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특강(11) - 입다의 비극과 에브라임의 불만 (삿 11:29-12:15)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사사기 11장 29절에서 31절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바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바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아멘.
오늘은 사사기 공부 열한 번째 시간입니다. 14번에 걸쳐 사사기 특강을 진행하는데, 열 번을 마쳤고 오늘 하고 나면 세 번 남습니다. 사사기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재미있는 것도 있고, 시간 차이가 지금보다 많이 나니까 '왜 이랬을까?', '그때 이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는구나'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양은 다 똑같고 또 비슷하다는 것도 느끼게 됩니다.
기드온 이야기가 사실 사사기의 중반부에서 핵심입니다. 기드온 이야기가 길게 나오고, 그가 남긴 나쁜 영향력과 유산들도 있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 중에 최악은 그의 아들 아비멜렉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그 이름을 가진 아비멜렉이 온 이스라엘 전역을 초토화시킵니다.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 됩니다. 결국 아비멜렉이 죽고, 그 이후에 새로운 사사가 일어나서 혼란기를 수습합니다. 그의 이름이 돌라였습니다. 그분은 자기 업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23년 동안 무너져 내린 이스라엘의 영적 질서를 세우고 동분서주하며 바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 그 토대 위에서 집을 지어야 하는데, 야일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만 짓습니다. 아들 30명을 낳았으니 부인이 많았겠지요. 그 아이들은 다 어린 나귀를 타고 다녔고, 각자가 자기 성읍이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그런 영적 타락의 시간이 오면서 또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때 우상숭배는 이전과 질이 다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우상이 보편화되었습니다. 한두 우상이 아니라 온갖 잡신들을 다 이스라엘에 가져다 놓은 그런 종류의 우상 숭배였습니다.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을 파셨습니다. 소유권을 이양하셨다는 말입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18년 동안 고통당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전의 공식에 의하면 기도하면 하나님이 바로 응답해 주셔야 하는데 거절하십니다. 하나님이 평소와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이시면 그 속에 하나님의 생각과 또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야 하는데, 그 눈치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행동으로도 보입니다. 우상을 다 제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입다라는 사람을 세웠는데, 그 입다는 인간적으로 보면 사실 보잘것없습니다. 길르앗이라는 사람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배척받았는데, 성경은 그 사람을 큰 용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가 큰 용사가 되는가, 세 가지 정도를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그가 부름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큰 용사 아니겠습니까? 둘째로, 그 사람 주변에 잡류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아비멜렉 주변에 잡류들이 모여든 것처럼 레킴(רֵיקִים)이라고 불리우는 텅 빈 사람들, 공허한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모여들었는데, 입다에게는 잡류들이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 정도로 이분은 자기 중심이 분명히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용사가 됩니다.
셋째, 이 사람이 결정적인 것은 암몬 자손의 왕과 논쟁을 했다는 것입니다. 암몬 자손의 왕이 "너희가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는 땅을 내놓아라. 그것을 찾으러 왔다"라고 하니까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민수기 20장, 21장 말씀을 근거로 성경적인 해박한 지식으로 사실관계 논쟁을 통해서 그 사람들이 잘못됐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신학적 논쟁도 이야기해주고 과거 300년 동안 이런 예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이분은 큰 용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쯤 되면 암몬 자손이 수긍하고 돌아가면 평화롭게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외교로 다 풀리고 해결됩니다. 그런데 암몬 자손이 돌아갑니까? 돌아가지 않습니다. 원래 싸우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불법으로 점거하고 차지하려고 왔습니다. 그래서 절대 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1. 여호와의 영과 입다의 서원
이제 전쟁입니다. 사사기의 공식을 보면 옷니엘에게도 그랬고 기드온에게도 그랬는데,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큰 전쟁을 하실 때 그 사람에게 '너는 사사다', '너는 이스라엘을 건져낼 구원자다'라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의 지점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신다'라는 말씀입니다. 29절에 나옵니다.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임하다'라는 말에 히브리어 '하야(הָיָה)' 동사를 썼습니다. 하야 동사는 '머물러 있다'라는 뜻입니다.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고 할 때는 여호와의 영이 그를 옷 입혔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야 동사는 옷니엘에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 그의 위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잠깐 왔다가 떠나가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는 것을 입다가 알까요, 모를까요? 압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평안을 주시는구나, 하나님 앞에 경배할 때 하나님이 오늘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내가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구나 하는 강한 확신이 듭니다. 지금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 국가의 명운을 걸고 이 사람이 출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했습니다. 입다가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당연히 압니다. 입다가 알고, 그리고 성경의 기자가 기록할 만큼 그 주변 사람들도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영과 함께 전쟁에 출격하면 승리는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 그랬습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여호와의 영 이외에 플러스 알파, 또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바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바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입다가 바로 전쟁으로 나간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를 다녔습니다. 다닌 이유가 무엇입니까?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서 다녔습니다. 나중에 또 나옵니다. 12장에 가면 나오는데, 함께 참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다닌 것입니다. 기드온이 삼백 용사를 모아 가지고 전쟁할 때와 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입다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마자 우선 사람을 모읍니다. 잘 보셔야 합니다.
