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특강(4) - 여자 사사 드보라와 바락(삿 4장)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사사기 4장 8절과 9절입니다. 사사기 4장 8절과 9절 말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우리 한 목소리로 함께 읽겠습니다.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아멘.
오늘은 사사기 특강 네 번째 시간입니다. 성경을 이어서 공부하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귀한 것, 가장 특별한 장점은 연속성을 가지고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중간에 끊어서 하면 그 부분만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앞이나 뒤를 설명하기가 사실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1장, 2장, 3장을 하고 그리고 4장을 하면 4장이 사사기의 어떤 흐름 가운데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속성, 흐름, 그 흐름 가운데 독특성 이런 것들을 함께 느끼고 또 볼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의 특징
지금까지 우리가 3장까지 한 내용들을 한번 간단하게 정리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해야 하고 또 복습하고 예습하면서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사 시대의 특징을 몇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영웅의 시대에서 개인의 시대로, 그 개인이라고 함은 본인이 선택하고 판단해야 하는 개인입니다.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개인이 선택하고 판단하는데 기준 없이 하면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사사 시대의 그 개인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림이 없고 보편성과 타당성을 담보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사시대의 시대 정신, 악한 시대 정신인데 "왕이 없으므로 백성이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제멋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택적으로 순종하고 선택적으로 불순종했다. 처음에는 선택도 순종도 하고 불순종도 했는데 이것이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완벽한 불순종으로 가버렸습니다. 그것이 사사시대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사사 시대 전체를 보면 사사들이 사는 날 동안에는 그럭저럭 괜찮게 살았는데 사사들이 죽고 나니까 다시 죄 짓고 다시 악으로 가고 우상숭배로 빠집니다. 이유는 사사들이 다 잘했지만 문제는 시스템을 세우지 못했다. 신앙 계승에 실패했다. 자기 본인이 개인의 시대에서 본인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분별하고 판단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못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사들이 무엇을 했다는 말입니까? 과거에 모세나 여호수아처럼 자기들도 영웅의 시대에 취해서 살았다. 내가 백성들을 구원하니까 내가 백성들을 건지니까 그 시대로 알고 그냥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겁니다. 그러니 가장 막중한 사명 신앙 계승과 전승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윗세대들이 남겨둔 악의 유산이 후세대들에게는 시험거리가 됩니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그 다음 세대들에게는 고스란한 짐이 되고 시험거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옷니엘을 보고 에훗을 보고 삼갈을 봅니다. 지난 시간에 사사 세 분을 보았는데 이 세 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사 시대도 여전히 주인이시다. 옷니엘 같은 사람은 얼마나 준비된 사람입니까? 갈렙의 후계자로 이미 유다 지파에는 잘 훈련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자 그가 활동했다. 하는 것으로 보면 하나님이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다.
에훗은 왼손잡이입니다. 오른손이 막힌 사람 조막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들어서 사용하시니 구원자가 되었고 삼갈은 아낫의 아들이라고 그랬습니다. 자기 집안이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이었고 소모는 막대기를 들고 다녔으니까 농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임하니까 그도 블레셋 백성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건지는 구원자가 되었다. 우리가 거기까지 살펴보았습니다.
평화의 시간
이제 오늘은 또 한 분의 사사를 만납니다. 그 전에 이 상황을 좀 설명을 하고 있는데 첫 번째 질문 "에훗이 죽은 후 이스라엘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에 의하면 옷니엘 죽고 나서 옷니엘의 시대에 평화가 몇 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랬습니까? 40년. 에훗의 시대에 평화가 몇 년이나? 80년. 그러면 이 40년과 80년이라는 시간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선물이자 기회라고 그랬습니다. 그 시간 40년과 80년의 시간의 기회는 그 시간 동안 하나님 말씀의 체계를 세워라. 가정과 지역과 이스라엘 전체의 공동체의 뼈대를 세워라. 어떻게 말씀을 가르치고 어떻게 자녀들을 양육할 것인지 시스템을 철저하게 구성하라. 그런 기회라고 그랬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에훗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 80년의 시간을 어떻게 했다는 말입니까? 활용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80년의 시간은 한마디로 말하면 평화의 시간입니다. 에훗이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하고 난 이후 그 80년의 평화의 시간이 왔습니다.
그러면 이 평화의 시간은 먹고 마시고 즐기고 놀라고 주신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평화의 시간에 체계를 세워라. 말씀으로 뿌리를 굳게 하고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절대로 변하지 않는 영적 질서를 잡아라. 이 시간이 평화의 시간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80년의 평화의 시간을 그냥 흘려 보내니까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하면서 그냥 흘려 보내니까 백성들이 이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또 악을 행하는 거죠. 그 세대가 다 세상 떠나고 나니까.
여러분 이것은 오늘 우리나라로 딱 적용시켜 보면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평화의 시간을 허락하신 지가 얼마 정도 되었을까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의 시간을 허락한 지가 한번 따져 봅시다. 올해가 2025년입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시작된 해가 물론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지만 강제 합병된 지가 1910년 아닙니까? 1910년부터 시작해서 즉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 이 나라는 공식적으로 평화가 사라졌습니다. 완벽하게.
