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다 / 전체녹취

강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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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릿 여부

사사기 특강(1) -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다(삿 1장)

서론: 사사기 특강 시작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사사기 1장 1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더라" (삿 1:19)

오늘부터 사사기 특강을 시작합니다. 14주 동안 사사기 1장부터 21장까지를 함께 공부합니다. 개인 묵상집을 가지고 계신다면 함께 활용하시면서 이 자리에서 공부하고 또 가정에서 개인 묵상도 하시면 훨씬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사기는 짧은 책이고 이야기가 많습니다. 모두 스토리, 전쟁 이야기 등의 이야기라서 읽기는 쉽지만 대단히 복잡한 책이기도 합니다. 사사가 12명이나 나오고 그 안의 스토리도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함께 14주를 열심히 완주하면 좋겠습니다.

사사기 개관: 어떤 책인가?

1. 영웅의 시대 이후의 이야기

사사기가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웅의 시대 이후에 일어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영웅의 시대라고 할 때 그 영웅은 모세와 여호수아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영웅이고,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의 영웅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와 함께 일하실 때는 대단히 편하셨습니다. 모세하고만 이야기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도 편했습니다. 모세 이야기만 들으면 되고, 여호수아 이야기만 들으면 만사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자 역할을 했던 시대를 우리는 영웅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상황은 특수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때는 광야 상황이었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때는 전쟁 시기였습니다. 광야 시기와 전쟁 시기는 지휘 체계가 일사불란해야 합니다. 광야 생활과 전쟁 시기는 힘들었지만 백성들의 생활이 훨씬 단순했습니다. 한 분의 말만 들으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2. 분별의 시대로의 전환

이제 사사시대로 넘어오면서는 분별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 분 이야기만 듣다가 이제는 본인이 선택하고 본인이 분별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정착 시기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시고, 중요한 거점 도시 48개 성읍을 정하셔서 레위지파를 세우셨습니다.

레위지파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1. 말씀교육(신앙교육)
  2. 제사(예배)
  3. 재판(판단)

신앙교육과 예배, 그리고 갈등이 생기면 재판해주라고 레위지파에게 맡기셨습니다. 이는 왕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정착생활을 하면서 레위지파가 가르쳐주고 전해주는 말씀을 중심으로 그들이 알아서 판단해서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본인이 분별하고 본인이 판단하고 본인이 책임지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분별만 잘하고 판단만 잘하고 결정만 잘 내리면 정착 시기가 훨씬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판단과 분별을 못해서 엉뚱한 곳으로 가면 이 시기가 재앙의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3. 현 시대와의 비교

사실 우리 시대와 비슷합니다. 대한민국 지난 100년을 보면,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너무 힘들었습니다. 나라를 잃었고, 불세출의 위대한 민족 지도자들과 기도하는 사람들, 훌륭한 목사님들이 있었습니다. 전쟁 시기에도 그랬고 나라가 가난했을 때도 대형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간 훌륭한 목회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시대가 다 지나갔습니다.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은 천국에 가시고 지금은 이 나라도 사사시대 같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분별하고 우리가 판단해야 하는 시기,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내가 결정해야 하는 시기인데, 지금 왜 이렇게 혼란한 시대가 되고 말았는가? 사사시대처럼 분별, 결정, 판단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레위지파가 엉망이었습니다. 레위지파가 말씀 교육을 하지 않았고, 예배 교육을 하지 않았으며, 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위임사항을 모두 이탈했습니다. 레위지파의 타락은 사사기 17장부터 21장까지 잘 나타납니다. 레위지파가 자기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사사시대의 특징

1. "왕이 없을 때"의 의미

사사기 21장 25절: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왕이 없다"는 말이 사사기 전체의 주제입니다. 이는 이중적 의미입니다.

첫째, 진짜 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정 국가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왕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왕이 없어서 백성이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둘째, 사람 왕이 있다 하더라도 진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 참된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을 제거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없애버리고 자기 멋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가 있었을 때는 그분들이 주는 말씀대로 살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말씀이 주인이 되어서 본인이 말씀을 받고 읽고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했는데 그것을 못했습니다.

