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의 명분, 예배
출애굽기 5장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현실 사이의 갈등
젊은이들이 가장 급속하게 성숙해지는 곳은 군대입니다. 군대 환경이 과거보다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안락한 가정을 떠나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자유를 제한받으며 생활하는 것은 여전히 녹록지 않은 일입니다. 특별히 신앙을 가진 청년들에게 군 생활은 믿음이 단련되고 깊어지는 특별한 시간이 됩니다. 주일 예배 참석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음에도, 까다로운 선임병이나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드리러 가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눈에 보이는 압력을 극복해 나간다면, 그 과정 자체가 믿음을 성장시키는 귀중한 훈련이 됩니다. 믿음의 여정이란 본질적으로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적 긴장의 연속입니다. 이 긴장을 믿음으로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신앙은 성숙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동일한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 떼를 돌보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집트로 가서 바로를 만나라. 내 백성을 출애굽시켜라." 이 명령 앞에서 모세는 온갖 핑계로 거부했지만, 결국 우여곡절 끝에 형 아론과 함께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나는 입이 둔한 자"라며 주저하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웅변에 능한 아론을 동역자로 붙여주셨던 것입니다.
예배를 위한 자유, 출애굽의 진정한 명분
바로 앞에 선 모세와 아론이 전한 첫 메시지는 명료했습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애굽기 5:1)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절기를 지킬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선포하신 출애굽의 명분이었습니다. 출애굽의 핵심은 자유였지만, 그것은 단순한 해방이 아닌 예배를 위한 자유, 예배를 향한 자유였습니다.
430년간의 노예 생활로부터의 해방도, 가난과 억압으로부터의 탈출도 출애굽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죽고 왕조가 바뀐 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극한 이래로 박탈당했던 예배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출애굽의 본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를 드리도록 하시기 위해 그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예배가 출애굽의 유일무이한 이유였으며, 그 외에 다른 명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예배는 선택이 아닌 본질적 사명이며 거룩한 의무입니다. 430년 동안 강제 노역에 시달리며 예배의 자유를 빼앗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예배를 출애굽의 대의명분으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의 반응은 냉소적이었습니다.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출애굽기 5:4)
바로는 예배를 단순한 노동 기피, 게으름을 피우기 위한 핑계로 치부했습니다. 그의 눈에 예배란 생산성을 저해하는 쓸모없는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분노한 바로는 즉각 보복 조치를 취합니다.
"바로가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출애굽기 5:6-7)
짚 공급을 중단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료 조달과 벽돌 제작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벽돌 생산량은 이전과 동일하게 유지하라는 것이 바로의 잔혹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간이 남아돌아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감독들이 그들을 독촉하여 이르되 너희는 짚이 있을 때와 같이 그 날의 일을 그 날에 마치라 하며 바로의 감독들이 자기들이 세운 바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리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에 만드는 벽돌의 수효를 전과 같이 채우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 (출애굽기 5:13-14)
재료 공급은 중단되었으나 생산 할당량은 그대로였고, 이를 채우지 못하면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졌습니다.
예배의 본질과 예배를 방해하는 자의 운명
이러한 상황은 모세와 아론을 깊은 딜레마에 빠뜨렸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했고, 출애굽의 명분인 예배는 타협할 수 없는 본질적 가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거대한 장벽처럼 버티고 있었고,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권력 사이에서, 현실의 압제는 산처럼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마저 모세와 아론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기록하는 일을 맡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희가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출애굽기 5:19-21)
동족의 원망과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430년 동안 제대로 된 예배를 경험해보지 못한 그들에게 예배는 낯설고 추상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조용히 있었다면 최소한 짚은 받으며 살 수 있었을 텐데, 괜한 일을 벌였다"는 것이 그들의 불평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신앙의 갈등입니다. 예배는 내가 원할 때, 상황이 허락할 때 드리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깨뜨릴 수 없는 언약이며, 피할 수 없는 거룩한 명령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구별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되, 이날은 나와 함께 안식하며 교제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예배는 창조 질서에 근거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예배를 우리 존재의 본질로 인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상황이 허락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려야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시작점에서 예배를 강조하신 이유는 명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이 '예배하는 백성'임을 각인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예배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의 핵심입니다.
예배를 방해하는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역사가 증명합니다. 예배를 조롱하고 방해했던 바로는 결국 열 가지 재앙을 맛보았고,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으로 이집트 전역이 통곡으로 뒤덮였습니다. 예배를 경시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심판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출애굽의 목적으로 삼으시고,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신 후 그곳에서 성막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성막에서 레위기의 제사 규례를 선포하신 것도 예배가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예배는 하나님 백성의 존재 이유이며 양보할 수 없는 본질입니다. 출애굽의 유일한 명분이 예배였듯이,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궁극적 목적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창조 질서에 근거한 예배는 우리의 가장 숭고한 사명입니다.
둘째, 예배는 상황의 산물이 아니라 믿음의 결단입니다. 보이는 현실의 압박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입니다.
셋째, 예배를 방해하는 세력은 반드시 심판을 맞이합니다. 바로의 비참한 결말이 보여주듯,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는 그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예배로 문을 여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