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특강 13 - 삼손의 인생 (삿 14-16장)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사사기 16:22)
오늘은 사사기 공부 열세 번째 시간입니다. 다음 주면 사사기가 끝나는데, 오늘은 삼손의 일생에 대해서 함께 나누어 보려 합니다. 14장, 15장, 16장을 함께 볼 텐데, 그 패턴이 일정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13장 이야기는 삼손 이야기의 도입입니다. 삼손의 가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부모님 이야기를 드렸는데, 그 아버지의 이름이 마노아였습니다. 마노아의 가정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가지 않는 가정이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시대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 안에 사는 존재로서 시대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시대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시대를 만들어 가기도 합니다. 둘 다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사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데, 그 사사 시대의 흐름은 상당히 악했습니다. 사사들이 아들을 삼십 명씩 낳고 했으니, 다산이 축복이었던 시대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한 여인에게서 아들을 그만큼 낳으면 문제가 아니겠지만, 항상 아내를 여럿 두고 성경적인 가정을 이루지 않는 문화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노아의 가정은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그냥 함께 삽니다. 그것이 그 가정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보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 가정에 아들을 허락해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는데, 다섯 가지 약속을 받습니다. 그중에 아주 중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라, 두 번째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 세 번째가 삭도를 머리에 대지 말라. 바로 나실인의 서원입니다. 다섯 가지 중에 아주 중요한 세 가지 약속인데, 이것은 제사장들에게 명하신 것과 똑같습니다. 날 때부터 나실인이 된 아들을 이렇게 평생 동안 기르고 돌보고 키워 내라. 이것이 부모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가지고 부모는 자녀를 기릅니다. 가정의 일치를 위해서 여호와의 사자가 아내에게만 아니라 나에게도 나타나 주십시오라고 기도했고, 그래서 두 사람에게 똑같이 여호와의 사자가 그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도 임했습니다. 삼손이 이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좀 특별하게 임합니다. 앞선 사람들과는 다르게 "여호와의 영이 삼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더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움직이다'라는 말이 파암(פעם)이라는 히브리어인데, 이 말은 '두드리다', '울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삼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친히 내주하셔서 계속 감동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계속 임재해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삼손이 살아가는 날 동안, 그가 사역을 하는 날 동안은 항상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계속해서 마음에 찔림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삼손은 그 찔림에 대해서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길이라고 깨닫게 해 주시면 그 길에서 돌이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볼 14장, 15장, 16장 이야기는 그 근저에 흐르고 있는 정신이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파암(פעם)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전제로 하고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삼손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는지가 더 명확하게 부각됩니다.
1. 삼손의 선택: 사명인가, 자기 애인가
14장 1절을 한번 보십시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지금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사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지금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몇 년 동안입니까? 사십 년입니다. 사십 년째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딤나라는 지역은 블레셋 지경입니다.
사사 삼손이 성인이 되었고 블레셋 지경인 딤나로 내려갔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왜 내려갔습니까? 이 사람이 보통이고 이 사람이 정상이었다면, 그가 블레셋 지경 딤나로 내려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거나, 감동이 있었거나, 마음속에 성령의 인도가 있어서 그곳에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거나 단판을 짓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고난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간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사들이 당연히 해야 할 책임 아닙니까?
그런데 딤나에 왜 내려갔느냐?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말이 중요한데, 삼손의 일생 전체를 관통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내용의 제목이 '삼손의 인생'인데,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한 단어를 말하라면 '보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봤느냐,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삼손은 항상 여인을 봅니다. 이것이 삼손의 인생의 문제입니다. 그의 인생의 큰 멍에였고, 그의 인생의 죄 문제였습니다.
그가 사사였는데 딤나에 내려간 목적이 여인을 보기 위해서 내려갔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간 것도 아니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러 내려간 것도 아니요, 무슨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간 것도 아니요, 블레셋 여인을 보러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한 여자를 봤습니다. 자기 눈에 좋은 여인을 봤습니다.
2절을 보니까,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이것이 사사가 할 소리입니까? 이 사람이 그냥 일반인이라 하더라도 정상이라면, 이스라엘이 정상적인 공동체라면 회초리 맞을 짓인데, 아버지에게 호적 팔 소리인데, 그런데 이 사람은 사사입니다. 그런데 사사가 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결혼시켜 달라고. 그런데 블레셋 여자 중 한 사람을 봤다고 이야기합니다.
부모님이, 마노아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3절,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당연합니다. 부모가 이렇게 말하겠지요. 이렇게 말하니까 삼손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여기서 '내가'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또 '나를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로맨스입니까? 이 삼손이 이 시대를 관통하는 낭만적인 로맨티스트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여기서 사명과 자기 사이에 삼손이 무엇을 선택하는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사사로서 사명자입니다. 사명을 맡은 사람입니다. 사사는 말씀을 맡은 사람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고 구원해 내야 할 영적인 사명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사명자로 사는데, "내가 이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사람들은 항상 일평생 이 관계 가운데 갈등합니다. 자기 애가 있습니다. 없을 수 없습니다. 항상 자기 중심적인 자기 애가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크건 작건. 그런데 믿음이 어릴 때는 자기 애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내가 원하니까, 내가 필요로 하니까. 신앙생활도 그렇게 시작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자기 필요에 의해서 교회를 다니고, 필요에 의해서 사람을 만나고, 필요에 의해서 기타 등등을 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성장하고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자기 애가 사명에 의해서 점점 낮아지고 사라지고 없어져 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명이 더 부각되고, 자기 애는 그 안에서 점점 힘을 잃어야 신앙 성장이 제대로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사입니다. 그런데 사명과 자기 애 사이에서 부등호가 자기 애로 강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사명감이라고는 일절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이것을 보면 자기 부모의 신앙보다 훨씬 못한 것입니다. 부모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살았습니다. 시대 정신과 역행하며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살았던 마노아의 가정인데,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던 삼손이 그 시대 안에 살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지경에 가서 한 여자를 보고, "내가 그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이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해 달라"고 내가 원하니까 이렇게 떼를 쓰는데 방법이 있습니까?