2.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지 않음

로마서 1장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과 40년을 동행했고,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잘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을 아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입니다.

3. 죄-고난-부르짖음-구원의 반복 패턴

사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 고난, 부르짖음, 구원의 패턴이 반복됩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고, 고난당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고, 그러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십니다. 구원의 시간이 지나면 또 죄짓고, 또 고난당하고, 또 부르짖고, 또 구원해주고, 이것이 계속 쳇바퀴 돌듯이 반복됩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련함 - 한 번 그랬으면 그 다음에는 이 패턴을 익혀서 죄짓지 않아야 하는데 똑같이 죄에 빠집니다.
  2.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인내 - 이 미련한 백성들이 계속 죄를 짓는데도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십니다.

사무엘상 8장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왕이 없었다, 백성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귀찮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귀찮고 버겁고 부담스러워서 버린 것입니다.

여호수아 사후 이스라엘의 첫 기도

1. 영웅 시대의 종료와 새로운 시작

사사기 1장 1절: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데 굳이 여호수아의 죽음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영웅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너희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고 따랐던, 그러나 그 말씀은 듣지 않았던 너희의 영웅 여호수아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었는데 백성들이 어떤 일을 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족속과 싸우리까" (삿 1:1)

두 가지를 봐야 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족속이 모여서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다 해주고 모세가 다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다 말씀하시니까 백성들이 직접 하나님께 물을 이유와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영웅의 시대가 갔습니다. 이 백성들이 모여서 자기들이 직접 묻고 있습니다. 상황을 상상해 보면, 이들이 불안하지 않았을까요? 여호수아가 죽었는데 우리가 기도하면 들어줄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실까? 하나님이 과연 대답이나 하실까? 그래도 한 번 해보자. 이래서 이들이 질문한 것입니다.

2. 질문의 내용과 의미

질문의 내용은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갈까?"입니다. 이 질문을 왜 했을까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 열두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것이 완벽한 정복이 아니었습니다. 어중간하게 정복한 것입니다. 아직까지 가나안 일곱 족속의 잔당들이 그 땅 산골짜기와 깊은 산속 여기저기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때 계속 "올라가서 쫓아내라, 제발 잔당들을 털어내라"고 했는데 지독스럽게 말을 듣지 않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수아가 죽고 나니 덜컥 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 중에 누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되겠습니까?" 남아있는 숙제를 누가 먼저 하면 좋겠습니까?

3.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하고만 대답하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 평신도들이 물어도 대답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삿 1:2)

유다지파를 올려보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조차도 영웅의 시대에서 평신도의 시대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셨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모세하고 여호수아하고만 중요한 대화를 하셨는데, 이제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로 가고 평신도들이 물어도 누가 물어도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을 때 제자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자기들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가버렸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이 기도해 주셨는데 가버렸습니다.

사도행전 1장 13-14절: 제자들이 예수님 승천 후에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이제 철든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1절: 제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들었던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체포당하시기 전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기도하시던 그 순간에 "너희가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해 줄 수 없겠더냐" 하시던 그날에 그들의 눈이 피곤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계속 잠들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입니다. 내가 기도해야 합니다. 영웅의 시대가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거대한 거인들이 있던 시대가 지나면 우리는 그 시대를 그리워합니다. 그때 좋았는데, 그분들이 이만큼 일을 했는데 우리에게는 이만큼 무용담으로 마치 전설처럼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시대가 그립기 때문에, 오늘 이 시대가 너무 황폐하고 빈약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은 기도 안 하는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그때 기도해 주셨다면 이제는 우리의 몫이 된 것 아닙니까?

성경이 알려줍니다. 모세하고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들과 대화하셨는데 이제 평신도들이 기도해도, 이름 없는 누군가가 기도해도 하나님이 그들과도 대화하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승천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것이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얼마나 후회했을까요? 그때 조금 기도할 걸, 그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도 조금 기도할 걸, 잠만 자고 있었구나. 기도하니까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고, 제9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니까 올라가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도 일으켜 세우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교회가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하니까.