그때부터 36년이 지나 해방되었습니다. 해방되고 나서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까? 그때부터는 이념 분쟁입니다. 우익과 좌익이 나누어서 싸우고 친소파와 친미파가 싸우고 신탁 통치하고 그러다가 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은 이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평화가 왔습니까? 아닙니다. 이제는 가난입니다. 가난하면 평화롭지 못합니다. 먹고 살아야 되니까. 산에 올라가서 나무뿌리 캐먹고 나무 껍데기 먹고 살았던 가난의 시간이 지납니다.
그 가난을 겨우 면하게 된 때가 1970년대부터 아닙니까? 조금 더 범위를 좁혀 보면 사는 것처럼 살았던 시대, 아파트 시대가 오고 그렇게 살았던 시대가 올림픽 이후입니다. 1988년 이후 1988년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습니까? 한 40여 년 정도. 지금 뭐 30년 40년 채 되지 못합니다. 30, 40년 정도.
이 시간이 평화의 시대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주신 평화의 시간. 그런데 조선왕조 500년 동안 우리가 과연 평화로웠던 적이 있는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외적의 침입 등등 수많은 침략을 받았는데 이 30, 40년의 평화의 시간 동안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했던 때가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이후입니다. 그때부터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했고 70년대 80년대 건축이 이어졌고 시골에 계신 분들이 도시로 다 몰려들면서 교회가 곳곳에 다 세워졌습니다. 성도들이 십자가 깃발만 꽂으면 다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평화의 시대 198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러면 이 평화의 시대에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 그 시절 이전은 영웅의 시대입니다. 탁월했던 영웅들이 이 민족을 이끌고 영적 주도권을 가지고 살았던 시대인데 이 평화의 시대는 시스템을 갖추고 개인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하나님이 주신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교회가 과연 무엇을 했느냐?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가르쳤느냐? 한 사람 한 사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병으로 제대로 길러냈는가? 우리 자녀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대학에 갑니다. 교회학교 교사가 됩니다. 그런데 대학교 1학년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정말 교회학교 어린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있는가? 없거든요.
아이들이 지금 대학교 1학년짜리 아이들이 과연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을 성경을 펴서 말씀을 먹이고 가르치고 복음에 기초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있는가? 그러면 교회 교육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실패했다는 겁니다. 이 평화의 시간 동안 교회 교육은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모여서 숫자만 과시하고 그러고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냥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우리가 살았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는 무엇을 했습니까? 자동차 생겼죠. 따뜻한 물 언제든지 틀면 나오는 아파트에서 생활하죠. 맨날 주일마다 놀러 나가고 여름에 휴가는 가고 해외도 가고 다 하는데 가정에서 이 평화의 시간 동안 하나님 말씀을 차분히 앉아서 자녀들을 가르친 적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가정은 교회에다가 방임하고 교회는 가정의 책임을 떠넘기고 그러는 사이에 신앙의 교육과 체계와 시스템은 철저하게 무너지고 그냥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 한 시간 드리고 설교 몇십 분 들으면 그것으로 신앙생활 다 하는 것 줄 알고 거기에 조금 더 하는 분들은 그저 몸이 좀 봉사하고 수고하면 그 봉사와 수고가 전부인 줄 알고 그렇게 살았으니까 지금 나이가 40이 되고 50이 되고 60이 되었는데 성경 하나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성경의 흐름을 어떤 상황이 생기면 하나님 말씀으로 이것을 내가 분별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런 상황.
우리는 과연 평화의 시대를 제대로 살았는가? 이런 상황에서 다시 세속화의 거센 물결이 지금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분별을 못 합니다. 동성애를 받아들여야 될지 쳐내야 될지 교회는 어떤 식으로 이 파도를 넘어가야 될지 분별을 못 하니까 교회가 분열되고 나뉘어지고 박살나고 전부 다 오합지졸들이 되어서 이런 시대를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평화의 시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아닙니까? 그런데 이 선물을 우리가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다. 목회자들은 교회가 성장하고 교회가 부흥합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성도들이 몰려듭니다. 차분히 앉아서 설교 준비하고 가르치고 심방하고 목양하고 돌보아야 하는데 이제 이만큼 평화가 왔으니 우리 교회가 이만큼 되었으니 나는 딴 일 하러 간다. 다른 일 하는 거예요. 다른 데 모여서. 다른 일 다른 데 모여서 그러니 교회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평화의 시기는 그 자리를 앉아서 말씀 읽고 차분히 지키라고 주시는 겁니다. 나에게 먹고 살 만한 물질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우리 가정에 속하는 것도 없고 평화가 찾아왔다면 그 시간에 무엇을 할 겁니까? 그 시간에 옛날에 가난하고 힘들게 살 때는 그 시간에 돈 벌러 다녔지만 이제는 먹고 살만하고 여가 시간도 보낼 수 있을 만한 이런 시간이 오면 그 시간에 무엇을 합니까?
