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홍수인가 국지적인 홍수인가, 노아의 방주는 과연 실제로 존재했는가, 존재했다면 어디에 있는가 등을 묻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사실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아의 방주가 기록된 이상 이미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역사적 사건이고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읽는 자세도 방주 자체의 유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방주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깨닫게 해주고 무엇을 알려주는지, 그 사실을 붙들고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생명을 살리는 방주
방주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너는 고페르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창 6:14)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 명령을 하시고 방주를 지으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작업과정 한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역청을 칠하는 과정입니다. 역청은 방수제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열심히 120년 동안 만들었는데 만약에 역청을 제대로 칠하지 않거나 아예 칠하지 않는다면 물에 띄웠을 때 물이 들어와서 금방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120년의 방주 만드는 수고는 다 한순간의 헛수고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주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공정은 역청을 칠하는 과정입니다.
카파르(כפר)의 영적 의미
여기 '칠하다'라는 단어가 무척 중요한데 카파르(כפר)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카파르의 원뜻은 '속죄하다', '사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청을 칠하는 것이 속죄하고 사죄하는 행위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요?
칠한다는 것이 속죄의 행위이고 사죄의 행위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출애굽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살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기 위해서 바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아홉 가지 재앙에도 바로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장자 죽음의 재앙을 준비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재앙을 피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양을 잡아라.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칠하라. 그리고 너희는 집안에 들어가 있으라.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문설주와 인방에 칠하여진 양의 피를 보고 건너갈 것이다." 이른바 유월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피는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고, 그 피의 공로로 그 집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든지, 그가 어떤 인격의 사람이든지, 그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피만 보고 죽음의 사자가 지나간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카파르 '칠함'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칠해진 방주
그러므로 방주에 역청을 칠하라는 이 단어에서 카파르를 사용하는 것은,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인격과 그들의 삶의 과거와 그들이 지금 생각하는 모든 것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역청 자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방주는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칠해져 있는 우리에게는 가장 안전한 구원의 공간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 아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아닌 세상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힘으로 자꾸만 자신을 꾸미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은 사망의 길이요, 죽음의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두 가지 삶의 방식
방주를 만드는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은 역청을 칠하면서 카파르 속죄와 사죄의 행위를 했던 사람인 반면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세상에 용사가 되고 명성을 얻기 위해서 살아갔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능력과 명성으로 그들의 외모를 칠하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필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의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4-5)
세상 사람들은 그 당시 방주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은 용사였고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외모를 '용사'라는 권위로 칠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대하게 명성을 내는 것으로 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면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계획과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위해서 방주를 준비하시고 역청을 칠한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칠해진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 그러면 너희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지 나는 돌아보지 않고 기억하지 않고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120년 동안 하나님의 외침과 노아의 간절한 광고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결론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칠해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칠해져 있습니까? 카파르 속죄하고 사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우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의 내면에서 외면까지 함께 그 안에 물들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언어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구원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 둘째 사망을 면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용사가 되고 명성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칠해져 있지 않으면 그들은 다 둘째 사망에 해를 당할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나 태어나서 육체가 죽는 것은 한 번 정한 죽음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을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기, 우리의 영혼은 둘째 사망에 해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카파르 속죄하고 사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아래 있기만 하면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세상 가운데 살아가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 전체가 그 안에 잠겨 있기를, 우리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칠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