사사시대는 영웅의 시대가 한 페이지 저물고 평신도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쟁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그 책임은 자기가 져야 됩니다.

유다지파의 순종과 불순종

1.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

하나님의 첫 번째 대답이 "유다가 올라가라"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유다지파로 올라가라고 했을까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유다지파가 인구가 제일 많다는 것, 유다지파의 갈렙이 먼저 헤브론을 정복한 이후라는 것 등이 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 49장 8-9절, 야곱의 축복: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그리고 나서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축복이 유다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모든 백성들, 자기 형제들을 건져내고 구원했지만, 중요한 것은 유다가 그 정통성을 계승한 것입니다. 이 예언이 여기에도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유다가 모든 지파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다가 올라가라고 한 것입니다.

2. 유다의 자의적 판단

유다지파는 말씀을 받았으니까 말씀대로 올라가면 됩니다. 그런데 유다지파가 어떤 일을 했는지 보십시오.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삿 1:3)

누구를 데리고 갑니까? 여러 평가들이 있습니다. 유다가 동역하려고 그랬다고 하는 분도 있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입니다. 부정적인 평가입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열두 지파가 땅을 분배할 때 지도를 보면 유다지파 안에 시므온 지파가 들어와 있습니다. 시므온 지파는 아주 작은 지파입니다. 유다지파 경내 안에 더부살이하고 있는 지파입니다. 시므온 지파는 유다에게 얹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같이 갈래? 우리 같이 가서 한 번 해볼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너희가 나중에 갈 때 우리도 가줄게." 그러면 시므온은 이것을 거절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제일 덩치 좋은 아이가 제일 약한 아이한테 청을 하는데 어떻게 거절합니까?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들이 볼 때는 좋아 보입니다. 동역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유다야 너 시므온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셨느냐는 문제입니다. 진짜 유다가 시므온 데리고 가고 싶으면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시므온 데리고 갈까요?" 물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런 절차 생략, 그냥 시므온 데리고 올라갑니다.

여기서부터 "그때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별해야 합니다. 사사기 시작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좋아 보이는 것이 하나님 보실 때도 좋아 보이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말씀이 이랬으면 그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래라" 하면 그대로 하고 "하지 마라" 그러면 그대로 안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왜 토를 달까요? 거기에 왜 물타기를 합니까? 거기에 왜 자기 생각을 넣습니까? 유다가 잘못한 것입니다.

3. 성경의 기록 방식

그런데 보십시오. 4절을 보면 "유다가 올라가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므온이 같이 갔다고 했는데, 성경 기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만 올라가라고 하셨으니까 성경은 유다와 시므온이 같이 가도 시므온을 빼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올라감에"라고 한 것입니다. 시므온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족속과 브리스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삿 1:4)

8절에도 보면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다"(삿 1:8)고 되어 있습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같이 갔다고 했는데 시므온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경이 시므온을 빼버렸습니다. 성경이 절대로 시므온을 기록해두지 않습니다. 성경이 시므온을 기록하지 않고 유다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니까.

4. 아도니베섹 사건

5-7절을 보면 끔찍한 일이 나옵니다. 아도니베섹은 베섹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즉 베섹이라는 지역의 대장입니다. 이 사람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족속과 브리스족속을 죽였습니다. 아도니베섹이 도망했는데 그를 쫓아가서 잡았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랐습니다.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전투를 못합니다. 일단 무기를 잡지 못합니다. 걷지를 못합니다. 죽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밥을 못 먹습니다. 집는 것이 불편하니까. 이런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적이 이전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헤렘명령을 내립니다. 헤렘명령이 무엇입니까? 진멸하라, 다 없애라. 하나님의 명령은 다 헤렘명령입니다. 가나안 족속과 전쟁할 때는. 그런데 이들은 죽이고 대장을 잡아서 엄지손가락 발가락을 잘랐습니다.