우리가 성경 읽고 차분하게 가르치고 체계를 세우고 시스템을 세워야 됩니다. 그래야 유사시에 똑같은 어려움이 닥칠 때 그때 이 큰 파도를 건너가고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평화의 시기를 살아가는 방법 체계를 세워라. 시스템을 세워라.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교회가 그것을 해야 하고 가정이 해야 하고 우리가 훈련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됩니다.
1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 그랬습니다. 구체적으로 악을 행했다. 어떤 뜻일까요? 무슨 악을 행했다는 말입니까?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했다. 이 말은 사사기 2장 13절이 그 각주가 됩니다. 이렇게 나오죠.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이것이 악입니다. 사사기가 이야기하는 악. 본질.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 그것이 악입니다.
에훗이 죽고 평화의 시대 80년을 그냥 먹고 마시고 즐겁고 행복하니까 그렇게 보내고 나니까 그 세대가 다 떠나고 나니 다시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2절.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파셨다는 말이 계속 나오죠. 지금 우리가 벌써 세 번째 보는 겁니다. 파시다, 소유권을 이양하다. 마카르(מכר)라는 단어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구약과 신약은 연결해서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이 팔다라는 말이 신약에 어디에 나오느냐? 로마서 1장 28절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한번 다시 봅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내버려두라.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 헬라어로 파라디도미 내버려 두는 겁니다. 내 자식이 아니니까 내버려 두는 겁니다. 소유권을 이미 이양했으니 내버려 두는 거죠.
죄를 짓든지 나쁜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때리지도 않고 책망하지도 않고 내버려둡니다. 그것이 팔다, 내버려두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마카르(מכר), 헬라어로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라는 뜻입니다.
3절.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여러분, 또 똑같은 사이클이 반복되죠. 죄 짓습니다. 그다음 심판 당합니다. 괴롭습니다.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구원하십니다. 이 지겨운 반복의 사이클로 또 들어갔습니다.
이런 것 좀 안 하고 이제는 좀 우아하게 이제는 좀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이 사이클을 딱 깨고 나서야 하는데 그것을 깰 수 있는 체계와 시스템 조직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이 시스템 안에 또 들어가는 겁니다. 죄 짓고 심판당하고 부르짖고 또 구원받고 왜 그렇다 그랬습니까? 잊어버리니까 망각하니까 지난 시간에 공부했습니다. 망각하는 이유는 훈련하지 않아서 내 가슴의 뼈, DNA 속에 완벽하게 새겨지지 않아서 경건의 이르기를 훈련하고 연습하고 전심전력하면 기억날 텐데 훈련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여선지자 드보라
자, 이제 이런 상황이 되니까 부르짖잖아요. 죄 짓고 심판받고 부르짖고 구원하시잖아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법 사람을 세웁니다.
4절.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여선지자가 등장합니다. 드보라는 여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셨습니다. 이 흐름이 있습니다. 에훗은 오른손을 못 쓰는 사람이죠. 삼갈 아낫의 아들 이방 신을 섬기는 가문에서 나타난 사람 소치는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또 여성이 나옵니다. 그런 그 당시 사회에서 그런데 이 여성을 사사로 하나님이 세우셨다. 그랬습니다.
사사 지난 시간 복습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쇼페트(שׁפט)라고 그랬습니다. 쇼페트라는 사사 이 명사는 동사 샤파트(שׁפט)에서 왔는데 이 동사는 재판하다, 다스리다, 판결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사사 드보라는 백성들을 다스리고 재판도 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이어서 나오죠.
5절에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아, 드보라의 종려나무. 이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굉장히 잘 알려진 지명이었습니다. 랜드마크였습니다. 분쟁이 있거나 갈등이 있거나 혹은 헷갈리는 일이 있으면 우리 드보라의 종려나무에 한번 가보자. 그래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자, 그곳에 가서 재판을 받더라 그랬거든요. 근데 이것은 우리가 법적인 용어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영적인 용어, 신앙적인 용어로 이해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 재판이라는 단어가 미쉬파트(משׁפט)라는 단어를 썼거든요. 미쉬파트. 여기 나오죠. 재판 히브리어 미쉬파트(משׁפט) 정의 율법. 어디서 좀 들어보셨죠? 제가 자주 이야기하거든요. 자주. 이사야 신학에서 미쉬파트(משׁפט)와 체다카(צדקה)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특히 예언서 신학에서. 근데 이 예언서 이사야 신학에서 유명하고 중요한 개념이 사사 시대부터 나왔습니다.