1-1. 부적절한 서원
사람을 모으고 그다음 한 행위를 보십시오. 30절입니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우리는 이 서원의 내용에 대해서 많이 논쟁합니다. 사실 이 내용은 조금 뒤에 다루겠지만, 이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내용의 진위 여부, 이 내용의 해석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왜 서원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 지점에서 입다의 서원이 필요했겠느냐, 입다의 서원이 하나님께서 암몬 자손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는 데 과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다익선입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다 좋습니까? 사실 입다는 하나님의 영이 이미 그에게 임한 상태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한 상태,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가 두 가지를 더했습니다. 하나는 군대를 모집했고, 둘째는 서원했습니다. 서원이라는 행위 자체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서원하라고 했고, 서원 자체가 기도하다 보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과연 서원하는 것이 필요했겠습니까?
왜 서원했을까요?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불안했다는 것입니다. 많이 불안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긴 하는데 '이것만 가지고 내가 저 암몬 자손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매우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도 모으고 서원도 했습니다. 둘째,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입다는 지금까지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비주류였습니다. 저 아웃사이더 중에도 아웃사이더, 기생이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생은 노래하고 춤추는 기생이 아니라 매춘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형제들에게도 쫓겨나서 버림받고, 길르앗 사람들도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워낙 이 사람이 출중했기 때문에 이 사람을 지금 여기 세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입다라는 인물은 자기 역사의 중심에 한 번도 부름을 받은 적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과도한 감사입니다.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잘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감사하면 발이 공중에 한 50센티미터 정도 떠 있습니다. 너무 기쁘면 좌우를 분변 못하고 그냥 다 갖다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냥 오늘 하루만 살고 내일은 죽자 하는 사람들, 그런 유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두 가지 다 해당되었든, 1번이 되었든 2번이 되었든 그의 서원은 부적절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 한 분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충분히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이상 다른 것이 자꾸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셔서 이 광야를 건너가게 하고 홍해도 건너가게 하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자꾸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켰으면, 광야로 이끌었으면, 하나님이 광야 길을 책임지실 것 아닙니까? 어떻게 하시든지 어쨌든 광야는 농사도 짓지 못하고 길쌈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곳이니까 그곳에서 그들을 책임지실 텐데, 자기가 먼저 불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실 물 달라, 먹을 것 달라, 계속해서 달라 달라 합니다. 불안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고 구원받은 영광과 은총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데, 그다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텐데, "그런 것 필요 없고 다른 것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고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정말 은혜라고 한다면 나에게 돈을 주십시오. 은혜 따위 필요 없습니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그것이 내가 긴가민가하고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것 말고 나에게 돈벼락을 주시든지, 좋은 돕는 사람을 주시든지,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그래서 군대도 모집하고, 그것도 불안하니까 서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영적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1-2.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
이 사람 입다를 보면 "이렇게 바보 같아. 여호와의 영이 임했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단 말이야"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도 이런 인생을 계속해서 살고 있습니다. 불안하니까요. 다윗이 그랬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이 그 고백을 한 것은 왕으로서 왕궁에 있을 때가 아니라 광야를 전전할 때였습니다. 시편 23편의 고백이 "다른 것 필요 없다. 여호와가 나와 함께 하시면, 목자가 되시면 이 광야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박국 3장 17절, 18절을 보시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최악의 상황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입니다. 남유다가 망할 때 예언했습니다. 하박국은 그것이 이해가 안 되어서 "어떻게 저 악한 민족들이 우리를 칩니까? 하나님, 그것을 어떻게 허락하십니까? 악한 민족들로 하여금 우리를 삼키게 하십니까? 