7절에 아도니베섹이 자기 고백을 합니다: "옛적에 70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이것은 누가 한 짓입니까? 원래 아도니베섹이라는 자가 옛날에 70명의 왕들을 사로잡아서 이렇게 했던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그것을 당하고 나니까 옛날에 내가 했던 악행이 생각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미루어 짐작해야 하는 것은 이미 가나안족속의 문화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침투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유다족속에게. 유다지파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맏형 대장격 아닙니까? 하나님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까. 명령대로 행하면 그들이 올라가서 그들을 다 진멸하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잔인하게 이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이미 가나안 땅 사람들의 문화에 동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적의 수장을 왜 이렇게 할까요? 끌고 가서 예루살렘에서 죽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잔인하게 그들을 죽이는 이유는 우리가 너희 우두머리를 이렇게 잡아왔다, 자신의 강함을 보이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명령한 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두 가지, 시므온 데리고 갔고, 게다가 아도니베섹을 이런 식으로 처단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기도 잘했습니다. 평신도들이 모세와 여호수아의 뒤를 이어서 기도 응답받았습니다. 기도하고, 기도 응답 받았으면 그 다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응답한 대로 행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더하고 빼고 자기 멋대로입니다. 이것이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입니다.

우리는 그런 정신이 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그냥 전쟁에서 이기면 되는 것이지, 적에게 좀 겁을 줘서 엄지 손발 다 자르고 쫓아내면 되지. 그런데 하나님 말씀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세와 여호수아가 잘했던 것이고, 다윗이 잘했던 것입니다. 그냥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말씀 순종의 중요성

신명기 28장 1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삼가 들으라"고 했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라. 또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말씀대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듣고 행하는 것. 이것을 타협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그런데 우리는 약간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곧이곧대로 다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너무 좋아합니다. 3절에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 4절에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고",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 받고", "들어와도 복 받고 나가도 복 받는다." 전제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타협하지 않고, 시므온 데려가지 않고, 사람 손발 끊지 않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자기 멋대로 바꾸면서 나는 올라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는 다시 이 시대에 하나님 말씀 앞으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타협하지 않고.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제가 옛날에 청년들 사회 갈 때 청년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 중에 헌금에 대해서 가르칠 때, 십일조 감사, 선교 등등의 헌금에 대해서 가르칠 때 십의 일조를 성경적 원리와 이유를 쭉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질문을 하는데, 친구들이 여러 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중에 직장생활하는 친구들이 제일 많이 묻는 것이 "목사님 세전으로 합니까? 세후로 합니까?" 그것이 제일 많이 묻는 것이고, 그 다음 아직까지 용돈 받아서 생활하는 친구들은 "목사님 그것 이중 과세 같은데요? 우리 아버지가 십일조 다 냈는데 십일조 낸 것에서 제가 용돈을 받았는데 제가 또 십일조를 하면 그것은 이중 과세라서 다시 환급받아야 될 것 같다"고 합니다. 너무 똑똑한 것입니다. "하나님 그런 것은 원치 않을 것 같다. 아버지가 십일조 한 것을 내가 받았으니까 나는 이것이 면제되는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 명확한 입장을 설명해 달라."

마음의 문제 아닙니까? 그것이 세전세후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까? 아버지가 십일조 했으니 아들은 그 용돈 받으면 십일조 면제받는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쁘게 하라" 그랬습니다. "너의 힘에 지나치게 드리라" 그랬습니다. "억지로 하지 마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참 애매한 것입니다.

성경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그랬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문제거든요. 그 다음은 내 전심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계속해서 규정을 붙이고 이것을 붙이고 저것을 붙이기 시작하면 그것은 하기 싫은 것거든요.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다 아십니다. 사람도 알겠는데 사람 눈에도 다 보이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다 읽고 계신 하나님이 그것은 모르겠습니까? 다 아십니다.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안 하는 것이 낫습니다. 아예 안 해야지. 이것을 왜 합니까?