1-1. 악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4절을 해석을 잘해야 합니다.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여러분,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을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계획하신 일이다, 삼손이 이런 식으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들어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려 했는데 부모는 그것을 몰라서 반대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1절부터 3절까지는 그냥 역사를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이고, 4절은 사사기 기자의 평가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사사기 기자가 잠깐 여기에 들어와서 역사적 평가를 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식으로 평가를 하는데, 여러분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악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패와 인간의 실수와 인간의 죄악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만들어 가시고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다. 여러분 그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 고백을 이전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사사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요셉이 했습니다. 창세기 50장 20절 말씀을 보시면 요셉의 고백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들이 요셉을 팔았으니까 두려워서 벌벌 떠니까 요셉이 이 말을 한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했지만, 그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신들의 죄는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만약에 형제들 중에 "야, 지금 네가 총리가 된 것은 우리가 너를 팔아서 그런 것 아니냐? 그러니 너 나한테 한턱 내" 하면 귀싸대기를 맞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정상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죄를 짓고,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하고 악 운데 살아가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 역사를 위해서 그 악까지도 선으로 바꾸셔서 하나님 역사를 끌고 가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요셉이 알고, 이전에 창세기에서 고백해 놓았습니다. 지금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삼손이 사사로 섰는데 정상이라면 그가 사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블레셋을 누르고 이기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것이 가장 베스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고 구원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사사가 비록 타락해도 하나님은 그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서 그의 악과 그의 죄를 이용해서라도 블레셋을 이기고 그들을 건져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삼손의 죄가 면책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한번 보십시오. 지난날 내 인생을 보면 우리가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자식 잘못 키운 것 많습니다. 내가 잘못 산 것 많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나의 죄악과 실수와 연약함까지도, 시간이 지나니까 그것을 다 선으로 바꾸셔서 합력하게 하여 오늘날 우리 가정을 세우시고, 오늘날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내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 잘못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옳은 분, 여기서 유일하게 찬양받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4절을 그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보십시오.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해 놓았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을 보니까,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도 그랬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삼손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삼손이 어떤 상태입니까? 마음속에 성령께서 계속 두드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파암(פעם)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에게 울림을 주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블레셋 지경에 내려가서 한 여자를 보고 이 여인과 결혼해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삼손의 마음은 괴로울까요, 편할까요? 괴롭습니다. 그도 지금 갈등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성령께서 계속 두드리니까. 그런데 그 갈등과 괴로움을 그냥 무시하고 사는 것입니다. 계속.
여러분, 믿음의 백성들이 죄 짓는 것이 편합니까? 편하지 않습니다. 죄 지어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다들. 왜 남의 이야기 하듯이 그렇게 모른 척하십니까? 다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편하게 죄 짓는 믿음의 백성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죄 짓느냐?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감동 주시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냥 "아 이거 아닌데, 한번 기도해 봐야 되는데, 아 뭐 어떨까 봐, 괜찮아, 남들 다 하니까" 이렇게 그냥 가는 것입니다. 삼손도 계속 그렇게 흘러흘러 가는 것입니다. 기왕 결혼해야 되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야지, 내 눈에 좋은 사람과 결혼해야지, 그 사람이 블레셋 사람이건 뭐건, 부모가 내 평생 살아 주는 것도 아닌데 뭐 어쩌라고. 이런 식입니다. 지금 삼손이.
1-2. 성령의 강권적 임재
이제 부모가 이기지 못합니다. 삼손이 그의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갑니다. 이제 상견례로 가는 것입니다. 딤나의 포도원에 이르렀을 때 젊은 사자가 그를 보고 소리 지릅니다. 그런데 이때는 부모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6절을 보니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여러분, 이것 좀 보셔야 되는데, 이 '강하게 임하다'라는 말에 찰라흐(צלח)라는 히브리어를 썼습니다. 찰라흐(צלח), 강하게 쏟아지다. 확 쏟아붓는 것입니다. 소나기가 임하듯이 갑자기 소나기가 막 퍼부을 때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한 십 초만 밖에서 있어도 어떻게 됩니까? 확 젖습니다. 흠뻑 젖습니다.