우리가 잘못한 것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저 악한 자들이 우리를 치게 놔두는 것, 또 그것도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항변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가 고백하기를 "아무것도 없어도, 아무것도 없는 진짜 최악의 상황이라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만 나는 기뻐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다 잃어도 하나님 한 분만 있으면 기뻐할 수 있는 그 신앙을 하박국이 고백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 중에 베드로의 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두 번의 신앙 고백을 하는데, 두 번째 신앙 고백은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16장 고백이고, 첫 번째 신앙 고백이 요한복음 6장 68절, 69절입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이 고백의 배경은 요한복음 6장이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그만큼 먹이니까 사람들이 놀라서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왕 삼으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먹고사는 것 걱정 없겠다, 고기 주십시오, 떡 주십시오, 빵 주십시오 하고 계속 따라다니니까 예수님이 그때부터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어도 죽었다. 이것을 먹어도 다 죽는다. 그러니 너희는 나를 먹고 나를 마셔야 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그 말씀은 말씀을 먹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합니까? 이해 못합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갔고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이것이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말씀 하나만 있으면 괜찮다는 말입니다. 떡 없어도, 고기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 입다는 여호와의 영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군대도 모집하고 또 서원도 하고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를 하는데, 이것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떻게 보이시겠습니까? 귀엽게 보시겠습니까? 아름답게 보시겠습니까? "넌 참 치밀하구나, 넌 참 단도리 잘하는구나" 이렇게 보시겠습니까? 믿음 없음입니다. 이것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기본적인 신앙 고백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내 삶으로 드러나고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을 익혀야 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은 필요 없고 여타의 다른 것들만 자꾸 요청하니까 그 신앙은 병든 신앙이요 문제 있는 신앙이 됩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세대이니까 그렇습니다.
2. 서원의 결과와 해석
이제 이 사람의 서원을 한번 보십시오. 31절을 보니까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끔찍하지 않습니까? '누구든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를 영접하러 오는 자를 내가 번제로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그 서원을 하고 전쟁하러 갑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32절을 보니까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가서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여호와께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다, 이기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 이겼습니까?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스무 성읍을 치고 또 아벨그라밈에 이르기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더라." 그렇게 콧대 높은 암몬 자손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크게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긴 것이 그의 서원 때문입니까? 군대 때문입니까?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까?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의 승리에서 그는 역사적 교훈을 배웠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시면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승리하게 하십니다. 서원은 필요 없었습니다. 이런 무모한 서원은 필요 없었고, 군대를 자기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들을 다 모아오는 것도 사실은 필요 없었고 의미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면 충분했습니다.
2-1. 딸이 나오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됩니까? 이겼으니까 그 서원에 대한 부담이 있습니다. 34절입니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그를 영접하니 그는 그의 무남독녀라." 딸이 나왔습니다. 개가 한 마리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소라도 막 뛰어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요즘같이 휴대폰 문자라도 할 수 있으면 아내에게 전화해서 "소를 풀어놓아라. 애는 집에 묶어 놓아라"라고 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개도 안 나오고 소도 안 나오고 딸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입다가 그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아아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엎드러지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이것이 누구 탓을 하는 것입니까? 지금 이 사람이 자기 탓을 해야지요.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겠다는 말입니다. 서원을 갚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여러 해석들이 있습니다. 과연 입다가 딸을 진짜 자기 서원대로 번제로 드렸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랬다라는 해석이 있고 그러지 않았다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랬다라고 하는 해석은 문자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또 해석들을 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인신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번제로 드리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딸을 평생 동안 성전에서 처녀로 봉사하고 섬기는 자로 보내버렸다는 말입니다. 성전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이 있었으니까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그쪽으로 평생 헌신하도록 보내버렸다고 해석합니다. 주로 유대인 랍비들이 그렇게 해석합니다.