지금 이 사람들을 보십시오. 말씀을 대충대충 지키는 것입니다. 취사선택해서 안 할 수는 없고 하라고 하니까 하긴 하는데, 데려가고 끊어버리고 자기 멋대로. 그것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1장에서 읽어냅니다.

예루살렘 정복의 문제

8절: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쳤다, 점령했다고 되어 있는데, 21절을 보면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똑같은 예루살렘입니다. 유다지파는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했다고 했는데, 베냐민지파는 예루살렘의 여부스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유다지파가 완벽하게 끝장내지 못했다. 완전한 정복을 하지 못했다. 둘째,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이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의 경계에 있었다. 그럼 이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누구의 책임입니까? 교집합이거든요. A와 B의 교집합입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두의 일은 누구의 일도 아니다." 예배당 딱 가운데 통로에 휴지가 하나 떨어졌습니다. 딱 가운데. 누구의 일입니까? 누가 주워야 합니까? 이쪽 분단에 계신 분들은 면제됩니까? 아니면 통로에 계신 분들만 관계되는 것입니까? 계단에 껌이 붙어 있습니다. 누구의 일입니까? 교회에 뭔가 안전에 문제가 있는 물건이 내 눈에 보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일입니까? 관리집사님의 일입니까? 관리부장 장로님의 일입니까? 담임목사의 일입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모두의 일인데, 그런데 누구의 일도 아닙니다. 주방에서 밥 먹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모두의 일입니다. 먹고 사는 일이니까. 그런데 아무의 일도 아니게 됩니다. 문제는 A와 B의 교집합이 가장 늦게 색칠된다는 것. 그것이 교회입니다.

지금 이들도 이렇습니다.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가 그렇게 해서 유다지파는 "내가 할 거 다 했어. 이제 거기 있는 여부스족속은 니가 해"라고 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베냐민지파가 여부스족속을 못 쫓아내는 것입니다. 숫자가 작으니까. 그럼 그것을 누가 해줘야 합니까? 유다지파가 시므온 데리고 왔잖아요. 지금. 그러면 유다, 시므온, 베냐민이 힘을 합쳐서 거기에 살고 있는 여부스족속을 다 내몰아야 합니다.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라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부스족속을 못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언제까지 있었을까요? 역대상 11장 4-5절: "다윗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예루살렘 곧 여부스에 이르니 여부스 땅의 주민들이 거기 거주하였더라. 여부스 원주민이 다윗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 다윗이 시온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다윗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예루살렘 곧 여부스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누가 살고 있었습니까? 여부스 땅의 주민들이 거기 살고 있었습니다.

시대를 한 번 따져봅시다. 지금 사사기 1장의 시대가 기원전 1400년경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지금 이 시대는 역대상 11장의 시대는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시대입니다. 다윗이 먼저 유다지파의 왕이었습니다. 7년 반 동안 유다지파의 왕으로, 유다지파의 수도는 헤브론이었습니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제일 남쪽입니다.

그런데 통일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되니까 너무 남쪽에 수도가 처져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수도를 천도하는 것입니다. 열두 지파의 수도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으로 다윗이 정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성에 여부스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성을 쳐서 자기가 정복하고 그 성을 사람들은 다윗이 정복했기 때문에 다윗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그 성이 예루살렘이고 여부스 사람들이 오랫동안 거기 살고 있었고, 다윗이 빼앗았으니까 다윗성이고, 높은 산에 있었으니까 시온산성이 된 것입니다.

문제는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가 기원전 1000년쯤 됩니다. 그러면 이때 이분들이 "이것은 내 일이 아니야"라고 미루어 놓은 것이 몇 년 동안입니까? 400년. 거기 휴지 떨어진 것 지금 안 주우면 400년 동안 그대로 있습니다. 400년.