지금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서 부모는 아마 그 집에 간 것 같습니다. 자기 혼자 어디 있는데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찰라흐(צלח), 강하게 임했습니다. 왜 임했을까요?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막 두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계속 이 근저에 흐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14장, 15장, 16장 내내. 그런데 이 마음의 갈등에 삼손이 반응하지 않으니까 성령께서 강하게 찰라흐(צלח)하신 것입니다. 소나기가 쏟아붓듯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임재를 느끼지 않습니까?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면 돌아가야지요. 이제 "아, 이것이 아닌가 보다." 마음에 막 갈등을 주는데도 계속 가니까 성령께서 딱 앞을 막아 세우신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서 성령께서 강하게 지금 쏟아붓는 것입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돌이키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자 그에게 부어진 힘을 가지고 그가 무엇을 합니까? 그의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같이 찢어 버립니다. 사자가 부르짖는 것은 무엇입니까? 멈추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사자가 가지 말라고. 그러면 돌이켜야지요. 사자가 막 울부짖는데, 그리고 성령께서 임하는데, 그런데 사자를 찢어 죽여 버립니다. 삼손이.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왜 알리지 않았을까요? 두 가지입니다. 그의 부모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사자가 나타났다 하면 부모가 뭐라고 할까요? "하나님이 막으신다" 했을 것 아닙니까? 사자를 찢어 죽였다고 하면 부모가 뭐라고 할까요? 나실인의 서원을 어긴 것입니다. 시체를 만지면 안 됩니다. 그것이 사람이건 짐승이건. 지금 나실인 서원 첫 번째를 어긴 것입니다. 지금 세 가지 중요한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포도주나 독주 먹지 말라, 시체 가까이 하지 말라, 삭도 대지 말라. 지금 시체부터 가까이 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찰라흐(צלח)해서 막았는데, 갑니다.
1-3. 수수께끼와 분노
이제 어떻게 되었느냐? 10절, "삼손의 아버지가 그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베풀었으니 청년들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었음이더라."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처갓집에 내려가서 이제 그 집에 가서 결혼한 것입니다. 결혼하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블레셋 사람 동네 가서 잔치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빠질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술입니다. 독주와 포도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가 또 깨어집니다. 포도주와 독주 먹지 말라. 내려오는 길에 시체, 그다음 포도주와 독주. 그래서 나실인의 서원을 하나하나 깨는 과정이 14장이라 했습니다. 16장에 가서는 삭도까지 머리에 대게 됩니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와서 친구를 삼아 그와 함께하게 한지라. 잔치는 일주일 동안 열립니다. 그것은 근동의 풍습입니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일주일 동안 혼인 잔치를 하는데, 친구들 삼십 명이 와서 함께 먹고 마시고 놉니다. 그런데 삼손이 그들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그 유명한 수수께끼입니다. 그 수수께끼를 맞추면 내가 너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고, 만약에 못 맞추면 너희들이 나에게 똑같은 것을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수수께끼가 무엇이냐 보십시오. 14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이것이 자기 경험입니다. 이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수수께끼입니다. 사자를 찢어 죽였습니다. 그리고 삼손이 며칠 뒤에 거길 가 보니까, 사자가 찢어 죽임 당한 그 사체에서 벌들이 와서 거기서 꿀을 만들었습니다. 벌집이 생긴 것입니다. 거기에.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사자가 죽었는데 거기에서 꿀이 나오고 있습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사자는 먹는 자 아닙니까? 거기서 먹는 꿀이 나오고, 강한 자, 가장 강한 자가 무엇입니까? 사자 아닙니까? 사자보다 강한 것이 있습니까?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 꿀보다 단 것이 있습니까?
이것은 자기가 경험한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을 수수께끼로 낸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여기서 이제 한몫 챙겨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도록 수수께끼를 못 푸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방인들입니다. 여러분, 이방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주 비겁하고 비열하고 야비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사흘이 지나도록 수수께끼를 못 푸니까, 이제 나흘이 남았습니다. 잔치는 일주일 하는데.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친구들이 이 블레셋 여인을 협박합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15절, "일곱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려 달라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니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빼앗고자 하여 우리를 청한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아니하냐" 협박을 합니다.
그러니까 여인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삼손에게 가서 죽는 소리 합니다. 그러니까 삼손이 여인을 사랑하니까, 이 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니까, 정답을 알려 준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런 패턴이 똑같이 반복됩니다. 나중에 들릴라에게 머리 밀릴 때도 똑같이 이렇게 합니다.
여인에게 알려 줘 버렸습니다. 알려 주니까 여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당연히 자기 친구들에게 이야기했겠지요. 그래서 그 친구들이 나중에 답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18절, "일곱째 날 해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이 멋진 말을 남깁니다.
어쨌든 그런데 삼손이 이런 식으로 하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마음속에 원한이 확 생깁니다. 이제 삼손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줘야 합니다. 이런 상황입니다. 19절,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갑자기 임했습니다. 또 찰라흐(צלח)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멈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야, 봤지 않니? 네가 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고 블레셋 지경에 가서 결혼도 하고 경험을 했지 않느냐? 일주일 동안 블레셋 사람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악한지, 네가 사랑한 그 여인이 너를 배신하는 것을 보지 않느냐? 내가 너를 멈추라고 하나님의 영을 강하게 찰라흐(צלח)했지만 멈추지 않고, 멈추라고 겁주려고 보낸 사자까지 찢어 죽였는데 그래도 멈추지 않고 갔다가 이것을 보지 않느냐? 이제는 진짜 멈춰야지" 하고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임한 것입니다. 또 멈추라고.
지금 하나님이 삼손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그 안에 내적으로 계속 갈등하게 하는 하나님의 영이 그를 두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계속 위에서 찰라흐(צלח)합니다. 소나기가 퍼부어 쏟아붓듯이 그를 계속 막아 세웁니다. 그런데도 삼손은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왜 멈추지 않을까요? 화가 나니까. "이것들을 내가 가만히 두지 않겠다." 지금 겉옷 삼십 벌과 베옷 삼십 벌을 빨리 구해서 줘야 되니까 그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기 돈으로 주면 되는데, 그것 손털고 나와 버려야 되는데,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갑니다. 아스글론도 블레셋 도시입니다.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죽입니다.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 집으로 올라와 버렸습니다."