보십시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딸이 수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것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놓아 주소서 나와 내 동무들이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슬피 울겠나이다 하니." 이 '처녀로 죽음'에 대해서 각자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곧장 번제로 죽음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 달의 여유를 달라고 했다는 해석이 있고, 반대쪽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처녀로 늙어 죽는 것을 의미한다, 평생 결혼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팽팽하게 엇갈립니다.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을 허락하여 그를 보내니 그가 그의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그의 처녀임을 슬피 울더니 두 달이 지난 후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매." 39절 후반절을 보니까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행하니라'는 말이 참 애매합니다. '번제를 드리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행했다'는 말 속에 번제라는 말이 없으니까 딸을 먼 곳으로 보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분들은 또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즉 평생 동안 처녀로 성전에서 섬겼을 것이다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관습이 되어 이스라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성경 구절이 또 하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여기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입다라는 사람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이고 삼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높게 평가하는 것을 보면 인신제사는 하나님이 절대로 막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상숭배보다 더 심하게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몰렉에게 자기 아들을 데려가서 불로 지나가게 하는 자들, 예레미야서에 보면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금하신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그 인신제사를 성경을 그토록 잘 아는 입다가 과연 했을까, 여기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지금까지 계속 논쟁입니다.
저에게 "너의 입장은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입다 편에서요. 친구들과 헤어지는 기간 두 달 동안 저 먼 산으로 가서 평생 동안 처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입다가 암몬 왕과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을 보면 구약성경을 통달하고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것을 이런 식으로 했을까요?
2-2. 서원 자체가 문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서원의 내용이 아니라 서원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임했는데 거기에다가 왜 자기 의의 서원을 끼워 넣느냐 하는 것, 그 문제가 더 큰 문제입니다. 이 내용 자체에 빠져서 본질적인 것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절대로 거기에 물타기하면 안 됩니다.
서원에 대해서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있습니다. 신명기 23장 21절을 보시면 신명기는 구약의 율법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23절입니다.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전도서 5장 5절을 보시면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구약의 율법들은 서원에 대해서 반드시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원을 무를 수 있는 조건은 없는가? 있습니다. 민수기 30장에 이런 한정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딸아이가 시집가기 전에 집에서 뭣도 모르고 서원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우리 집 재산 제가 다 바치기로 서원했는데요. 하나님 앞에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무슨 소리야? 안 돼"라고 하면 그것은 무효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듣고도 "네가 하나님께 서원했으면 해야지"라고 하면 그 서원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 여성이 시집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결단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결혼하면 우리 수입의 10분의 9를 하나님께 드리겠다." 남편하고 의논도 안 하고 그리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편이 "무슨 소리야? 안 돼"라고 하면 무효입니다. 안 해도 됩니다. 민수기 30장에 나오는 율법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하나님께 약속했으면 해야지. 합시다. 우리 10분의 1로만 삽시다"라고 하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원을 무를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서원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간절하니까 기도하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린 서원의 기도가 우리 가정과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는 무모한 서원이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무를 수 있게 해주셨다는 뜻입니다. 이해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이 기도, 네 입에서 나온 모든 서원, 지금 이 사람이 무모한 말을 한 것입니다. 사실 입다가 무모하게 말한 것까지 하나님이 "너 말했으니까 다 지켜"라고 돈을 가지고 끝까지 추심하는 악성 채권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무를 수 있도록 얼마든지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입다가 서원했으면 지켜야 하는 것은 옳지만, 딸이 나와 버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벌을 저에게 달라고, 지키지 못하는 벌을 내가 받겠다고. 그리고 내 딸은 미안하지만 그냥 그대로 달라"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면 안 됩니다. 서원이라는 것이요. 그리고 하나님은 공동체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서원을 무를 수 있는 방법도 이미 율법에 지정해 두셨습니다. 그런데 입다가 지나치게 성급했습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면 됩니다.
또 한 가지 오늘 우리에게로 가져와 보면, 예를 들어 교회가 좀 큰일을 합니다. 예배당을 짓는다, 무엇을 한다 하면 이제 헌금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인들 중에 교회가 큰일 한다 할 때 마음이 안 쓰이는 분이 있습니까? 교인이라면 쓰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무언가를 한다는데 그러면 나는 내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을 고민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가정의 일치입니다. 의논을 해야 합니다. 가정의 부부가 자녀들하고도 그 공동체가 같이 의논을 해야 합니다.