자, 한번 봅시다. 이사야 5장 7절 말씀을 보시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이것을 잘 한번 보세요. 천천히 읽을게요.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이 정의가 미쉬파트(משׁפט)입니다. "도리어 포악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 공의가 체다카(צדקה)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랐던 것 두 가지가 나오죠. 하나는 정의, 하나는 공의. 근데 우리말로 번역해 두니까 도무지 구별이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의는 수직적인 것, 공의는 수평적인 것. 즉 미쉬파트(משׁפט)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 공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
조금 더 쉽게 설명드리면 여기 미쉬파트(משׁפט), 정의 율법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여기는 타협이 없습니다. 절대 기준 십계명 중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이것이 변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나님 손으로 돌판에 쓴 건데요. 그것은 타협이 없고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미쉬파트(משׁפט)입니다.
그래서 이 말 백성들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앞에 와서 재판을 받더라. 이 말은 자기들이 기준이 없어요. 백성들이 잘 몰라요. 이것은 판단을 해야 하는데 잘 모른다고요. 그러면 와 가지고 기준을 배워서 가는 겁니다. 아, 그것이 기준이군요. 아, 이렇게 살아야 하는군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드보라에게 듣고 배워서 가는 겁니다. 그것이 정의예요.
그러면 공의 체다카(צדקה)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수직적인 말씀인 정의인 미쉬파트(משׁפט)가 수평적으로 백성들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느냐 하는 것이 체다카(צדקה)입니다. 이를테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이 말씀이 백성들, 사람들이 살면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합니까?
예수님 시절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굉장히 과격하고 굉장히 엄격하게 적용했습니다. 하루에 몇 킬로를 가면 안 됩니다. 안식일에는 짐승이 물에 빠져도 사람이 물에 빠져도 건지면 안 됩니다. 무화과 두 개 이상의 무게는 들면 안 됩니다. 병든 자를 고쳐 주면 안 됩니다. 배고파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도 밀을 이렇게 손으로 긁어서 손으로 비벼서 먹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이라고 간주했거든요. 탈곡의 행위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안식일에 사람을 살립니다. 38년 된 병자도 안식일에 살렸고 한편 손 마른 사람도 우리 주님이 안식일에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체다카(צדקה). 안식일의 적용은 사람을 살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수직적으로 떨어졌는데 우리 주님은 이 체다카(צדקה)를 사람을 위해서 말씀을 쓰신 겁니다.
그런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수직적인 미쉬파트(משׁפט)를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했다고요. 레위기 율법에 다섯 가지 제사 규정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가난한 자를 위한 규정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것은 쏙 빼버리고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니까 쏙 빼버리고 어린양, 소, 염소 등등만 고집하고 가져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 치부의 수단으로 거꾸로 적용해서 그렇게 생활한 겁니다.
이것이 수직적인 미쉬파트(משׁפט)와 수평적인 체다카(צדקה)가 함께 어우러져야 그것을 완전한 정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왜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멸망시키셨는가? 수직과 수평이 다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공의와 수직적인 미쉬파트(משׁפט)와 수평적인 체다카(צדקה)가 하나도 되지 않으니까 멸망시킨 겁니다.
그러면 드보라의 종려나무에서는 이 재판 수직적인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너희는 가서 백성들로서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하는 것까지 여기서 이루어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기 오는 거죠. 그것이 사사의 역할입니다. 원래 레위인들이 이 역할을 해야 하는데 레위 지파가 타락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여인에게 이것을 준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백성들이 여기에 올 때 여성이잖아요. 그 당시 사회에서 여자 아닙니까? 사람들의 선입관이 과연 없었을까? 그런데 그런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분이 절대 기준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그러면 이 시대가 역행하는 시대 아닙니까? 기준 없이 사는 시대. 이 시대는 기준 따위 없습니다. 이 시대는 그냥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기준이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드보라의 종려나무에 계속 몰려드느냐? 기준이 없는 시대. 기준을 찾고 싶거든요.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이 목말라 있거든요. 사람들이. 백성들이 여기에 몰려드는 것을 보세요. 이분이 여자든 남자든 이런 것 상관하지 않고.
요즘 우리 시대도 보십시오. 사람들이 다 중구난방같이 전부 다 엉망진창으로 사는 것 같아도 철저하고 분명한 하나님 말씀의 기준이 있으면 그것 배우러 옵니다. 그것 들으러 옵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살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세상 살기가 어렵거든요. 기준 없이 사는 세상이 세상의 관습과 세상의 시대 시류대로 사는 방식이 힘듭니다. 그래서 절대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고 싶어서 그 기준을 배우려고 그 기준을 알기 위해서 절대적인 기준을 가르치는 곳이 있으면 옵니다.
이단들이 그것을 이용하잖아요. 기성교회에서 안 가르치니까. 평화의 시대가 왔다고 목회자들이 다 딴짓하니까 이단들이 데리고 앉아 가지고 공부를 하니까 이단들에게 가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교회가 드보라의 종려나무가 되어야 됩니다. 교회가 우리 가정이 드보라의 종려나무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드보라의 종려나무에서 앉아서 말씀의 기준을 잡고 가르쳐야 될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요. 목회자도 장로님들도 우리 교회학교 교사들도 모두가 다 드보라의 종려나무에서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가정의 부모가 그래야 하고 그래야 살아납니다.