분노가 명분 없는 살인을 만들었습니다. 블레셋과 지금 전쟁 중입니다. 블레셋과 대치 중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압제합니다. 그런데 블레셋과 전쟁할 때도 명분이 있어야 되고 이유가 있어야 되고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명분도 없습니다. 말씀도 없습니다.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가서 죽여 버립니다. 왜? 자기 분노 때문에. 하나님이 막으셨거든요. 성령께서 임해서.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였던 그의 친구에게 준 바 되었더라." 그 친구들 중의 한 명, 거기 왔던 삼십 명 중에 한 명에게 줘 버렸습니다. 그리고 삼손은 집에 와 버렸습니다.
이것이 14장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14장 이야기의 시작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딤나에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한 여인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보는 것부터. 보는 것이 대단히 무서운 것입니다. 삼손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봤느냐? 여인을 봤습니다. 그는 사사입니다. 사사가 봐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사사는 재판하는 사람입니다. 사사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사는 백성들을 영적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봐야 합니다. 그의 눈은 말씀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의 눈은 백성들을 보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고통 중에 절망 중에 애통하고 힘들어하고 블레셋 사십 년 치하에서 고생하는 백성들을 보고 있어야지, 그는 백성들 보지 않습니다. 말씀 보지 않습니다. 여인을 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이렇게까지 간 것입니다. 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난 욕망이 마음속에 성령의 감동도 무시하고 성령이 쏟아붓는 것도 무시하고 계속 가 버립니다. 계속 계속.
우리가 지난 주일 예배 때 말씀드렸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은, 안목의 정욕이 육신의 정욕에 포함되는 것 아닙니까? 육신 속에 눈이 들어가니까. 그런데 왜 안목의 정욕을 한 번 더 강조했느냐? 보는 것이 그만큼 무서우니까. 사탄은 예수님을 산꼭대기에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을 보여 줬다고 했습니다. 일단 보여 줍니다. 보여 주면서 욕망을 끌어오르게 만듭니다. 삼손은 저항 없이 그 보여 주는 데 당한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그래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눈 감고 다닐 수 있습니까? 성경 읽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보고, 백성들 보고, 내 눈이 진짜 봐야 될 것만 봐야 합니다. 안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2. 반복되는 실패의 패턴
우리 교재에 보면 15장 말씀은 빠져 있는데요. 15장은 사건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15장 1절 한번 보십시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갑니다." 사고 쳤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이 난 것입니다. 이 여인이. 찾아갑니다. 염소 새끼 한 마리 들고. 저가 집에 가는데 염소 새끼 들고, 이제 화해하려고. 좀 빈약합니다. 그 큰 사고 친 것으로 보면.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15장 1절 시작도 어떻게 시작합니까?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15장 1절의 시작입니다. 15장의 시작. 장인이 어떻게 합니까?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14장의 시작이 "한 여자를 보고"였고, 15장의 시작도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입니다. 그러면 15장의 끝이 어떻게 될까요? 안 봐도 뻔하지 않습니까? 파국입니다. 또 내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장인이 왜 못 들어오게 했을까요? 이미 이 여인을 친구에게 줘 버렸으니까. 그래서 장인이 막 화들짝 놀라 가지고 "안 된다, 못 들어온다" 막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동생이 더 예쁘니까 "동생을 줄게" 하니까, 삼손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2-1. 여우 삼백 마리 사건
분노가 또 치밀어 올라 가지고 갑자기 들판으로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잡습니다. 여우 삼백 마리 잘 아시지요? 그 사건.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서 백오십 세트를 만듭니다. 어떻게 만드냐? 꼬리를 묶습니다. 두 마리씩. 그러면 백오십 세트가 나옵니다. 그리고 여우 꼬리 사이에 횃불을 꽂아 버립니다. 불을 붙인 횃불을. 그러면 여우가 어떻게 될까요? 펄쩍펄쩍 뜁니다. 불이 막 자기 털에 옮겨 붙으니까. 그래서 백오십 세트를 블레셋 사람의 들판에다가 풀어 버립니다. "밀 거둘 때"라 했습니다. 추수할 때입니다. 곡식 거두는 들판에다가 다 풀어 버립니다. 포도밭에, 감람나무 밭에 다 풀어 버립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쑥대밭이 되었겠지요. 너무너무 화가 나니까 여우 삼백 마리 잡아다가 백오십 세트 선물을 블레셋에 뿌리고 가 버렸습니다.
삼손이 이렇게 하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요? 삼손을 잡아죽일 힘은 없고, 그래서 이 일의 원인을 제공한 이 집 여인과 그 아버지를 불에 태워 죽입니다. 그러면 삼손이 어떻게 할까요? "그래, 그러면 내가 또 복수하지." 그래서 또 복수합니다.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고,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으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이제는 어떻게 할까요? 전쟁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에다가. 군대가 결집합니다.
2-2. 염려거리가 된 사사
지금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블레셋과 함께 싸우라고 내놓은 사사가 사고 치고 다니니까, 지금 사사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만납니다. 다섯 방백들을. 블레셋은 오부족 연합체입니다. 다섯 도시마다 방백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들을 만납니다. "우리는 잘못이 없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느냐? 사사 하나 잘못 세운 죄지. 그놈이 사고 쳤지. 우리가 사고 쳤느냐?" 하고 읍소를 하니까, 블레셋 사람들도 이 사람들과 전쟁한다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말합니다. "그러면 삼손 잡아 와. 그러면 전쟁하지 않을게."