혼자 막 은혜 받아 가지고 갑자기 1미터, 2미터 날아오르면서, 갑자기 기도하다가 필 받아 가지고 다 갖다 바치겠다고 갖다 내버리고 작정해 버리고, 이러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큰일 납니다. 왜냐하면 지금 입다의 서원은 자신의 것 가지고 한 것이 아닙니다. 딸의 생명을 가지고 한 것입니다. 딸의 인생을 걸고 한 것입니다. 왜 자기 것을 겁니까? 왜 남의 것 가지고 이야기합니까? 가정의 재산은 나의 재산뿐 아니라 공동의 재산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도 가정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비상금을 30년을 모았다면 그것을 털어 드리는 것은 누가 뭐라 합니까? 그것을 털어 드리는 것은 아무도 이야기 안 합니다. 잘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왜 내 아내 비상금을 털까요? 그러면 안 됩니다. 왜 집을 걸까요? 그것은 가정의 일치가 있어야 합니다. 서로 간에 일치해야 합니다. 딸이 서원했는데 아버지가 "안 돼"라고 하면 못하는 것이라고요. 하나님이 그것을 안 받습니다. 하나님이 째째하게, 유치하게, 지독하게 그것까지 끝까지 추심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을 잘 기억하시고, 입다의 서원의 관계를 보시고, 일치가 중요하구나, 가정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구나, 이것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봤습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입다가 서원한 대로 지켰으니 그의 믿음이 대단하도다"라고 하시는 분도 봤습니다. 그것도 잘못된 해석입니다.
2-3. 성령 충만과 인간의 그릇
그런데 우리가 또 한 가지 여기서 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는데, 이것은 신학적 질문입니다. 입다가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이 이런 엉뚱한 말을 할 수 있는가? 즉 성령 충만한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 이런 이상한 얼토당토않은 무모한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할 수 있습니다. 입다를 보니까 이런 식으로 무모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셔서 그 영이 우리를 지배하시는 능력이 되어도, 내가 하나님의 영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함께 동역하는 관계이지, 마치 내가 신들림처럼 나의 자아와 내 생각과 내 판단력이 하나도 없고, 마치 엑스타시 상태처럼 하나님의 영이 나를 이끌면 나는 그 영에 의해서 로봇처럼 조종당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제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태초부터 계셨고, 그분 자체가 말씀이셨고, 알파요 오메가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완벽해야 합니다. 완벽했습니까? 자기들끼리 막 싸웠습니다. 누가 크냐고 자기들끼리 막 욕도 하고, 가룟 유다는 돈궤에 손 넣어서 훔쳐 가고 막 그랬습니다.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과 동등되신 그 예수님과 함께하는데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수용할 수 있는 인격이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영적인 인격이요. 하나님이 함께하셔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그래서 직분이 있는 분들, 신앙생활 오래 하신 분들, 목회자들, 중직자들이 이상한 행동 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셔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분이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끝낼 일이 아니라, 내가 어느 순간 기도하다가 하나님 은혜를 받았다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 은혜를 매 순간 내 마음에 담을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지속적으로 계속하셔야 합니다. 이런 엉뚱한 무모한 말을 하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하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천국 가는 날까지 계속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혼자 가기 힘드니까 가족이 함께 가고,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함께 세워져 가고,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3. 에브라임의 불만과 내전
이제 12장으로 넘어가면 전쟁이 끝났습니다. 암몬 자손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12장 1절을 보시면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서 북쪽으로 가서 입다를 찾아갔습니다.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어디서 좀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에브라임 사람들을 언제 보았습니까?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에 또 찾아와서 기드온을 협박했던 사람들입니다. 사사기 8장 1절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똑같습니다.
그때 에브라임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있습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입다도 길르앗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길르앗 사람은 므낫세 지파의 한 가문입니다. 역시 이 사람도 므낫세 지파입니다. 므낫세 지파가 이스라엘 지도, 열두 지파 땅 분배받은 것을 지도로 딱 펴놓고 보면, 요단강을 기준으로 요단강 동쪽이 있고 요단강 서쪽이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요단강을 기준으로 왼쪽, 오른쪽이 있습니다. 오른쪽이 요단 동쪽, 왼쪽이 요단 서쪽입니다. 기드온은 요단 서쪽에 있었던 사람이고, 입다는 요단 동쪽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므낫세 반 지파, 므낫세 반 지파라고 합니다. '반'이라는 것이 2분의 1이라는 뜻입니다. 역시 므낫세 지파입니다.
