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특강 12 - 마노아의 가정과 삼손의 출생 (삿 13장)
사사기 13장 5절 말씀입니다.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아멘.
사사기 공부가 14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에 오늘 하면 이제 두 번 남습니다. 그중에 삼손 이야기가 오늘과 다음 시간까지 두 번에 걸쳐 진행됩니다. 사사들의 이야기를 보면 그 사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 특징이 있습니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고 시대적 상황도 있고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들도 그 안에 있었고 또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들도 역시 그 속에 존재했었습니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암담한 상황들, 또 영적인 문제들을 우리가 사사기 말씀을 통해서 계속 보고 있습니다.
특히 삼손 이야기는 13장에서부터 16장까지 길게 걸쳐 있습니다. 할 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은혜가 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문제가 많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오늘 우리가 함께 볼 이야기는 삼손의 가정 이야기입니다. 삼손의 아버지 이야기, 그 어머니 이야기, 그리고 삼손이 출생하는 이야기까지를 오늘 13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1. 입다 이후의 이스라엘
삼손 이전에 입다 이야기를 우리가 한번 정리해 봐야 합니다. 입다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기생의 아들 출신입니다. 기생이 길르앗에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생이라고 하면 일반적인 기생도 있는데 매춘부 출신의 어머니를 둔 아들입니다. 그러니 본처의 자식들에게 차별도 많이 받았고 또 이웃 사람들에게 그 지역 사람들에게 업신여김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사람들이 그를 찾는 걸 보면 이분은 용맹스럽고 뛰어난 인재였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큰 용사인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는데 우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람한 자들에게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특별하고 탁월하게 제대로 알고 있었고 이 말씀을 적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입다를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했는데 서원을 했습니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서원뿐만이 아닙니다. 이분이 군대도 모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면 충분한데 하나님께서 사람도 붙여 주실 것이고 또 하나님께서 굳이 서원하지 않아도 그를 세워 주실 텐데 이 서원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서원 그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영, 충만한 하나님의 영을 신뢰하지 못한 것, 믿지 못한 것이 사실 그에게는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그 대가를 다 치르게 됩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전쟁하지요. 내전입니다. 4만 2천 명이 죽습니다. 결국 그가 암몬 자손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지만 동족들과 전쟁에서 4만 2천 명이 죽어 나가는 큰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결국 그의 성공은 성공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성공은 성공이 아니라 사사 시대의 불행한 한 단면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2. 40년의 블레셋 치하
2-1. 반복되는 악의 순환
그렇다면 입다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을까요? 잘 살았을까요? 분열의 상처를 잘 극복하고 봉합하고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회복되었을까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1절을 한번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다시'라는 말이 나오니까 가슴이 철렁합니다. 악을 행했습니다. 사사기에서 악을 행했다는 것은 한 가지로 수렴된다고 했습니다. 다양한 도덕적인 악도 많으나 그런 종류의 악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 악을 행했다는 것, 사사기에서의 악은 우상숭배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결국 이들이 우상숭배의 죄로 또 돌아갑니다. 다시 악을 행합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이제 넘겨 주셨습니다. 누구에게요? 블레셋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13장까지 오는 동안 하나님께서 파셨다는 이야기, 넘겨 주셨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40년은 가장 긴 기간입니다. 이전에 드보라가 활동했던 시절에 가나안 왕 야빈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셨을 때 그때가 20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입다가 출연하기 전에 암몬 자손의 손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파셨을 때 그때가 18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40년입니다. 무려 두 배의 기간입니다.
2-2. 부르짖음이 없다
그런데 사사기의 전형적인 방식이 반복됩니다. 죄짓고 심판하시고 심판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부르짖고, 부르짖으면 사사를 보내시고. 그런데 이 삼손 이야기에서 나오는 특징이 있는데 부르짖음이 없습니다. 부르짖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이것은 우리가 좀 생각을 해 봐야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똑같은 패턴 가운데 있었습니다. 죄짓고 심판당하고 회개하고 그다음에 사사를 통해서 구원해 주시고. 그런데 부르짖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지금까지 공식에 의하면 없어야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삼손이란 사람을 마노아의 집에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부르짖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삼손 이야기가 다른 사사 이야기와 굉장히 차별화되고 다른 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짓을 보면 우리가 구약의 한 구절, 신약의 한 구절을 좀 보셔야 되는데 잠언 26장 11절과 베드로후서 2장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한마디로 똑같은 죄를 또 짓고 또 짓고 반복하는 자들은 개돼지와 같다는 말이지요. 똑같은 죄를 계속 반복합니다.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습니다.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우상숭배했습니다. 그래서 또 이방 민족들의 압제와 핍박을 받습니다.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것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철저하게 돌이키고 회개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사사기 2장에서부터 그 전조를 다 봤습니다. 사사기 2장에서 나오는 사건, 우는 자들 보김, 보김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너희들 왜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잔당들을 제거하지 않느냐? 왜 가나안 일곱 족속과 블레셋을 제거하지 않느냐?" 책망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드렸습니다. 울었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떠나갔습니다. 자기들도 각자 자기 일터로 다 돌아갑니다.