이곳 한 곳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다 몰려들어서 유명한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드보라의 종려나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질 만큼 사사의 역할은 재판하고 다스리고 판단하고 수직과 수평 미쉬파트(משׁפט)와 체다카(צדקה)를 가르치는 것 외에 또 한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바락의 부름
우리 지난 시간에 옷니엘은 사사라고 그랬고 에훗과 삼갈은 구원자로 그랬습니다. 지금 가나안 왕 야빈에게 20년째 압제받고 있는데 하나님이 드보라를 세웠습니다. 그러면 드보라의 역할은 사사의 역할은 가르치고 재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플러스 무엇입니까? 구원자.
근데 드보라는 여성입니다. 여성은 전투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드보라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한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전쟁해라. 그를 내보내라 말씀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말이에요.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자, 하나님이 드보라를 통해서 바락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자,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하실 때는 구체적으로 하십니다. 이런 식으로 대단히 구체적으로 드보라 혼자 가라가 아니라 드보라에게 바락을 데리고 가라. 바락을 명령해 내보내라. 전쟁에서 너는 그것을 이끄는 역할을 해주고 바락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도록 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럼 그대로 하면 되잖아요. 근데 우리가 1장에서 본 것처럼 누가 올라가리까? 하나님이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유다가 가면 되잖아요. 근데 유다는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시므온 지파 데리고 갑니다. 그것을 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것잖아요. 그것이 선택적 불순종이에요. 선택적 순종이고.
근데 지금 여기 드보라에게 바락 앞장 세워서 가라 그랬어요. 그래서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너 가야 해. 하나님이 이런 말씀 하셨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바락이 네. 알겠습니다. 하고 가면 되잖아요. 근데 이 바락도 전형적인 사사시대 사람입니다. 전형적인 사사시대 사람.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선택적 순종과 선택적 불순종을 하는 사람. 토다는 사람.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하지 않고 토다는 인간. 그런 사람이 바락입니다.
조건부 순종
어떻게 되었는지 보세요. 8절.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아멘. 가겠습니다. 이러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근데 무엇이라고 합니까? "만일" 하 무엇 이런 말 들으면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하고 막 한 숨이 나오지 않으세요? 우리 이런 말 많이 들어 보셨지 않으세요? 자녀들하고 이야기하다가 이야기 막 하는데 대화가 막 물러 있는데 엄마 엄마 만약 내가 만약 내가 이 "만일"을 얼마나 많이 다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어쩌라고? 되지도 않은 일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일 경우의 수와 가정을 수없이 많이 던집니다.
지금 이 인간 보세요. 바락도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무엇입니까?" 이것이 도대체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가겠다는 말입니까? 안 가겠다는 말입니까? 의도가 무엇 같아요? 이분의 진짜 의도가 애매하죠. 한다는 말도 아니고 안 하겠다는 말도 아니고 애매하죠.
지금 그런데 드보라 입장에서는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 가지고 말장난할 시간이 있냐고요? 이런 인간 데리고 앉아 가지고 설득하고 아니야.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라고 할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그런 상황이 아니에요. 평화의 시기가 아니잖아요. 지금은 평화의 시간에 이스라엘이 제대로 가르쳐 놓았다면 이런 인간들이 없을 텐데 평화의 시간에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까 이런 바람 같은 사람들이 독버섯처럼 솟아나는 거예요.
바락의 의도를 미루어 한번 짐작해 보면 첫째 책임지지 않겠다. 내가 왜 책임져야 하냐? 가서 잘되면 내 공이지만 잘못 되면 내가 책임져야 하잖아. 내가 다 뒤집어써야 하잖아요. 사람들은 이런 것이 굉장히 민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제가 책임질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이 책임지십시오. 이 말입니다.
두 번째 드보라를 너무 신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드보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너를 시스라의 군대를 너에게 붙였다. 그러면 가면 됩니다. 그런데 조건을 답니다. 그러니까 영광을 보지 못하는 거예요.
9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자,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때 이 드보라가 어떻게 말했을 것 같아요? 아마 저 같으면 이를 꽉 깨물고 아랫 입술, 윗입술을 꽉 깨물고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아마 이런 식으로 화가 나고 너무 열받는데 지금 시간이 없어서 이 친구하고 논쟁할 여지가 없으니까 빨리 말하고 끝내는 거예요. 설득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그러나가 중요하죠. 여러분 8절에 "만일"이 9절에로 9절에 가면 "그러나"로 바뀝니다. 이것을 잘 보셔야 해요. 내가 하나님 앞에 조건 달잖아요. 내가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순종하지 않고 조건 달면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나에게 "그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세요?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속된 말로 하면 너는 뼈빠지게 일하고 개 준다는 말입니다. 영광은 여인에게 파실 것이다. 너는 가서 열심히 일하는데 모든 영광은 다른 사람이 가져갈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해 버렸습니다. 조건 달면 이렇게 됩니다. 어중간하게 자기가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면 영광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 마태복음 14장 27절에서 29절까지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이 잘 아는 말씀이죠.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니까 주님 무엇이라 하셔요?