웃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을 못하면 400년 뒤에도 못한다니까요. 못합니다. 그것을 누가 합니까?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누가 하겠어요? 그것을 누가 해줍니까? 저 영혼 내가 불쌍히 여겨서 전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아, 힘들다. 내일 하자"라고 하면 400년 뒤까지 못 한다니까요. 교회에 여러 가지 불합리한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불합리한 것들, 성경적이지 않은 것들. 이것을 고치고 저것을 뜯어 고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수준 높은 교회로 계속 개혁되는 교회로 나아가려고 한다면, 그러면 오늘 뜯어 고치지 않으면 400년 뒤까지 못합니다. 절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여부스족속들을 내가 오늘 내몰지 않으면 그것은 내일 못합니다. 의지가 갈수록 약해지고, 이제는 걔들이 계속 거기 살았는데 "뭐 점유권 인정하고 놔두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그것이 타협입니다.

지금 보십시오. 올라갔는데 왜 못 쫓아내고 옵니까? 베냐민지파와 유다지파가 서로 미루다가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려면 우리 모두의 일은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덤벼야 합니다. 그것부터 해야 합니다. 그것부터. 그리고 내가 해야 하는 내 고유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고 이것도 하고. "야 이것은 니가 해"라고 하면 절대 못합니다.

그것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00년 동안 쭉 갑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갈렙과 옷니엘 이야기의 교훈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삿 1:12)

이 이야기는 여호수아 15장에도 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에 같은 이야기가 다른 책에 반복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복음서에 똑같이 나오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왜 그럴까요? 중요하니까.

십계명도 출애굽기 20장에도 나오고 신명기 5장에도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모세가 말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중요하니까. 너무너무 중요하니까. 마태복음에는 산상수훈으로 나오고 누가복음에는 평지수훈으로 나옵니다. 똑같은 말씀이 중요하니까.

여호수아 15장에도 나오고 사사기 1장에도 이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매우 중요하니까 나오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하니까.

갈렙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14장에 너무 유명한 사건. 여호수아 앞에 가서 무릎을 탁 꿇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제가 지금 85세이나 여전히 저는 힘이 있고 강건합니다. 저에게 이 산지를 주소서" 하고 여호수아 앞에 딱 엎드립니다. 그리고 올라가서 헤브론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나서 갈렙이 기럇세벨이라는 조그마한 땅, 그 땅을 정복할 때 사람을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자기가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갈렙은 능력이 있어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자기 딸을 겁니다. "내 딸 악사를 여기에 아내로 줄 테니 젊은이들이여 모여라" 그랬습니다.

저는 참 안타까운 것이, 이런 본문을 가지고 여성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약간 페미니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을 얼마나 물어뜯는지 모릅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그 시대의 문화와 렌즈로 보지 못하는 분들이라서 그렇습니다.

"어떻게 자기 딸을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마음으로 결혼을 이런 식으로 시키느냐"고 합니다. 21세기 아버지 중에도 그런 아버지 많습니다. 딸 받아들이지도 않은 아버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여성 신학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보시면 안 됩니다. 그 시대의 문화와 그 시대의 관점으로 갈렙을 보셔야 합니다. 갈렙이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요? 자기 딸을 걸었습니다. 딸을 내놓았습니다. 젊은이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옷니엘이라는 사람이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옷니엘이 올라가서 기럇세벨을 정복해서 옵니다.

그런데 그 딸이 시집을 가는데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땅을 주었거든요. 남방 땅을 주었습니다. 남방 땅은 성경의 네게브입니다. 네게브 아시죠? 거기는 가뭄이 아주 말할 수 없는 곳입니다. 쩍쩍 갈라지는 곳입니다. 그 땅을 주니까 딸이 아버지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그 땅만 주면 어떻게 해요? 샘 좀 주세요. 물 좀 주세요." 그랬습니다.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함에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삿 1:15)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 세 가지를 깨닫습니다.