울고 회개하고 제사드렸으면 그러면 나가서 돌이켜서 회개했으면 삶을 살아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사기에 흐르고 있는 그들의 영적인 문제였고 시대 정신이었습니다. 울기는 하는데 예배는 드리는데 형식은 다 있는데 그들의 삶이 하나도 받쳐 주지 않는 그런 상황. 그러니 이들이 개돼지와 같을 바 똑같은 것 아닙니까? 다를 바가 무엇이 있습니까? 똑같습니다.
2-3. 한 세대를 삼킨 문화
이제 하나님은 40년 동안이나 블레셋에게 내어 줍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내어줬다면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안 했습니다. 부르짖고 회개했으면 하나님이 나타나서 이전처럼 하나님이 "이제는 너희가 나에게 부르짖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씀이라도 하실 텐데 회개도 하지 않고 부르짖지도 않고 어떤 일도 하지 않으니 40년이 그냥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40년이라는 기간이 어느 정도 긴 기간일까요? 보통 이전에는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았습니다. 왜냐하면 서른쯤 되면 시집장가 가서 자식을 낳으니까 한 세대의 사이클이 도니까 한 아이가 태어나서 30년쯤 되면 가정을 이루니까 한 세대를 30년쯤 잡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세대의 폭이 조금 더 넓어졌지요. 서른에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 가정이 많이 없으니까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그럼 40년을 한 세대라고 잡아 봅시다. 그러면 태어날 때 블레셋의 압제를 받는 상황이었다면 장가갈 때까지 시집 가서 아이 낳을 때까지 여전히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40년이 얼마나 긴 기간인지, 태어나 보니 블레셋 치하였는데 내가 결혼할 때도 여전히 블레셋 치하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블레셋의 문화와 블레셋의 학력과 블레셋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그들 속에 다 들어와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나라가 독립한 지 얼마나 됐습니까? 일제 강점기에서 1945년도에 독립했습니다. 80년입니다. 올해가 독립 80년입니다. 광복 80주년이라고요. 그런데 과거에 일제 강점기 시절에 청년 시대를 살았던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 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아직 우리 문화 속에는 일제의 문화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이 땅에 뿌리고 간 저들의 문화가 여전히 우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40년 동안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말은 사람들이 전체가 다 블레셋의 문화 속에 푹 절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블레셋의 다곤신을 섬기는 것이 그들에게는 일상이었고 블레셋 사람들의 점성술이 그들에게는 학문이었고 그들의 언어가 배워야 될 학교의 정식 과목이었고 그렇게 그냥 40년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부르짖지 않았나요? 왜 기도하지 않았나요? 그냥 그렇게 너무 오래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부르짖지 않아도 기도하지 않아도 삼손이라는 사람을 마노아의 집에 허락해 주셨습니다.
2-4. 회개 없이 오신 구원
이 똑같은 패턴이 언제 발견됩니까?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때 발견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예수님은 삼손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완벽한 구원자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사람들이 회개했습니까? "메시아 보내 주세요" 하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부르짖어서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 주신 것 아니잖아요.
남유다가 기원전 586년도에 망하고 약 600년 이상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그대로 살았습니다. 디아스포라로, 본토에서도 그냥 죄짓고 살았습니다. 주인이 계속 바뀝니다. 앗시리아에서 바벨론으로,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페르시아에서 알렉산더 제국으로, 알렉산더 제국에서 분열 왕국으로, 그 이후에 로마까지 주인이 계속 바뀌는데도 이 사람들은 식민지 치하에 600년 이상을 살면서도 회개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처럼 회개하지 않는데 40년 동안 이들이 그냥 가만히 있으니까 하나님이 도저히 못 견뎌서 한 집에, 한 특별한 사람의 집에 삼손이라는 구원자를 이 가정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2-5. 삼손의 진짜 사명
그러면 삼손의 사명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삼손의 사명에 대해서 좀 깊이 생각해 보셔야 되는데 삼손이라는 사람의 악행을 우리는 다 알고 있고 결론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라는 사람의 시대적 사명,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이냐? 지금껏 이렇게 40년 동안 블레셋 문화에서 흘러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꾸로 역류시켜서 이 시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 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삼손의 사명입니다.
진짜 지도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시대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를 다시 하나님의 시대로 바꾸어내는, 물줄기를 완전히 바꿔내는 자가 진짜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흘러가 버리면, 그 속에 파묻혀서 흘러가 버리면 그것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냥 필부일 뿐, 그냥 평범한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은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 삼손은 그 시대적 사명을 감당했는가? 결과적으로 우리는 결론을 아는데 감당했습니까?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블레셋 문화에서 그냥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냥 그대로 살았습니다. 마지막에 원수 한 번 갚은 것이 답니다. 그러면 삼손은 지도자로서 실패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3. 시대를 거스른 가정
3-1. 마노아의 등장
이런 상황을 보고 우리는 2절부터 또 보겠습니다. 2절에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었다.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함으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마노아라 하는 사람이 있고 그의 아내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니 출산하지 못하지요. 당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시대 안에서 지금 이 사사 시대의 흐름 안에서 지금 이 사람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사람들은 얘기합니다. 저주받은 집안이라고요. 왜냐하면 그 시대 사사 시대 시대 정신이 어떻습니까?