삼손을 어떻게 잡아 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단 군대 삼천 명을 모읍니다. 삼천 명 군대를 모으고 삼손을 찾아갑니다. 그가 은신해 있는 곳에 가서 삼손을 설득합니다. 삼천 명 아니라 삼만 명이라도 되겠습니까? 사자 찢어 죽이는 삼손인데, 여우 삼백 마리 맨손으로 잡아서 불붙여서 보내는 삼손인데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읍소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 제발 좀 해결하자." 그러니까 순순히 삼손이 미안했던지 양심이 있었던지 순순히 나옵니다. 그리고 밧줄에 매입니다. 그냥 그것 하나 툭 끊어 버리면 끝나는 것이지만 밧줄에 묶깁니다. 그리고 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보면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입니다. 사사가 백성들을 걱정해야 합니다. 사사가 백성들을 위해서 지금 현실 문제를 해결해 줘야 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러라고 하나님이 그를 세워 놓았는데,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그를 그 자리에 앉혀 놓았는데, 그런데 사사가 백성들에게는 걱정거리가 됩니다. 염려거리가 됩니다. "저 사람이 사고 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잠을 못 자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여러분, 이런 일이 지금은 없습니까? 가정에서 우리 아이들 기도 제목 받아 보면요. 우리 자녀들이 부모 걱정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우리 가정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문제가 없다. 다 괜찮다. 엄마 아빠 싸워 가지고 걱정이라고. 엄마 아빠 때문에 너무너무 걱정이라고 힘들다고." 그것 때문에 우울해하고, 그것 때문에 인생 문제 겪고, 그것 때문에 염려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보십시오. 지금 그것 때문에 탈선하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아이들. 삼손 때문에 힘겨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습니다.
이 시대 교회 목회자들. 아니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들, 성도들 돌보라고 목회자들 세워 놨더니 목사들이 성도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염려거리가 되고. "우리 교회는 목사님만 사고 안 치면 다 괜찮은 교회라고." 이게 말이 됩니까? 할 소리입니까? "목사님 그냥 좀 가만히 계시면 좋겠는데, 제발 좀 저 입 조심하면 좋겠는데." 그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이 현실이 사사 시대는 아닙니까?
우리가 부모라면, 우리가 목회자라면, 우리가 중직이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일터와 그 자리에서 세움받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나보다 어린 사람들, 내가 돌봐야 할 사람들에게 염려거리는 되면 안 됩니다. 걸림돌이 되면 안 됩니다. 적어도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아야지 그것이 정상입니다. 부모가 사고 쳐서 자녀들에게 짐덩어리가 되고, 중직들과 목회자들이 사고 쳐서 교회에 짐이 되고, 우리나라는 정치인만 괜찮으면 정말 좋은 나라 아닙니까? 그들이 문제 일으키고 그들이 사고 쳐서 이 나라 백성들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이런 이상한 일들이 삼손 시대만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고 치고 문제 일으키는 사람이 양심의 가책이 없을까요? 왜 없습니까? 삼손처럼 성령께서 그 마음에 계속 찔러댑니다. 그런데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 관성이 너무 강해서 계속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제어하지 못하거든요. 이제는 그 부모도. 마지막에 어떻게 됩니까? 마지막에 삼손의 마지막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막아 세우시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봐야 합니다.
2-3.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삼손
그렇게 되니까 이제 삼손이 묶깁니다. 묶기는데 그것이 묶긴 것이 묶긴 것이 아닙니다. 15장 14절 한번 보시면,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이제 블레셋 사람들이 꽁꽁 묶인 삼손을 보고 왔습니다. 가서 그를 이제 목을 따려고 막 달려옵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했습니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여기에 여호와의 영은 삼손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그를 돌이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죄 지어도 잘못해도 하나님이 너를 사용하시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15절과 16절을 보시면,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 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무기도 없었습니다. 지금 눈앞에 나귀 뼈가 하나 있었습니다. 턱뼈가. 그것을 들고 때렸는데 블레셋 사람 천 명을 다 죽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것을 보면 삼손이 "하나님이 나라는 인간도 사용하시는구나, 나 같은 쓰레기 같은 인간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구나" 그것을 알고 돌이켜야 되는데요. 16절을 보세요. 천 명 죽이고 뭐라고 합니까? "이르되 나귀의 턱뼈 한 무더기 두 무더기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자기 자랑입니다. 자기 과시.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시는군요" 하고 딱 무릎을 꿇든지, "하나님께서 이 나귀 턱뼈로도 블레셋을 이기게 하시니 이제 제가 정신 차리고 가겠습니다" 하든지. 그런데 '내가'라는 말을 합니다. 여전히 사명감과 자기 애 가운데 이 사람은 여전히 자기 애에 물들어 있습니다. 자기 사랑입니다.
그다음 18절, 19절,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천 명이나 나귀 턱뼈로 죽였으니 얼마나 땀이 나고 목이 마를까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입니다. 불평합니다. 원망도 하고 불평도. 목말라 죽겠다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 나오는지라." 하나님 참 좋으십니다. 그에게 계속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을 우리가 잘 압니다. 엔학고레(עין הקורא)라고 이름합니다. 엔학고레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부르짖는 자의 샘. 누구 중심입니까? 삼손이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물을 주셨다. 그러면 이것을 좀 바꿔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샘' 뭐 이렇게 하든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샘물'이라고 하든지, 무엇이든지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 인생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사무엘이라는 사람이 평생을 목회를 했습니다. 그가 노년에 은퇴하기 전에 돌을 하나 세웠습니다. 그 돌 이름이 무엇입니까? 에벤에셀 아닙니까? 에벤에셀. 에벤에셀 돌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내가 여기까지 사역을 잘했다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그것이 평생 하나님 앞에서 사역한 사람의 자기 고백입니다. 평생 동안 사무엘은 자기 영광을 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평생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한 사람의 마지막 결론이 에벤에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도움의 돌.