3-1. 에브라임의 선민의식
그런데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누구의 아들입니까? 요셉의 아들입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에게 두 아들을 데리고 축복 기도 받으러 갔을 때, 아버지가 손을 거꾸로 맞춥니다. 큰아들이 므낫세인데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어버립니다. 요셉이 "아닙니다. 아버지, 잘못됐습니다. 아버지 눈이 어두워서 그렇습니다"라고 하니까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나도 안다. 가만히 두라"고 하시고 끝까지 해버립니다.
그때부터 에브라임은 선민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에브라임 지파에서 여호수아가 나지 않습니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탁월한 지도자 아닙니까? 그러니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그런 특별한 자기 중심적인 선민의식이 있습니다. 게다가 여호수아서 18장 1절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이 그들 앞에 복종하였더라." 실로에 회막이 있었습니다. 실로라는 장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가나안 일곱 족속을 내쫓고 그곳을 차지했을 때 그때의 영적 중심지였습니다. 거기에 회막, 성막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실로가 있었던 곳이 에브라임 지파의 지경입니다.
그러니까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우리 지파에서 여호수아가 나왔고, 우리는 므낫세보다 우월한 지파고 축복받았으니까, 또 우리 지파 경내에 실로라는 성소가 있다"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미디안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니까 거기에 시비 걸었고, 이제 입다라는 기생의 아들이, 그것도 므낫세 지파에서 나왔는데, 므낫세 서쪽에서 하나 나오더니 이제 므낫세 동쪽에서 하나 나와서 또 이스라엘을 구원하니까 약이 올라 죽는 것입니다. 못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브라임입니다.
에브라임의 협박의 강도가 세집니다. 처음에 기드온과 다툴 때는 크게 다투었는데, 지금은 불질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너와 온 집을 다 협박합니다. 기드온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부드럽게 넘어갔습니다. 잘 달래서 넘어갔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달래서, 추켜세워서, 명분을 세워서 보냈습니다.
3-2. 입다의 대응
그런데 입다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딸 문제로 지금 입다에게 큰 일이 있습니다. 진짜 번제를 드렸든지 아니면 저 산으로 내보냈든지, 지금 입다는 제일 먼저 뛰쳐나온 것이 그 집 개가 아니라 딸이었다니까요. 지금 이런 상태입니다. 입다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입다라는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저 밑바닥에서부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입다는 투쟁적인 인물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사실관계를 밝히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 참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소견이 좁구나, 또 질투심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잘하면 칭찬해 주면 되지 않습니까? 다 요셉 자손 아닙니까? 에브라임이나 므낫세나 또 다 이스라엘 지파 아닙니까? 누가 나오든 어느 지방에서 지도자가 나오든 그분이 나와서 나라를 잘 인도하면 도와주고 협력하고 그러면 되는데, 그것을 가지고 가서 다 불태워 버리겠다고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을 보면 두 가지가 입증됩니다. 아까 우리가 입다가 여호와의 영이 임하고 난 이후에 군대를 모집하러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때 에브라임 자손들에게도 가서 군대를 보내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이 어떻게 했습니까? 거절한 것입니다.
3절입니다. "내가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생명을 걸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기드온과 다릅니다. 대응 방식이 다릅니다. 그러면 이쯤 되면 에브라임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미안하다고 해야 합니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만하게 보고 다 기드온 같을 줄 알고 협박했는데, 입다는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밝히는 사람이고, 지금 입다는 자기 집안 딸 문제 때문에 뭐 하나 걸리기만 하면 뺨 한 번 때리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굉장히 지금 격앙되어 있고 심리 상태가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인물 입다를 잘못 건드린 것입니다. 이제 이것이 내전으로 이어집니다.
4절입니다.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았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입다가 자기 집안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에브라임과 싸웁니다.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또 말이 문제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더라."