기드온 아들 70명입니다. 첩까지 두고 서자까지 뒀습니다. 사사 야일 아들 30명입니다. 작은 나귀를 다 타고 다녔습니다. 성읍까지 각자 다 분양받아서 하봇야일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압돈이라는 사사는 아들 40명과 손자 30명, 70명이 살았습니다. 그 정도로 사사들까지 전부 다 다산이 축복이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면 자녀를 70명을 낳고 30명을 낳고 40명을 낳으려면 아내가 몇 명이나 돼야 됩니까? 첩이 셀 수 없이 많았다는 것 아닙니까? 다산이 축복이라고 여겨지던 시대 정신이니까요. 특히 블레셋 치하에서 살면서 이방 민족의 문화 가운데 사는데 이 사람들은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한 6개월 살았는데 임신이 안 되면 갈아치우는 것이지요. 그냥 그래도 그것이 죄가 됩니까, 안 됩니까? 사사도 그렇게 사는데 그 위대하신 기드온께서도, 금 에봇을 남기신 기드온께서도 그렇게 하셨는데 나 같은 평범한 사람 따위가 뭘. 그냥 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 시대 사람들이. 그리고 또 두 번째 데려고 온 여인도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 또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아이 나오면 되잖아요. 그것이 그 시대 정신입니다. 그것이 문화의 흐름이라고요.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하나님 나라의 도덕은 다 사라지고 그냥 그렇게 살고 있었던 시절. 그런데 이 사람은 아내와 그냥 삽니다. 그냥 살아요.
3-2. 역류하는 믿음
그렇다면 이 마노아라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이 사람을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분명히 이 시대적 관점에서 보면요. 그러나 하나님 시각에서 보면 시대를 뛰어넘어서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시대를 뛰어올라 거슬러 가는 사람.
이 시대 흐름에 나를 그냥 맡기고 흘러가는 대로 맡기고 되는 대로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대로 한 가정에 남편과 아내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루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 가정에 어려움이 있고 자녀가 생기지 않고 문제가 있어도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니까요. 가정을 지키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사 시대를 보면 이런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우리 봤지요? 기드온의 아들들 중에 막내 아들 누구입니까? 요담입니다. 요담이라는 사람의 설교 보셨잖아요. 탁월한 설교 아닙니까? 나무를 가지고 비유해서 하는 설교. 그런 돌연변이, 영적인 돌연변이가 가끔 생깁니다.
입다, 기생이 낳은 아들입니다. 서자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어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토록 통달하고 배웠는지 성경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입다가요. 그리고 우리는 룻을 알고 있습니다. 모압 여인 룻. 베들레헴에 살았던 보아스도 알고 있고 또 사무엘서에 가면 한나도 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 사사 시대 사람들이잖아요.
시대가 악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타락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입에서 "세상이 이래서, 시절이 이래서, 다 그렇게 사니까"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시대가 이래도 그 시대를 뛰어넘고 극복한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시대를 보십시오. 이 시대가 사사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시대입니다.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다 자기 멋대로 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딱 붙들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살아간다면 우리 가정도 마노아의 가정처럼 하나님 앞에 쓰임받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됩니다.
4. 나실인의 규정
4-1. 여호와의 사자가 전한 다섯 가지
3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남편이 아니고 여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함으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것은 희소식이지요. 이런 것을 보면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4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다섯 가지 이야기를 봅니다. 한번 보세요. 첫째, 포도주와 독주 입에 대지 말라. 둘째, 부정한 것 먹지 말라. 셋째, 삭도 머리에 대지 말라. 넷째,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다. 다섯 번째,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이야기를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여인에게.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이 다섯 가지는 좀 기억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면 뒤에 뺐다가 넣었다가 막 하거든요. 다섯 가지 이야기를 정확하게.
4-2. 나실인의 의미와 규정
그중에 나실인이라는 얘기가 나오지요. 나실인이 됨이라. 이 나실인이라는 규정을 한번 봐야 되는데요. 구약의 나실인에 대한 규정이 민수기에 나옵니다. 민수기 6장 1절에서 8절까지가 나실인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한번 볼게요.
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원래 나실인에서 '인(人)'자는 사람 인자입니다. 나실까지가 히브리어하고 인자는 사람 인자예요. 한자입니다.
히브리어 나지르(נָזִיר)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지르, 이것은 명사입니다. 하나님께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구별된 자. 그런데 이 나지르(נָזִיר)라는 명사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동사 나자르(נָזַר)에서 왔습니다. 나자르(נָזַר)라는 동사는 구별하다, 헌신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 성전에서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잖아요. 레위 지파가 하잖아요. 레위 지파는 성전에서 맡아서 다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책무입니다. 그런데 나는 레위 지파가 아닙니다. 나는 유다 지파입니다. 나는 단 지파입니다. 그런데 내가 1년 정도는 성전에서 내가 전업으로 봉사하고 싶습니다.