첫째, 지금 여호수아가 없습니다. 지금 사사기 1장에 의하면 여호수아는 죽었습니다. 그러면 갈렙 입장에서는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내가 갈렙이라면, 갈렙은 영원한 2인자였습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갈렙 입장에서는 "나도 별 달고 싶은데"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나는 왜 안 됩니까? 나도 리더십을 한 번 가져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의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이제는 평신도의 시간으로 넘기셨거든요. 이것을 갈렙이 수용했습니다. 그때를, 하나님의 때를 그대로 받았습니다. 자기 때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기 욕망을 자기 시간과 환경에 관계없이 계속 주장합니다. 그런데 갈렙은 그때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냥 자기 지파에서, 그 지파 유다지파의 후계자를 키워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둘째, 갈렙은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유다지파에서. 그런데 거기에 젊은 세대가 다 냉소적입니다. 아무도 일하지 않습니다. 갈렙이 딸까지 걸었습니다. 자기를 이어서 일할 수 있는 젊은 세대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옷니엘입니다. 옷니엘이 사사 중에 1번 사사 아닙니까? 12명의 사사 중에 첫 번째 사사. 훌륭한 일꾼, 다음 세대를 길러서 같이 일을 시켰습니다. 훌륭한 사람을.

셋째, 딸이 샘을 달라고 할 때 윗샘만 준 것이 아닙니다. 아랫샘만 준 것이 아닙니다. 넉넉히 줘버렸습니다. 품이 넓은 아버지였습니다. 후원을 할 때 제대로 후원해야 합니다.

갈렙 같은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다 계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갈렙 같은 어른들만 교회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음 세대를 키워주고 젊은 사람들에게 일을 시켜주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윗샘만 주는 것이 아니라 아랫샘까지 마구마구 퍼주고, 자기 때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에 시간을 맞추고. 그런 분만 계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거기에서 옷니엘 같은 훌륭한 다음 세대가 무럭무럭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렙이 훌륭한 것입니다. 갈렙이 위대한 지도자인 것. 자리 욕심내지 않습니다. 그 다음 세대에 대한 연민과 사랑과 염려가 있습니다. 넉넉한 품위가 있습니다. 다 줘버렸습니다. 그냥 가서 잘해보라고. 그것을 움켜쥐고 살지 않고.

유다지파의 취사선택적 순종

19절을 한 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이 말씀 중요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다"**고 그랬습니다. "유다지파가 산지 주민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왜?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는데, 왜 유다지파가 철병거가 있는 골짜기 주민을 못 쫓아냅니까? 이것은 못 쫓아낸 것이 아니라 안 쫓아낸 것입니다. 시도 자체를 안 한 것입니다. 유다지파가 자기가 하기 싫어서 안 한 것입니다. 유다지파가. 이것이 유다지파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한 것입니다.

지금 유다지파의 죄악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 죄가 무엇입니까? 시므온 데리고 간 것. 두 번째, 아도니베섹을 엄지손발가락 자른 것. 잔인하게 그 문화에 동화된 것. 세 번째가 무엇입니까? 취사선택한 것.

산지 주민은 쫓아내고 골짜기 주민은 철병거가 있다고 안 간 것. 그것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내가 가지고 싶은 것만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피해 가고 알맹이만 따먹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고난도 겪어야 영광이 있습니다. 가야 합니다. 헌신해야 합니다. 수고해야 합니다. 내 시간의 헌신과 물질의 헌신과 내 몸의 헌신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리기만 하려고 하고 영광만 얻으려고 하고. 그것이 취사선택 신앙 아닙니까?

철병거가 있어서 나 못 가겠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이지. 그것이 사사시대의 시대 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그런 시대 정신을 따라 흐르고 있으면 그것은 우리가 반쪽짜리 신앙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고난도 받고 그 고난 이후에 이어지는 영광도 내가 함께 받고, 헌신도 하고 수고도 하고 땀도 같이 흘리고 고생도 하고 욕도 같이 먹고. 일하면 욕먹습니다. 당연히. 욕먹기 싫어서 일 안 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기 싫어서 옳은 소리 안 하고. 그래서 어떻게 크리스천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지파 보십시오. 지들 마음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냥.