"오라" 야 그럴 수 있겠냐? 지금 밤이야. 여기 물이야. 이런 말씀 일절 하지 않으시고 "오라." 딱 한 마디 하셨어요.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오라" 했는데 베드로가 만약 예수님 저 물에 빠지면 건져 주실 거죠. 만약 예수님 내리는 순간 풍덩 빠지면 빨리 좇아와야 됩니다. 만약 내가 물에 빠지면 큰일 나니까 이 친구들 뒤에 있는 11명의 제자들 친구들이 있으니까 같은 배에 내 허리에 밧줄을 묶어라. 만약 내가 물에 빠지더라도 나를 건져올리게 이딴 소리 조건 달지 않습니다.
"오라 하시니 배에서 내립니다." 여러분 이러니까 베드로가 수제자예요. 이러니까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겁니다. 이러니까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가 되는 겁니다. 쓸데없는 조건 같은 것을 달지 않습니다. "만일 함께 가면 내가 가고 만일 당신이 가지 않으면 나도 가지 않습니다." 이딴 소리 하지 않는 거예요. 애매모한 소리. 하나님이 정말 듣기 싫어합니다. 그런 것 단호하게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심판받으면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죽자고 하고 힘도 쓰고 시간도 쓰고 공은 하나도 못 받고 왜 이런 짓을 합니까? 배에서 내려서 물 위를 걷는 기적도 한번 경험해 보고 비록 물에 한번 빠졌지만 예수님이 또 건져주고 성경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 베드로가 된 이유는 토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단점 많죠. 인간적인 약점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진짜 잘한 것 토달지 않는 것 "예" 하고 바로 내리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믿음이 위대한 겁니다. 이런 믿음이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가르쳐 놓지 않으면요. 그것을 평화의 시대에 제대로 주입시키고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들은 항상 애매한 태도를 가집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뜨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고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인간 되면 안 된다는 얘기예요. 바락.
자, 대단히 긴급하다. 지금. 그래서 드보라는 말 싸움하지 않는다. 논쟁하지 않는다. 바로 지르고 데리고 갑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보세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 앞에 말이 없으면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이 없고 만약 바울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했으면 이것은 대단히 교만한 인간이에요.
근데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뜻이잖아요. 예수께서 나에게 능력 주시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주께서 나에게 가라고 하시면 나는 갈 수 있다. 나에게 로마로 가라고 하시니 나는 로마로 간다. 1차, 2차, 3차 전도여행하라고 하시니 나는 한다. 감옥에 있어서도 찬양하라 하시니 나는 찬양한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는 거예요.
다윗 보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골리앗을 향하여 돌진하니까 골리앗을 때려잡고 하나님 안에서 전쟁하니까 모든 전쟁에서 다 승리하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하나님 밖에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계획 세웁니다. 이방의 나라의 군주들과 정치적 결혼하고 이방의 공주들을 데리고 옵니다. 하나님 밖에 나가 버렸습니다. 자기가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습니까? 지혜가 있으면 얼마나 있습니까? 결국 솔로몬 시대의 나라가 나뉘어집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에 있어야 됩니다. 지금 바락은 한 발은 여기에 한 발은 밖에 있습니다. 그러면 안에 있는 겁니까? 밖에 있는 겁니까? 밖에 있는 겁니다. 여러분 그것을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한 발 안에 한 발 밖에 있으면 그것은 밖에 있는 겁니다. 그렇게 판단하셔야 됩니다. 완전히 들어와야 진짜입니다.
전쟁의 승리
오늘 여기 우리 교재는 없는데 11절 말씀을 화면을 통해서 한번 봅시다. 이제 전쟁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11절이 이렇게 보고를 합니다. 이것을 잘 보셔야 됩니다.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설명을 좀 할게요.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이라 그랬습니다. 여기는 호밥이라고 나오는데 우리는 이드로라고 알고 있습니다. 모세 장인 시보라의 아버지. 자, 이 사람의 자손 중에 자, 그 사람 이드로는 원래 미디안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사막에서 목축하고 다니던 사람이었고 그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는데 그 사람의 자손이 겐 족속이라는 족속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헤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시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자기 족속을 떠났다. 그랬습니다. 그럼 어디를 떠났다는 얘기입니까? 겐 족속을 떠났다는 얘기입니다.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다. 그랬습니다. 게데스라는 곳은 가나안 왕 야빈의 본거지거든요.