그런 경우가 간혹 있는 것이 왜냐하면 농사 짓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6년 지나고 7년째 무엇을 주셨습니까? 안식년을 주셨습니다. 농사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1년 동안 나 농사 안 짓고 무엇을 합니까? 물론 팔도 유람 다니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런데 1년 정도 내가 시간이 나니 나는 이 1년을 하나님 성전에서 섬기겠다, 봉사하겠다 이런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일정 기간 동안 너희가 이 기간 동안은 이렇게 하라는 규정이 민수기 6장의 규정입니다.
4-3. 세 가지 금지 규정
하나님께 헌신하고 구별되어 섬기려면 어떻게 하라 했습니까? 나옵니다. 3절입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포도에서 나는 것은 아무것도 먹지 말라, 포도즙도 먹지 말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규정은 포도주 독주 먹지 말고 포도나무 소산을 먹지 말라 한 것입니다. 포도주와 독주는 레위인들 특히 제사장들에게도 금한 것입니다. 레위기 10장 9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즉 회막에 들어갈 때 성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때 레위인들이 즉 제사장들이 포도주 한잔하고 독주 한잔하고 들어간다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봉사할 때, 하나님 앞에서 회막에서 맡은 일을 할 때는 맨정신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맑은 정신으로 어디에 취해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포도주와 독주를 금한 것이고 그리고 포도에서 나는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를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의 즐거움을 이 기간 동안은 끊으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포도나무에서 나는 모든 소산을 입에 대지 말고 먹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일정 기간 동안 정해진 나실인의 책무였습니다. 이것을 레위인 제사장들과 똑같은 규정으로 정해 두었습니다.
두 번째 정한 것은 5절입니다.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머리 깎지 말라 했습니다. 이것은 왜 그럴까요? 출애굽기 29장 6절 말씀을 한번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거룩한 패를 더하고." 거룩한 패. 이것은 제사장의 의복 규정이거든요. 제사장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거룩한 패를 더한다 했습니다.
이 거룩한 패가 무엇입니까? 네제르(נֵזֶר)입니다. 네제르. 거룩한 패. 네제르. 이것이 히브리어로 네제르입니다. 발음이 좀 비슷하지요. 나지르, 나자르하고요. 비슷합니다. 즉 구별하다라는 동사가 나자르라 했습니다. 이것이 명사가 두 개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나실인이라고 갈라질 때는 나지르가 되고 거룩한 패가 될 때는 네제르가 됩니다.
그러니까 정리해서 말하면 제사장의 머리에 거룩한 패, 관 위에 거룩한 패를 씁니다. 그것이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이잖아요. 나실인들은. 제사장처럼 관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머리를 깎지 않고 머리를 머리 위에 땋는 것입니다. 또아리처럼. 그것이 마치 하나님이 보실 때는 거룩한 패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것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구별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머리카락이 너는 구별된 사람이다 하는 뜻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명하셨습니다. 제사장과 똑같이.
그다음 6절에 보면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했습니다.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제사장들에게도 그랬거든요. 레위기 21장 11절을 보면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 부모 장례식에도 못 갑니다. 제사장들은.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좀 실제적인 이유이기도 한데 제사장들은 매일 예배를 집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장례를 집례 버리면 시신에서부터 나오는 각종 오염된 물질들이 있잖아요. 그것을 제사장을 매개로 성도들에게 옮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 못하게 금한 것입니다. 일절 못하게. 시체는 손을 대지 말라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인데 제사장이 그 죽고 사는 일에 매일같이 그 일만 감당하다 보면 언제 번제 드리고 언제 화목제 드리고 언제 예배 드리고 언제 백성들 재판해 주고 신앙 교육하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나실인도 똑같이 규정했습니다.
4-4. 삼손, 평생의 나실인
그럼 결론적으로 보면 제사장에게 규정된 것, 포도주와 독주 금했지요, 머리에 삭도 대지 말라 했지요, 시체 만지지 말라 했지요. 그것이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나실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서 삼손은 날 때부터 나실인입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일정 기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를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나실인으로 딱 정해 버린 것입니다. 그의 부모를 통해서.
그래서 다섯 가지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포도주 독주 금하고. 둘째, 부정한 것 입에 대지 말고. 셋째, 머리에 삭도 대지 말고. 넷째, 평생 나실인으로 살고. 다섯째, 이스라엘을 블레셋 손에서 구원하고. 다섯 가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중에 세 가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포도주 독주 금한 것, 삭도 안 대는 것, 그다음에 시체 만지지 않는 것. 이 세 가지는 평생 지켜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어릴 때는 부모가 이것을 통제할 수 있잖아요. 부모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크면 통제 밖으로 나갑니다. 삼손 통제됩니까? 우리가 다 아시다시피 안 됩니다.