그런데 이 사람, 엔학고레. 부르짖는 자의 샘. 내가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여기서 샘을 주셨다. 끝까지 자기 중심적입니다.
여러분, 14장의 시작도 '보다'로 시작했고, 15장의 시작도 '보다'로 시작했습니다. 그 결론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가 봐야 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백성들이었는데, 그는 여자를 봤습니다. 백성들 보지 않습니다. 성경 보지 않습니다. 결과가 이렇게 됩니다.
3. 삼손의 마지막
16장은 어떻게 될까요? 1절,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또 봅니다. 지겨운 인간입니다. "가사에 가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러면 16장의 마지막도 어떻게 될까요? 뻔합니다. 그런데 16장은 좀 다르긴 합니다. 그런데 삼손의 인생을 정리하면 14장, 15장, 16장 1절이 다 결론부터 내려집니다. 보고, 보고, 보고입니다.
"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이제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었습니다. 그 밤중에 일어나 성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가사에서 헤브론 앞산 꼭대기까지 대충 감이 안 오시지요? 그런데 육십 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거리가. 그리고 산 꼭대기라 했습니다. 헤브론 산 꼭대기가 해발 구백 미터 고지입니다. 그러면 육십 킬로미터 달려서 산꼭대기까지 구백 미터를 올라간 것입니다.
그가 맨몸으로 갔습니까? 아니. 우리는 이해가 안 됩니다. 도망을 가려면 혼자 맨몸으로 도망가야지. 이것을 왜 들고 갑니까? 성문짝들, 문설주, 문빗장 이것을 빼 가지고 육십 킬로미터를 달렸다? 만화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삼손이 이것을 들고 갔습니다. 왜 갔느냐? 어떻게 갔느냐? 어떻게 그가 그 능력을 가지고 갔을까? 이것은 우리의 관심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자도 찢어 죽이고 하나님이 그에게 힘을 주셨다 하니까 그것은 가능하다 치고, 왜 갔느냐가 중요합니다.
3-1. 조롱과 모욕의 패턴
왜 그랬을까요? 여러분, 고대 사회에서 성문은 그 성의 중심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 광화문 있습니다. 광화문. 임금님이 사시는, 지금도 광화문에 가면 화려합니다. 다른 성문 말고 광화문은 화려합니다. 중국에 가면 임금님이 사셨던 큰 성의 성문이 있고, 유럽에 가도 큰 성의 성문이 화려합니다. 그 성문은 그 성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래서 성문에는 그 성에, 그 나라의 문양을 새겨 놓습니다. 그리고 성문 지키는 사람들이 다 구석구석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문짝들을 떼 버렸습니다. 그것은 굴욕을 주는 것입니다. 성을 무방비 상태로 만든 것입니다. 문설주도 들고 갔습니다. 문빗장도 다 빼 가지고 갔습니다. 성문을 잠그는 가로지르는 문빗장도 빼 가지고 다 들고 가 버렸습니다. 이것은 그 성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 하나를 막지 못한다." 블레셋을 조롱하고 모욕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손의 패턴입니다.
삼손이 지금까지 한 것을 보십시오. 수수께끼 냈습니다. 수수께끼 내서 결론은 어떻게 하려고? 그 사람들을 욕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우 삼백 마리 잡아서 백오십 세트 만들어서 푼 것. 그것도 그냥 가서 그 원수들만 죽이면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여우를 가지고 쑥대밭 만든 것.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것입니다.
삼손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그 공동체를 화나게 만드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어떤 사람이랑 이야기만 하면 기분 나쁜 사람 있지 않습니까? "아, 저 사람 표정만 봐도 기분 나쁘고, 말하는 것이 항상 누군가를 비웃고 실실 웃고 뭔가 꼬투리 잡고, 같이 10분만 있어도 10시간 동안 조롱당한 것 같은 기분 나쁜 사람들" 있습니다. 그 삼손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대로 봤습니다. 그대로 그대로 돌려봤습니다.
하나님은 명분 없는 전쟁 못 하게 하셨고, 하나님은 누군가와 전쟁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기를 원하셨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건드리고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문짝 떼 가고 문빗장 들고 가고 문설주 들고 가고, 그 성을 완벽하게 욕보이는 것,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조롱과 모욕과 자기 과시입니다. 이것이 삼손이 지금까지 했던 패턴입니다.