요셉족속과 므낫세지파의 실패

그 다음 요셉족속을 한 번 봅시다. 요셉족속은 두 지파를 요셉족속이라 합니다. 므낫세, 에브라임 두 지파니까 얼마나 힘이 있습니까?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느니라" (삿 1:22) 함께하셨다고 그랬습니다.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였더라" 우리가 루스 알지요?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함에" (삿 1:23-24)

여러분 여기서 조금 이상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그랬는데, 정탐꾼이 가서 그 성읍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성읍의 입구를 인도해 달라고 그러네요? "선대하리라" 그랬습니다.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냈더라" (삿 1:25) 헤렘명령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을 살려줬습니다. 그랬더니, 그 성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 사람이 헷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곳의 이름이 되니라" (삿 1:26) 자기 망한 성이 루스입니다. 이 가족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그 망한 성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또 다른 도시를 건설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하는데 그들을 살려줘서 가나안 문화가 계속해서 잔존하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요셉지파가.

그 다음 므낫세지파를 보십시오. 재미있습니다.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삿 1:27)

그런데 보십시오. 그 뒤 말이 재미있습니다.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가나안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마음을 독하게 먹고 그냥 버틴 것입니다. 그러면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까? 안 한 것입니까? 안 한 것입니다.

이들이 왜 안 했을까요?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삿 1:28) 이제 "아니하였더라" 그랬습니다.

무엇 때문에 노역을 시키려고? 값싼 노동력이니까. 노예로 부리려고. 씨 뿌리고 농사짓고 물 길러 오고 그러려고 이들을 쫓아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중에 바알 신앙을 가지고 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신명기 7장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때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그들과 혼인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서로 소통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이후에 이어지는 29절에서 36절까지 이야기는 전부 다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들이 땅을 정복하지 못한 실패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다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은 노역을 시킨 것입니다. 노동력을 사용하려고.

믿지 않는 이스라엘

여러 지파들이 가나안족속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신명기 1장 32절: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를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펄쩍 뛸 것입니다. "아니요. 우리는 하나님 믿는데요."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그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안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취사 선택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사시대는 선택의 시대라고 그랬습니다. 이것도 선택하고 저것도 선택하고, 하나님도 선택하고 바알도 선택하고, 이 길로 갔다가 저 길로 갔다가.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고요. 가짜지. 이중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신명기 말씀이 기록합니다.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렇게 따지면 오늘 이 시대에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오늘 이 시대에 정말 우리가 참 믿음을 가지고 순도 100%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치고 애쓰고, 그렇게 자기를 복종시키고 항상 말씀 앞에서 울고 그런 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사사기 말씀을 보면서 이 시대의 내 모습을 봐야 합니다. 항상 선택 앞에서 내가 원하는 선택만 하고 있는 내 모습. 그러면서 멋지게 포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했다고. 모두의 일은 누구의 일도 아니고, 반쯤 선택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항상 희생은 하지 않고 권리와 열매만 누리려고 하면서.

사사기 말씀 전체를 보면서 오늘 이 시대 우리를 향한 하나님 마음을 잘 보셔야 합니다.

결론

그래서 1장 말씀 집에 가서 좀 아프지만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적용하십시오. 우리에게, 나 자신에게 적용하고 살피고 또 다음 주에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영웅의 시대가 지나고 평신도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기도도 들으시지만 평신도의 기도도 들어주시는 분임을 보았습니다. 주여 영웅들의 시대가 지나 이제 우리도 기도하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승천하시고 제자들이 기도했던 것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잤던 제자들이 기도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가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할 때 하나님 응답하십니다. 응답하시는 말씀 그대로 행하기를 원합니다. 취사 선택하지 않게 하옵소서. 타협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불리하다고 그 말씀 지키지 않고 빼먹는 일도 이제는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난받게 하시고 당당하게 고난을 향하여 걸어가게 하여 주시고, 손해 보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못하면 400년 뒤에도 못한다는 사실 깨닫게 하여 주시고, 지금 당장 내가 할 일 믿음으로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