삼손의 인생을 보십시오. 14장 15장 16장을 나중에 보시면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집에 가서 잔치판에 갑니다. 결혼 잔치에 갑니다. 결혼잔치에서 포도주 마십니까, 안 마십니까? 마십니다. 그것부터 깹니다. 두 번째 또 시체 만집니다. 사자 찢어 죽이잖아요. 그것도 깹니다. 마지막으로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서 자기 머리에 삭도를 대게 합니다.
자발적으로 자기 손으로 자기 발로 자기 입으로 삼손이, 하나님의 말씀이 딱 정해졌습니다. 부모가 다 지킵니다. 목숨처럼 지킵니다. 아이가 어릴 때. 그런데 이 아이에게 그것도 가르칩니다. 그것 하면 안 된다고 계속 가르칩니다. 그런데 자기 발로 성인이 되니까 가 버린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문화로 들어가서 그들 잔치판에 가서 포도주 먹고 술 마시고 자기 힘 과시하려고 사자 찢어 죽이고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서 머리 깎아 버리고 그렇게 돼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삼손은 아까 처음에 얘기했던 원점으로 올라가면 40년 블레셋 문화에서 그 문화를 이겨내고 극복하고 시대를 극복한 지도자였는가? 그런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그 흐름에 그냥 흘러가 버린 사람이지요.
4-5. 아버지보다 못한 아들
그래서 우리가 이 삼손이라는 사람은 제 아버지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마노아라는 사람은 한 시골 구석에서 살면서 그 부인 하나 데리고 그 시대 정신을 살아내지 않고 그것을 거꾸로 역설적으로 살면서 자녀가 없어도 믿음으로 기도하고 살았던 자기 아버지 그 신앙의 반에 반도 못 미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보면 부모가 아무리 신앙 교육 잘해도 부모가 아무리 신앙 교육 제대로 하고 20대까지 잘 지켜도 결국은 그 선택은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삼손이라는 사람을 보면요.
그래서 우리가 다 큰 아이들, 나이가 30이 되고 40이 되고 삼손처럼 사는 친구들. 그 아이가 내 품에 있을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것이 다 내 죄인가? 내가 잘못 가르쳤나? 그런데 또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삼손을 보면 마노아라는 사람을 보면요. 그래서 우리가 너무 자책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 손을 떠났으니 기도는 해야지요. 기도는 계속 기도하고 돌아오라고. 결국 마지막에 삼손이 눈이 다 뽑힌 채로 마지막 원수는 한번 갚잖아요. 이것이 삼손의 슬픈 현실입니다.
5. 전달의 의무
5-1. 빠뜨린 두 가지
그다음 6절 한번 보십시오. 이제 여인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서 아이를 낳을 것이다, 다섯 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인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여인이 가서 그의 남편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오셨는데 그의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어쩌고저쩌고 막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가장 먼저 달려갔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같으면 이런 일이 있으면 남편에게 먼저 갑니까? 남편에게 가요? 집에 아이들하고 부인은 다 아는데 혼자 모르고 있는 것이 남자 아닙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집에 어떤 사건 사고가 났는지 뭐 좀 분위기가 이상해서 물어보면 "당신은 몰라도 된다"고, "그냥 알면 골치 아프니까 하던 거 계속 하라"고, "괜히 간섭하면 시끄러우니까 괜히 열이 확 올라오고 막 이러니까 하지 말라"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그런데 이 마노아의 아내가 남편에게 먼저 가서 이것을 막 얘기를 했습니다. 그럼 평소에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다는 얘기입니까? 소통이 잘 된다. 항상 어떤 이야기라도 결정적인 아주 중요한 얘기는 가장 먼저 남편에게 해야지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남편에게 먼저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평소에 훈련되지 않으면 참 중요한 얘기 남편에게 하면 남편도 좀 당황스럽고 평소에 안 하더니 이 여자가 오늘 나에게 왜 이러나 너무 당황스럽고 가서 이때는 나도 좀 민망하고 평소에 연습을 해야 되는데 연습을 좀 해야 결정적일 때 이 얘기를 하는데 이 여인은 남편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한번 보세요. 7절입니다.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하니라." 두 개 빠졌지요. 아까 우리 다섯 개 얘기했잖아요. 두 개 무엇이 빠졌습니까? 머리에 삭도 대지 말라.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다. 뺐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렇게까지 얘기합니다. 엄마가 머리에 삭도 대는 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니 아들도 역시 그랬던 것 같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꼭 그 책임만은 아니나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전하는 사람이 정확하게 잘 전해야 됩니다. 그런 전달의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들은 사람이 먼저 복음을 들은 사람이 잘 전해야 됩니다.