3-2. 들릴라를 사랑함
4절, "이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에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함에" 사랑했습니다. 아하브(אהב)라는 히브리어를 썼는데요. 이것이 얼마나 낭만적인 단어냐 하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였더라 할 때 아하브(אהב)라는 단어를 씁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해서 십사 년 동안 종처럼 일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전 존재를 헌신하고 거기에 마음을 줬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여기에는 '보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괜찮은가? 그것이 아닙니다. 보세요. 14장에 보고, 15장에 보고, 16장에 보고, 대상이 다 다릅니다. 지금. 그런데 16장에 들릴라가 오니까 마음이 그쪽으로 가 버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보는 것입니다. 눈으로 봤습니다. 보고 사랑하고.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마음이 가는 것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도 그를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도 그를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그에게 강하게 임했다는 말도 이제는 없습니다. 여전히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감동은 주시겠지만, 그는 이제는 마음을 다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패턴입니다. 더 깊이 더 깊이 더 깊이,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게끔 죄로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의 발걸음과 같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 갑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삼손을 잡을 수 있을지 네가 알아보라." 똑같습니다. 처음에 삼손이 결혼했던 그 골짜기 딤나의 여인과 똑같습니다. 그러면서 방백들이 현상금을 겁니다. 각 방백이 은 천백씩을 겁니다. 블레셋은 오부족 연합체라 했습니다. 다섯 도시가 도시 국가를 이루었다 했습니다. 그러면 방백 하나가 은 천백을 냈다면 다섯 방백이니까 합치면 얼마입니까? 오천오백 세겔.
그 당시 은은 세겔 단위이니까, 이제 이쯤 되면 우리는 항상 궁금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가치로 얼마쯤 될까? 이것이 너무 궁금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속물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당연히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계산을 한번 해 보면, 그 당시 노예가 있었던 시절이니까 성인 남자 노예가 은 삼십 세겔에 매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일 년 치 성인 남자의 연봉이 한 십 세겔 정도 됩니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 십 세겔. 그런데 오천오백 세겔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십 세겔과 오천오백으로, 동그라미 하나씩 떼면 오백오십 년입니다. 한 사람이 오백오십 년 연봉입니다. 그러면 아주 소박하게 잡아서 일 년 연봉 사천만 원만 잡아 볼게요. 계산하니까 이백이십억이 나옵니다. 이백이십억. 이것이 오늘의 가치로 우리 원화 가치로.
그러면 들릴라가 삼손을 얼마나 사랑했을까요? 이백이십억보다 더 사랑했을까요? 삼손은 사랑했는데, 삼손은 야곱처럼 낭만적으로 사랑했는데, "나 당신을 위하여 아하브(אהב)하겠다"고, 내 모든 존재를 다 걸겠다고 사랑했는데, 블레셋 여인 들릴라는 그만큼 사랑했을까요? 이백이십억 준다는데. 결론을 보면 이 여인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했다면 이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삼손이 바보입니다. 바보. 제가 더 심한 말 하고 싶지만 바보입니다. 자기 혼자 보고 그리고 사랑하고.
이제 여인이 막 죽는 소리 합니다. 그러니까 삼손이 이야기를 합니다. 장난치는 것입니다. 7절, "만일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그렇게 됩니까? 새 활줄 일곱 묶었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오니까 툭 터뜨리고 멀쩡하게 일어납니다.
이렇게 되었으면 삼손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상이라면 여인의 뺨을 때리고 그리고 자기 갈 길 가야 됩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똑같이 들릴라와 똑같이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또 여인이 죽는 소리 합니다. 두 번째. 11절, "만일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 이것도 역시 거짓말이니까 똑같습니다. 두 번째도 삼손은 여인에게 속은 것입니다. 그래도 삼손은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아하브(אהב)하니까. 사랑하니까. "왜 그랬어?" 이런 것 묻지도 않습니다.
여인이 "당신이 나를 이렇게 속여도 되냐?"고. 또 세 번째 이야기하니까,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14절,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지 내게 말하라 하니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짠다면 되리라 하는지라."
여러분, 좀 느낌이 오십니까? 정답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답에 근접해 가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계속해서 정답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계속 두드리니까 됩니다. 사탄이 계속 시험합니다. 했습니다. 사탄의 시험은 쉬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두드리니까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계속해서 정답에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들릴라가 이렇게 해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16절,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여러분, '날마다'라는 말 어디서 보셨습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날마다 동침하기를 청하니." 사탄이 너무 똑같습니다. 마귀 사탄의 패턴이 성경에 다 나옵니다. 우리 보고 배우라고, 그것 피하라고.
그런데 삼손이 어떻게 합니까?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진짜 삼손이 번뇌해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이 백성들을 건져낼까? 어떻게 하면 이 백성을 구원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사사로 바로 살아서 이 백성과 이 나라를 바로 세울까?" 그것을 번뇌해야 되는데 이 여인 때문에 번뇌하여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죽어 버려야 됩니다. 그렇게 죽을 거면 죽어야지. 그것이 지금인데.
3-3. 삼손과 요셉의 차이
삼손과 요셉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요셉은 도망갔습니다. 그냥 겉옷 벗어 두고. "내가 나를 아니까." 그런데 삼손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 자신감이었을까요? "머리까지 밀려도 상관없다. 나는 힘이 있다."
보십시오. 17절,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이것을 블레셋 여인 들릴라에게 할 소리입니까? 그래서 머리가 밀립니다. 그 이야기 해 놓고 그 집에서 잡니다. 그대로. 그러니 이 사람은 지금 세 번째 언약을 깹니다. 처음에 시체, 그다음 포도주와 독주, 세 번째 나실인 서원. 삭도 대지 말라. 다 어깁니다. 언약을 다 스스로 다 깼습니다. 피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자신이 약한 것 알면 피해야 되는데 절대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 밀리고 다시 와도 나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있는 그대로의 말씀이므로 우리는 그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를 보십시오. 들릴라와 삼손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은 사람이 누굽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더 믿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이 성실하신데 사탄도 성실하다"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얼마나 성실합니까? 세 번 실패해도 네 번 도전하고. 그런데 삼손은 말씀 앞에 성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망하는 것입니다.