길르앗 사람들이 므낫세 지파의 한 족속인데, 그들이 한 지역 길르앗이라는 지역에 또 살고 있었습니다. 길르앗은 지명 이름이기도 하고 므낫세의 한 가문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너희는 왜 므낫세 지경에 들어가서 살지 않고 따로 나와서 한 도시 지역을 이루고 사느냐? 너희는 도망자들 아니냐, 잡족들 아니냐, 난민들 아니냐"라고 건드린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입다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평생 들어왔던 말입니다. 주류 사회에 속하지 못했던 입다.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자기 배다른 형제들에게 매일 들었던 말입니다. 그래서 쫓겨난 입다입니다. 기분 나쁩니다. 항상 그렇게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에브라임 지파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 박살 내겠다 하고 전쟁한 것입니다.
3-3. 쉽볼렛과 십볼렛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강 나루터를 장악하고 에브라임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이제 에브라임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을 이렇게 했습니다. 6절에 보니까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שִׁבֹּלֶת)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סִבֹּלֶת)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쉽볼렛'은 '시냇물'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요단강 나루터입니다. 급류, 탕류, 흐르는 물을 통칭해서 그냥 쉽볼렛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우리가 경상도 사람하고 서울 사람 구별하는 것이 '쌀' 해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너 쉽볼렛이라고 해봐"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이게 뭐냐"라고 물은 것입니다. 지금 이 흘러가는 물이 뭐냐고요. 그러면 이 사람이 이것이 흘러가는 시냇물이니까 발음대로 하면 쉽볼렛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 지파, 그 지역 사람들은 이 '쉬' 발음을 못하고 십볼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볼렛이라는 뜻은 '무거운 짐'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첫 자가 다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발음하면 므낫세 지파 사람들은 금방 알아들으니까 그 자리에서 죽였는데, 4만 2천 명이나 죽인 것입니다.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4. 교훈과 마무리
4-1. 일하지 않으면 입 다물라
우리가 여기서 한두 가지 정도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먼저 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 이들은 너무 나갔습니다. 사실 과거 기드온이 전쟁에서 이기고 왔을 때도 한 번 시비 걸었고, 지금 여기에도 이랬습니다. 참여하지 않습니다. 온몸을 다 던져서 민족의 아픔에 함께 동참해서 구원 역사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입만 냅니다. 일하지 않고 입을 댑니다. 일하지 않고 "왜 너는 나를 동참시키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그것도 실패하면 어떻게 할까요? 손가락질하겠지요. "기생의 아들이, 잡족 출신이 그러더니 저렇게 됐다"고 손가락질하겠지요. 그런데 성공하니까 "왜 우리를 대우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교회 일도 보십시오. 손에 흙 묻히고 땀 흘리고 수고하고 애쓰는 일, 그것 하는 사람 따로 있고, 그 하는 사람에게 입 대고 "왜 일 이따위로 하느냐"고 하고, 뒷짐 지고 다니는 사람 따로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다 에브라임 지파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일을 안 하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일을 안 하면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마음에 어떤 생각을 하든지 그렇습니다. 주방에서 설거지 한 번 한 적이 없고, 밀대 들고 주방 바닥 청소 한 번 한 적 없고 밥 한 번 한 적 없는데, "음식이 쓰니, 싱겁니, 짜니" 이런 말을 왜 합니까? 그냥 주면 먹으면 되지요. 마음에 안 들면 안 먹으면 됩니다.
교회 일이라는 것도 그렇고, 지금 여기 국가가 함께 어려움을 겪는 데 동참하지 않고,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하니까 그들이 어떻게 됩니까? 마지막에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잠언 29장 1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자주 책망당합니다. 이것이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고 목이 굳은 사람은 하나님이 불현듯 별안간 갑자기 심판해 버리면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처음에 물 없다고 막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물 주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탁 터져 나오게 하셔서 주셨습니다. 또 먹을 것 없다고 막 원망할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도 주시고 메추라기도 막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두 번, 세 번 반복되니까 성경은 어떤 식으로 말합니까? "여호와께서 들으셨더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서운 말입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셨습니다. 듣다가 마지막에 어떻게 하십니까? 불뱀을 풀어버립니다. 원망하니까 불뱀이 나와서 물어서 온몸에 독이 퍼져서 죽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습관이 중요합니다. 말 습관이요. 일 안 하면서 일하는 사람 비판하고, 그러면서 나는 행동하지 않으면서 내 입만 가지고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군림하려고 하는 태도, 이런 태도는 굉장히 악한 일입니다.