이것은 조금 더 폭넓게 얘기하면 우리가 복음으로 먼저 구원받았으면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알잖아요. 그러면 그대로 매뉴얼대로 잘 살아내 줘야 그다음 사람들에게 귀한 본보기가 됩니다. 빼고 싶은 것 빼 버리고 잊어버리고 못 하고 이러면 안 된다고요. 이것 다섯 가지 들었으면 다섯 가지 다 전해야지 임의로 빼버렸잖아요.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선악과 금지 명령을. 그때는 하와가 없었습니다. 하와가 없었다고요. 그런데 뱀은 하와에게 찾아갔습니다. 우리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담이 아마 하와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제대로 안 전했을 것입니다. 성경 공부를 제대로 안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냥 둘이 재밌게 논다고 에덴동산에서 뛰어놀다고 바빠서. 제대로 전해야 됩니다. 제대로 이 다섯 가지를.
5-2. 가정의 영적 일치
그런데 이 마노아라는 사람은 굉장히 지고지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상당히 순박한 사람입니다. 순전한 사람입니다. 보세요. 8절 보시면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기도합니다. 왜 기도할까요?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에게. 이 사람은 나는 못 만난 것입니다. 나는 나도 자식 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는데 내 아내에게만 나타나서 이 얘기하시고 나는 못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우리라는 말을 보면 부부의 일치가 항상 이 가정에 기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나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우리는 아이를 주시면 낳겠지만 우리 힘으로는 기를 수 있는 방법을 모르니 우리에게 알려 주시면 그대로 기르겠습니다. 이 결단이잖아요. 이분이.
이것을 보면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마노아가 아내를 다그친 적이 없습니다. 헛봤냐, 잤냐, 졸았냐, 꿈꿨냐 이런 것 묻지 않고 아내가 얘기하자마자 그것을 갖고 딱 기도하잖아요. 그러니 이분은 부인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한테 더 잘 해 줘야지요. 더 있는 그대로 더 그대로 잘 옮겨야지요. 다섯 개 중에 세 개하고 두 개 빼 버리면 60%밖에 전달 안 한 것인데 그 중요한 두 가지를 뺐는데. 아내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전적으로 잘 전해야 됩니다. 그렇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이분이 가정의 영적 일치를 추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정의 영적 일치.
6. 영적 일치의 능력
6-1. 경제적 균형보다 영적 일치
여러분, 가정은 한 사람의 힘으로만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영적 일치보다도 경제적 균형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둘 다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야 서로가 서로에게 꿀리지 않는다, 혹은 책잡히지 않는다, 나도 나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젊은 분들이.
그런데 그런 식의 독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은 영적 일치입니다. 영적 일치.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으면 나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당연히 나에게도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우리가 힘 있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 아이를 기를 것 아닙니까? 이 말이거든요.
여러분, 성령은 분열의 영이 아닙니다. 절대로 성령은 일치의 영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분열의 영입니다. 사탄은 계속 갈라 놓습니다. 어떤 공동체를 찢어놓고 갈라 놓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인데 사탄이 사람을 통해서 하거든요. 그런데 성령은 사람을 통해서 일치시킵니다. 하나가 되게 합니다.
6-2. 고넬료와 베드로
늘 자주 말씀드리는 얘기지만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와 베드로 사건이 나옵니다. 고넬료, 이방인의 백부장 아닙니까? 베드로, 그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입니다. 만 명이 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담임 목회자입니다.
고넬료가 이 베드로 목사님 한번 자기 집에 청하고 싶어도 청할 수 있습니까? 이방인 집에 청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고넬료에게 말씀합니다.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가이사랴에 가면 베드로가 있으니 그를 청하라. 아, 청하고 싶지요. 그런데 오라 한다고 오겠습니까? 사람 보내라 합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주잖아요. 보자기가 내려왔다 올라갔다 하는데 "일어나 잡아 먹어라." 부정한 것인데 먹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누가 너를 찾든지 따라가라" 합니다. 그 사람이 왔습니다. 따라갔습니다. 갔더니 그것이 고넬료의 집이었습니다.
이방인의 집에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역사하시고 고넬료에게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역사하셔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고넬료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가 일어나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설교하는 일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므로 가정에서, 특히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이 일치의 영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기다리지 못해서 그렇지 목소리 큰 사람이 힘센 사람이 그냥 밀어붙여 가지고 해 버릴 수 있습니다. 내 성질대로, 내 성격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성령께서 하나 되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못 기다리니까 그것을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니까 먼저 사고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노아라는 사람은 가정의 일치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항상 그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늘 깨닫고 계셔야 됩니다. 늘 마음에 새기고, 아 하나님은 이런 일에는 우리와 함께 하시겠구나. 이런 저런 일에는 나에게도 일하신 하나님이 내 남편에게도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래서 기도 제목을 같이 내놓고 같이 기도해야 그때 같은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딱 일치되게 하십니다. 그 일을 같이 하면 아무 탈이 없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결과는 무조건 좋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일치되어서 일하는데.
6-3. 세 겹 줄의 의미
지금 보십시오. 우리 구약에서도 그런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서 4장 11절 12절을 보시면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다. 여기까지는 이해가는데 왜 갑자기 세 겹 줄이 나올까요? 두 사람이라 했는데 두 겹 줄이어야지 왜 세 겹 줄이 나옵니까? 부부가 일치가 되면 그 위에 성령께서 일하신다. 그래서 세 겹 줄입니다.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같이 기도하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한 번 더 감아 주신다. 그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 말씀을 보시면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또한 그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같이 여겨 지식을 따라 동거하고 했습니다.