19절,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게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테스트도 한 것입니다.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니" 이것을 보세요. 삼손은 하나님 말씀 믿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그러면 삼손의 힘은 머리카락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에게 있었습니까? 하나님에게. 하나님이 떠난 것이지. 머리카락에 마법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매개로 삼아서 그가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를 보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까지 언약을 깨뜨려도 하나님은 마지막 남은 머리카락에, 이 보루를 붙들고 그가 이 언약만큼은 지키기를 하나님도 기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머리카락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카락을 가지고 하나님이 붙들고 싶었던 말씀의 약속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3-4. 하나님의 사랑, 눈을 빼심
잡혀갔습니다. 잡혀갔는데 블레셋 사람에게 삼손은 재앙입니다. 여우 삼백 마리 사건이 기억납니다. 가사의 성문 문빗장과 문을 빼 가지고 거기 모든 것 다 들고 육십 킬로미터를 달려간 삼손은 그들에게 재앙입니다. 그러면 블레셋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삼손이라는 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요? 그들이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삼손을 그들의 놀이로 쓰고 싶었습니다. 놀이개로. 왜? 삼손이 그들을 조롱했으니까. 삼손이 그들을 모욕했으니까.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가지고 그들의 놀이개로, 그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그러면서 유희를 즐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발목을 자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는 데리고 놀지를 못하니까. 발목을 자릅니다. 그런 것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무엇이냐? 눈을 뽑아 버린 것입니다.
21절,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가사가 어떤 곳입니까? 그가 성문 빼고 문지방 들고 갔던 그곳. 그가 가장 모욕했던 그 성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여러분, 눈이 빠졌습니다. 보고 사랑했더니 하나님은 눈을 뽑아 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삼손 이야기는 결국 눈입니다. 눈. 보는 것.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5장 29절과 30절, 예수님 하신 말씀입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눈 하나 없다고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요. 오른손 하나 찍혀 없다고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멀쩡한 사지 육신으로 지옥 가는 것보다 눈 없이, 손 없이 천국 가는 것이 낫다.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삼손을 사랑하셔서 눈을 뽑아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시니까. 사랑하시니까. 이것이 역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지막에 삼손의 눈을 뽑는 데까지 갑니다. 그것을 삼손이 깨달았건 깨닫지 못했건. 슬픕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여러분, 우리는 머리털에 능력이 있다고, 이제는 능력이 없다고 합니다. 머리털 자체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은유입니다.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삼손에게 임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보세요. 23절,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그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모욕하는 것입니다. 삼손이 뿌린 대로 그대로 받습니다.
두 눈이 뽑힌 삼손이 마치 짐승처럼 끌려나옵니다.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노래를 시키고, 춤을 추게 하고, 희롱하고.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거기서 웃고 자지러지고 즐거워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가 이런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3-5. 삼손의 마지막 기도
28절을 보십시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마지막 기도입니다.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안고 의지하고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하였습니다. 삼천 명이 모였습니다. 여기에 삼천 명이 다 죽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비극으로 끝나는데 삼손은 끝까지 이야기합니다. "내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 원수를 갚게 해 달라"고. 자기 원수 갚고 끝냈습니다.
4. 삼손에게서 배우는 교훈
삼손이라는 사람을 우리가 교훈으로 보면,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 했고, 삼손은 하나님이 준비한 큰 그릇이었습니다. 자기 아버지 때부터 시작해서 성령께서 그를 움직이셨고, 성령이 그를 두드렸고, 성령이 그를 울렸습니다. 마음속에 잘못된 길로 갈 때 성령이 찰라흐(צלח) 비같이 쏟아져서 그를 멈추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는 그릇이 크게 준비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준비된 것을 마음껏 누리고 뛰어다니려면 성령의 음성에 순종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만큼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한 것입니다. 그것을 결국은 못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 원수 갚는 것으로 끝납니다. 많은 것이 준비되었지만 그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고 요만큼으로 끝내 버린 사람이 삼손이었습니다.
똑같은 사람 한 사람 더 있습니다. 솔로몬. 아버지가 다윗입니다. 많은 것을 하나님이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상숭배로 마지막을 그렇게 보내고 맙니다. 다윗에게는 많은 것이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사명에 충실했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큰 일을 이루어 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삼손을 통해서 잘 보십시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이만큼 많아도 요것밖에 못 하는 사람이 있고, 요것밖에 없어도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운명은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삼손 이야기는 슬프게 끝나지만, 우리 인생은 슬프게 끝나면 안 됩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삼손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봅니다. 삼손은 여자를 보았습니다. 보고, 보다가 사랑했고, 그는 사명을 팽개치고 잃어버렸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내 눈이 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시고, 내 눈이 보는 것이 사명이 되게 하시며, 내 발이 가는 곳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오늘 우리가 무엇을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까? 사명자입니까? 자기 중심적입니까? 삼손처럼 자기 중심적으로 살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백성들의 염려와 걱정거리가 되었던 삼손처럼 우리도 자녀들에게 염려가 되고 걱정거리가 되고, 아직까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손에 입에 오르내리는 염려되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주여 우리를 고쳐 주옵소서. 적어도 자녀들에게는, 우리 믿음의 후배들에게는 존경받는 사람 되도록 도우시고,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도우시고, 걱정과 근심과 염려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많이 준비되었으나 자기 원수만 갚았던 어리석은 삼손처럼 살지 않도록 도우시고, 비록 우리가 지금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 많이 쓰임받는 하나님의 자녀, 훌륭한 다윗 같은 존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