자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 학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목축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유목민이었으니까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다가 야빈의 본거지에 장막을 쳤을 거다라고 말합니다. 근데 그렇다면 굳이 "자기 족속을 떠났다"는 표현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겐 족속이 같이 다니거든요. 자기 족속이니까 큰 부족이 아니니까 같이 다닙니다. 여름이건 봄이건 가을이건 이 큰 목초지를 따라서 베이스 캠프를 같이 이동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족속을 떠난 사람이에요. 여기서 떠났다는 말은 유목민으로서 자연스럽게 떠났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족속, 겐 족속에게서 떨어져 나왔다는 얘기입니다. 게데스에 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친 가나안 왕 야빈 파가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정치적으로 야빈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이 사람은 야빈에게 충성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일단 전제를 하고 성경이 이 이야기를 갑자기 11절에서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뒤에 해석의 핵심이 되거든요. 키가 되거든요. 이 전쟁하는 과정과 결과를 보시면 13절과 15절 화면을 한번 보십시오. 이렇게 나옵니다. 시스라가 이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이잖아요. "모든 병거 곧 철 병거 구백 대와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을 하로셋학고임에서부터 기손 강으로 모았습니다." 전력을 정비해서 끌고 나온 겁니다.
얼마나 가소로웠겠습니까? 여자가 나오니까 드보라가 지휘관으로 나오고 뭐 진짜 질질 끌려나온 바락 같은 인간이 나오니까 가소롭잖아요. 한 방에 끝내려고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뜨리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병거 구백 대 있으면 뭐 합니까? 하나도 못 하는데
이런 것을 우리가 부러워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돈자랑 할 때 우리가 돈 부러워할 이유 없습니다. 뭐 합니까? 하나님이 오늘 밤 그 영혼을 거두시면 이것이 네 것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병거 구백 대 있으면 뭐 합니까? 걸어서 도망가는데 하나님이 다 흩으시는데
바락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때 바락의 눈 앞에서 자기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흩었습니다. 칼날로 자기들끼리 치다가 자기들끼리 치고 박다가 다 흩어지고 적장은 걸어서 도망갑니다. 전쟁은 거의 끝났습니다. 적군은 와해됩니다. 그런데 고대의 전쟁은 대장을 잡아 죽여야 끝나는 전쟁 아닙니까? 그 시스라가 아직까지 살아 있으면 두 사람을 잡아야 되거든요. 가나안 왕 야빈과 시스라를 잡아야 하는데 시스라가 지금 도망가 버렸어요.
그래서 어디로 갔느냐? 17절.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 아까 나왔죠. 자기 족속에게서 떨어져 나온 겐 사람 헤벨의 집으로 갔습니다. 거기 가니까 헤벨은 없어요. "그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그 아내 이름이 야엘이라는 여성입니다.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나오죠? 이제 화평이 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들어왔다는 얘기입니다.
자기 족속을 떠나서 그러면 원래 겐 족속은 가나안 왕 하솔을 다스리던 야빈과는 적대적인 관계였다는 뜻이에요. 서로 친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말이에요. 근데 자기 족속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정치적으로 친 야빈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결정적인 순간, 두려운 순간, 자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 적장인 시스라가 이 집으로 도망가죠. 도망갔습니다.
야엘의 결단
그 다음 보십시오.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가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으니라" 아주 친하죠. 느낌이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게 하라 내가 목이 마르다 하매 우유 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게 하고 그를 덮으니" 물 달라 했는데 우유를 줍니다. 아주 극진히 대접합니다.
"그가 또 이르되 장막 문에 서있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내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하고" 보초도 세웁니다. 그다음 "그가 깊이 잠든지라." 와 잠입니다. 얼마나 믿었으면 얼마나 가까운 사이면 완벽하게 야빈에게 충성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잠잡니다.
그런데 아우 끔찍한 이야기를 읽어야 됩니다.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와, 성경은 상당히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이제 우리가 이 가문을 한번 보아야 됩니다. 출애굽기 18장 10절에서 12절을 한번 보십시오. 제가 한번 읽어 볼게요. "이드로가 이르되" 모세의 장인 시보라의 아버지, 게르솜과 엘리에셀의 할아버지. 왜 할아버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오, 미디안 제사장인데 이렇게 이야기해요.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심으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여러분 이것을 두 가지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드로가 완벽하게 개종했다. 이런 설이 지지를 많이 받습니다. 두 번째 개종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이 번제와 희생제물을 드리고 함께 떡을 먹었다는 것은 자손 대대로 화평의 조약을 맺었던 것이다.