마노아는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가 막히지 않은 것입니다.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하니까. 그가 기도했잖아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9절입니다.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남편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남편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노아의 목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막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6-4.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어디 간 것입니까 도대체 이 남자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리에 없네요. 또 아내에게 임했네요. "그러니까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의 남편에게 알리어 이르되 보소서 전일에 내게 오셨던 그 사람이 내게 나타났나이다 하매 마노아가 일어나 아내를 따라가서 그 사람에게 이르러 그에게 묻되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사람이니이까 이르되 내가 그러하다 하니라."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시고 자녀 낳으셨습니까? 아니면 다 그림을 그리고 "나는 이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세 살이 되면 어떻게 5세가 되면 초등학교 보낼 때는 어떻게 나중에는 서울대를 보내고 이대를 보내고 법대를 보내고 유학을 보내고" 혼자 막 나름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셨습니까?
그런데 마노아는 참 이분이 아내를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일치를 꿈꿨습니다. 그리고 자녀 교육과 자녀 양육을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묻습니다. 자기가 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대가 악하니까요. 이 시대가 악한 것을 이 사람이 알잖아요. 이 시대 안에 지금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 시대 안에 살고 있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이 시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내가 이 아이를 내 방식대로 기르면 내가 이 아이를 내 생각대로 기르면 블레셋 치하에 40년 살았던 내 머릿속에서 나올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블레셋 치하에서 40년 동안 흘러가는 대로 살았던 내 마인드에서 나올 것이 무엇이 있냐고요? 그러니 하나님의 방식대로 길러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 사람은 간절한 것입니다. 이분에게 계속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할지를 알게 해 달라고.
6-5. 시대를 거스르는 신앙
여러분, 우리는 이 마노아의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시대가 악합니다. 지금 우리 이 시대가.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어야 됩니다. 나도 직장 생활하다 보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나도 세상의 문화 속에 계속 노출되다 보면 내 속에도 이 악한 세상의 문화와 세속적인 흐름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 생활 한다는 것은 그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를 돌아보고 계속해서 "내가 여기에 물들어가고 있구나." 그래서 계속 역설적으로 정말 올라가는, 역류하는 연어처럼 계속해서 거꾸로 거꾸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됩니다. 그렇게 신앙 교육을 하고 자녀들을 길러내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쓰고 발버둥치고. 그것이 마노아였습니다.
이런 훌륭한 부모 밑에서 삼손이 태어났는데 이 인간은 왜 그렇게 살았는지. 그것이 마노아가 대단히 훌륭한 것입니다. 자기가 가르쳐 봐야 나올 것이 뻔하니까 하나님께 묻는 것이지요.
7. 기묘자의 방문
7-1. 마노아의 대접
그다음 마노아가 막 그랬습니다. 이분을 막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해 달라 하거든요. 그러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그랬습니다. "염소는 됐고 나에게 영광을 돌리지 말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라" 하거든요.
17절 보세요.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이제서야 통성명하고 싶어졌습니다. 이름을 알고 싶어졌습니다. 뭔가 하나님의 사자인 것은 알겠는데 이름을 묻고 싶어졌습니다.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 정말 당신이 그인 줄 그제서야 알겠습니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이름을 알려 주지 않은 것이 아니고 슬쩍 알려줬습니다. 뭐라고요? 기묘자(פֶּלֶא). 많이 들어보셨지요?
7-2. 이사야의 예언
기묘자(פֶּלֶא). 어디에서 보셨습니까? 이사야 9장 6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여기 기묘자입니다.
그러면 이 기묘자가 누굽니까? 이사야가 예언했던 이 기묘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가끔 하나님의 사자로 이 땅에 신현하신 기록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 전투를 앞두고 만났던 여호와의 사자, 그 사자도 메시아라고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현존이라고 얘기하고 지금 여기 이름을 정확하게 얘기합니다. 기묘자. 야곱과 얍복 강가에서 씨름했던 그분도 그리스도의 현존이라고 말하고 가끔씩 이렇게 나타나십니다.
7-3. 특별한 가정의 조건
예수님께서 구약에 전혀 출연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이미 태초에 계셨잖아요. 태초에 말씀으로 우리 예수님은 창조 때부터 함께 하셨습니다. 그 우리 예수님이 이 중요한 자리에 직접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이 이 자리에 직접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마노아의 가정을 얼마나 특별하게 보셨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정말 특별한 가정이 되시려면 우리가 돈 많이 벌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런 것이 특별한 가정이 아니라 자녀를 70명 낳고 우리 자녀들이 다 성을 가지고 살고 그래서 특별한 가정이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특별한 가정이 됩니다.
이 시대의 악과 맞서서 이 흐름과 문화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아내려고 애쓰고 힘쓰면 하나님이 그리스도까지 보내시잖아요. 지금 이 집에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가정에.
