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의 지혜
출애굽기 21장
갈등 너머의 이해
사람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면 갈등은 필연적으로 나타납니다.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라 하더라도 평생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성인들이 모여 있는 직장이라 하더라도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갈등이 왜 일어나느냐 이유를 찾는 것보다, 이미 일어난 갈등을 어떻게 풀어가고 해소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갈등을 해소하는 여러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방법 중 공통되는 것을 꼽으라면 바로 '입장을 바꾸어 보라'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속 썩이는 자녀들에게 "너도 나중에 커서 너 같은 자식 낳아서 한번 길러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는 네가 부모 입장이 되어 보면 지금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를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부릅니다. 역지사지의 본뜻은 '땅을 바꾼다'는 의미로, 상대방의 땅에 서서, 상대의 지평에서 생각해보면 그 사람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된다는 뜻입니다.
종에서 자유인으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역지사지를 실천하라고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출애굽했고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넜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출애굽했으나 내면은 여전히 종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종의 내면을 가진 채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시내산 아래로 불러 모으시고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 어디에도 자기 사랑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종은 자기 사랑에 탐닉하고, 종의 내면은 오로지 자기만 사랑합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백성들은 자기 사랑을 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 (출애굽기 21:1)
출애굽기 21장부터 23장까지는 하나님이 백성 앞에 세울 법규들을 구체적으로 일러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중 첫 번째 계명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출애굽기 21:2)
수많은 법규들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종에 대한 계명입니다. 소유권 분쟁이나 상해에 대한 법규도 많았을 텐데, 왜 하나님은 종에 대한 율법을 첫 번째로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종살이를 했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종으로 살아봐서 알지 않느냐,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변덕스러운 바로 때문에 짚도 없이 벽돌을 만들어야 했고, 감독관들의 매질을 당했으며, 때로는 먹을 것도 주지 않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눈물의 밤을 지새워야 했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제 가나안 땅에서 입장이 바뀐 자리에서 종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의 혁명적 계명
놀랍게도 이 계명은 종에 대한 규정이라기보다는 종 중심적인 내용입니다. 종을 몸값을 주고 샀는데도 6년 동안만 섬기게 하고, 7년째에는 몸값도 받지 않고 자유인이 되도록 규정하셨습니다.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출애굽기 21:5-6)
종이 영원토록 상전을 섬기는 것도 종이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6년 후 집을 나가는 것도, 죽을 때까지 섬기는 것도 모두 종이 결정합니다. 이런 종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 안에서 종과 자유인은 동등한 사람일 뿐입니다. 종이 종신토록 섬기기로 결정해도 상전 앞에서 맹세하지 않고, 재판장 앞에서 상전과 종이 동등한 자격으로 결정받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너희의 힘들었던 시절, 어려웠던 시절을 깨닫고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타락하지 않으려면 고생했던 시절을 기억하면 됩니다.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했던 그 시절을 기억한다면, 가나안 땅에서 부자가 되고 땅을 차지해도 타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종으로 살았던 어려운 시절을 잊어버리고 타락했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역지사지의 실천은 갈등 해결의 지혜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 할 때 진정한 화해와 평화가 가능합니다.
둘째, 과거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은혜를 깨닫는 길입니다. 힘들었던 시절을 기억할 때 오늘 누리는 자유와 평화가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법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는 사랑의 법입니다. 종과 자유인의 구별 없이 모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과거의 어려움을 기억하며 오늘의 은혜에 감사하고,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