4-2. 심판은 여호와께 맡기라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여기 내전이 일어나서 동족을 4만 2천 명이나 학살하는 것은 과연 옳았습니까? 입다의 태도, 길르앗 사람들의 태도는 과연 옳았습니까?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심판의 칼날이었습니까? 이들이 한 일이요. 그것은 또 아닙니다.
입다는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평정심을 잃었습니다. 서원으로 인해서 자기 딸 문제로, 그리고 평소에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콤플렉스를 에브라임 사람들이 그 입바른 소리로 자극했습니다. 그것이 한꺼번에 폭발해 나온 것입니다. 그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해 나와서 사람을 이만큼, 4만 2천 명이나 죽여 버렸습니다. 이것은 과연 옳은 일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입니까? 바른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어떻게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심판은 여호와께 맡겨야 합니다. 판단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수 갚아주시는 방법이 다양합니다.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이 말하는 원수 갚는 방법은 원수보다 나를 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원수 앞에서 하나님이 진수성찬 차려주시고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다윗의 원수 사울 앞에서 하나님이 다윗을 더 잘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를 왕 삼아 주셨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원수 갚아주시는 방법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를 죽여야, 내 손으로 죽여야...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을 때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물병만 갖고 왔습니다. 그를 칼로 죽여야 원수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들어서 더 탁월하고 더 위대하고 더 좋은 일에 사용하시면 그 원수가 얼마나 배가 아프겠습니까? 그것이 진짜 원수 갚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원수 갚기 위해서 골몰하고 내 손에 피를 묻히면 나 또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입다는 자기 콤플렉스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서 이런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이것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다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군대를 모집했습니다. 거기에 에브라임이 응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입다가 서원했습니다. 그 서원의 결과 딸을 잃었습니다. 딸을 보냈든지 죽었든지 어쨌든 그것을 전부 다 에브라임 지파에게 분풀이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올라가 보면, 그가 여호와의 영으로만 만족했더라면, 군대 모집하지도 않았고 서원하지도 않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오늘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족이 붙고, 거기에 또 다른 것이 붙고, 거기에 여타의 것들이 다 붙는 순간, 거기에 대한 대가는 내가 치러야 합니다. 입다처럼요. 거기에 대한 결과는 내가 지고 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 것 하지 맙시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신앙생활 할 때는 정말 깨끗하고 담백하게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내 신앙의 모토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4-3. 입다 이후의 사사들
입다 이후의 사사들을 보시면, 8절입니다. "그 후에 베들레헴 사람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9절입니다. "그에게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이 있었더니." 60명입니다. 자녀가요. 부인이 엄청 많았겠지요. 타락한 것입니다. "그 딸들은 출가시키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외부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밖으로' 시집보내고 '밖에서' 데려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방 결혼입니다. 엉망입니다. 이제 입다 이후에 내전까지 일어났으니까 그 상처가 오죽했겠습니까? 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습니다.
11절입니다. "그 후에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나." 그런데 10년 동안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죽었습니다. 참 이것도 허무한 인생입니다. 그 후에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사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귀 70마리를 탔습니다. 야일을 흉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야일보다는 좀 못했습니다. 성읍 30개는 이 사람이 못 차지했으니까요. 야일은 하봇야일이라고 촌락까지 구성했는데, 이 사람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야일을 흉내는 냈으나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사사들 이야기가 정리가 되고, 이제 마지막 사사 비극적인 사사, 희노애락을 다 경험했던 삼손 이야기가 다음 주부터 펼쳐집니다. 오늘 이 이야기 잘 기억하시고,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인생이 되겠다, 이것만 잘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은혜로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군대를 모으고 딸을 걸고 서원까지 했던 입다처럼, 우리도 하나님 말고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많이 외치고 있습니다. 사람도 필요하고 물질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하고, 등등의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부귀권세, 영화, 권력, 모든 것 다 필요하다고 외칩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 다 없어도, 하박국의 고백처럼, 베드로의 고백처럼, 여호와 한 분으로만 만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원하고 구했던 그 군대로 인하여, 내가 걸고 서원했던 딸 문제로 인하여, 민족의 내전이 일어나고 심각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났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버지, 오늘 우리는 입다처럼 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릴 수 있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왔던 평생의 상처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 다스리고 해결하도록 도우시고, 이것이 밖으로 터져 나와서 공동체를 핍박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피비린내 나는 여러 가지 살육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입다처럼 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