7-4. 불꽃 속에 올라가신 여호와의 사자
19절입니다.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불꽃이 막 하늘로 막 올라가네요.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이니까 가능하지요. 예수님이 사도행전에 보면 승천하셨잖아요. 마치 그 모습처럼 올라가신 것입니다.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그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22절입니다. 그의 아내에게 마노아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마노아 참 순박하지요. 참 순박하고 사람이 거짓이 없고 깨끗한 사람입니다. 정말 깨끗한 사람입니다.
7-5. 아내의 침착한 믿음
그러니 아내가 침착하게 말합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침착하지요. 번제와 소제를 받는다, 제사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한다는 뜻이거든요. 번제는 다 태워드리는 제사 아닙니까? 소제도 곡식을 빻아서 태워드리는 제사 아닙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셨거든요. 그러니 우리를 죽일 일이 없다.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미 보이신 것도 우리를 신뢰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자녀 준다 해놓고 우리를 죽이겠습니까? 그럼 누가 키웁니까? 이제 이런 얘기이지요. 참 침착하지요.
그러니 남편은 순박하고 좀 급한 면도 있고 그러나 아내를 전적으로 신뢰했고 가정의 일치를 꿈꿨고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사람. 부인은 말씀을 두 개 빼먹어서 그렇지 그래도 이 부인도 참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좋은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건질 삼손을 주셨다는 것을 배웁니다.
8. 태양 같은 자, 삼손
8-1. 삼손의 출생과 이름
24절입니다.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삼손이란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세요? 태양 같은 자라는 뜻입니다. 태양 같은 자. 그런데 이 삼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가방을 만든 회사가 있지요. 샘소나이트라고요. 힘센 가방, 부서지지 않는 튼튼한 가방이라고 이제 샘소나이트라고 했는데 아무튼 삼손이란 이름의 뜻은 히브리 이름으로 태양 같은 자라는 뜻입니다.
아마 그의 부모는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어두우니까, 세상이 암흑 천지니까 하나님의 빛으로 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 달라고 태양 같은 자가 되라고 그렇게 이름을 삼손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참 특이한 것은 여기 참 이유는 나오지 않으나 보통 이런 식이면 이름을 지어 주고 가잖아요. 예수님, 요한 이름을 다 지어 주고 가는데 삼손은 이름을 안 지어 주고 갔습니다. 기묘자께서. 그래서 부모가 이름을 지었습니다.
8-2. 두드리시는 성령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더라.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여러분, 여기 움직이다는 말을 잘 보셔야 되는데 이전까지 비교를 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배웠으니까요.
옷니엘 그리고 입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 했거든요. 우리 지난 시간에 입다 배웠잖아요. 여호와의 영이 임했다. '하야(הָיָה)' 동사를 썼습니다. 임하다는 그의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의 위에 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에게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영을 '입히셨다' 했습니다. '라바쉬(לָבַשׁ)'라는 동사를 썼습니다. 여호와 영이 함께했다. 이 라바쉬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옷 입었다는 뜻이거든요. 기드온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삼손은 '움직이다'라는 말은 '파암(פָּעַם)'이라는 동사를 씁니다. 움직이다, 파암. 이 움직이다라는 파암이라는 뜻은 두드리다, 울리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삼손의 마음 속에서 그를 자꾸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에게 울림을 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령께서. 우리 로마서 8장 말씀 아시잖아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호소하고 기도한다 했습니다. 그것처럼 삼손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그의 내적 영으로 영하셔서 그를 계속 두드립니다. 그를 계속 울립니다. 울림을 줍니다.
8-3. 반응하지 않은 삼손
그러면 거기에 반응을 해야 됩니까, 안 해야 됩니까? 반응해야 되는 것입니다. 반응은 누구의 몫입니까? 삼손의 몫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해서 그와 함께 하시면서 그를 두드리고 그에게 울림을 주고. 그런데 그가 그 내밀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볼 삼손처럼.
그런데 그가 파암하시는 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영에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블레셋 문화에 반응합니다. 그 문화에 반응하는 방식들을 다음 시간에 보겠습니다.
기도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시대가 악할 때 하나님께서는 한 가정을 보시고 그 가정을 들어서 하나님의 귀한 사명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시대가 악하고 블레셋 치하에 40년을 살아서 그 문화에 절어 사는 그들에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살려고 하는 마노아의 집을 귀하게 보시고 그 가정에 삼손을 주셨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 이 시대가 악합니다. 사람들은 시대를 탓합니다.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살고 있다고, 누구나 다 그렇게 사니 우리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시절을 악하다고 핑계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핑계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요담처럼, 입다처럼, 또한 마노아의 가정처럼, 룻과 보아스처럼, 한나처럼 우리도 악한 세상에서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고 시대를 극복하는 가정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우리 가정을 통하여 나의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만큼 인정받는 믿음의 가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가정의 일치가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일들을 함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는 좋은 가정, 좋은 믿음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