우리가 두 가지 다른 이 두 번째나 첫 번째나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그 후손이 겐 족속 아닙니까? 겐 족속은 반 이스라엘적일 수가 없거든요. 왜냐면 그 조상 이드로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조약을 맺었으니까. 그 민족은 반 이스라엘적이면 안 되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이 그 겐 족속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가나안 왕, 하솔 왕, 야빈과 적대 세력으로 다른데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 겐 족속 한 여기 이 사람 헤벨 헤벨이라는 사람 겐 사람 헤벨이라는 사람이 혼자만 거기서 떨어져 나와서 야빈과 동맹을 맺고 여기에 부역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누가 바르게 다시 올바르게 고쳐 놓습니까? 그의 아내 야엘이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 당시 정신이 "왕이 없으므로 백성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시대라고 했잖아요. 특히 여성입니다. 가정에 남편이 있습니다. 그 남편이 결정한 겁니다. 가정의 남편이 "우리 집안은 이제 우리 족속에서 떨어져 나와. 우리는 지금 여기 가나안 왕 야빈에게 부역하고 살아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니까 이제부터 당신은 닥치고 그냥 내가 하는 대로 해." 그렇게 한 거예요. 여기 온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이 언약, 하나님 앞에 맺었던 절대 말씀의 언약을 벗어날 수 없고 깰 수 없기 때문에 이 여인이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이 사람을 쳐 죽인 겁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자, 4장에 나오는 여성이 둘이 있습니다. 드보라와 야엘. 드보라. 기준이 무너지고 하나님 말씀이 희미해진 이런 시기에 드보라는 드보라의 종려나무에서 미쉬파트(משׁפט)를 가르쳤습니다. 체다카(צדקה)를 가르쳤습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 이 사람을 설명하는 말도 깁니다. 자기 남편이 앞에 와야 됩니다. 항상 자기 족속이 먼저 나오고 자기 남편이 나오고 그리고 자기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기록했다는 것은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겁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 이 사람도 철저한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 남편이 잘못 간 길을 바르게 고쳐 놓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정도의 결기와 이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흘러가는 대로 내가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 내 남편이 하라는 대로 그렇게 딸려가면 전부 다 같이 망하는 겁니다. 이런 시대는 철저한 하나님의 기준에 말씀을 붙잡고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그 말씀 붙들고 자기 집에 들어온 이 사람을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 죽입니다. 많이 해본 솜씨입니까? 이것을 해보았겠습니까?
이 여자가 우리가 무슨 거짓말만 좀 하려 그래도 가슴이 쿵딱쿵 뛰어 가지고 막 정신을 못 차리겠는데 덩치 큰 우락부락한 장군이 누워 있는데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 가지고 한 방에 끝내야 하는데 이것을 두 번 하다가는 안 되잖아요. 이것을 영화 보시면 나오잖아요. 정신이 아득해질 텐데 한 방에 끝냈어요. 와, 대단한 여인. 하나님 말씀으로 이런 결기를 가지고 살 정도가 되어야 시대를 바로 잡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시는 겁니다. 바락 같은 인간을 쓰지 않고. 바락은 가서 고생하고 쫓아다니고 했는데 아무것도 손에 온 것이 없습니다. 회색 지대를 살았으니까.
그림 한번 보여 주십시오. 자. 예. 제가 아주 사랑하는 그림인데요. 진짜 사랑하는 그림.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있습니다. 제목이 야엘과 시스라. 1620년 그림입니다. 1620년. 이 그림을 그린 사람에 대해서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그림 계속 보시면서 들으십시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라는 여인입니다. 이탈리아 여성화가입니다. 이분은 1593년에 태어나서 27살에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분이 이 그림을 그린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선생님에게 성폭행을 당했거든요. 그 당시 사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16세기에 태어나서 17세기를 살았습니다. 17세기에 여류 화가로 활동했는데 선생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면 입다물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당시 항상 일어나는 일인데 오늘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사회 법정에서 싸우려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하는 문제 아닙니까?
근데 이 여인이 법정으로 이 문제를 가지고 가요. 결국 이깁니다. 대단한 여인 아닙니까? 이 여인이 어디에서 그런 용기와 끈기가 나왔는가, 성경에서 가져온 거예요. 젠틸레스키가.
그래서 젠틀레스키는 힘들 때마다 야엘의 용기를 소망하며 이 그림을 그린 거예요. 보십시오. 시스라가 누워 있죠. 오른손에 방망이 들고 왼손에 말뚝을 들고 있는 여인이 야엘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시대를 바로 잡는 정신입니다. 이 그림 원작 진품을 보려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가시면 됩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 시대가 옛날 사사 시대처럼 시대 정신이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까? 중심이 없는 시대, 기준이 없는 시대, 그냥 좋은 것이 좋은 시대.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데 이럴 때 드보라 같은 사람, 야엘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이 나타나야 드보라의 종려나무가 우리 가정이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하고 야엘 같은 사람이 잘못된 자기 남편의 길을 바로 잡아 주어야 그 가정이 바로 섭니다.
그냥 내가 힘이 없으니까 내가 그냥 이렇게 살았으니까 그렇게 가면 다 망하는 겁니다. 전부 이제 이렇게 시스라가 이 여인의 손에 죽을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23절.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누가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드보라가 한 것 아닙니다. 바락이 한 것 아닙니다. 24절.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 누가 한 겁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의 손을 들어서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결국은 해방을 이루어 주셨더라라는 뜻입니다.
결론
여러분이 통쾌하고 이 놀라운 일을 여성들이 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성 신학하시는 분들이나 혹은 신학을 잘못된 시각으로 접근을 하시면 여성을 지나치게 부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성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에훗 장애인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그것이 여성이든 몸이 불편한 사람이건 우리 가문이 이방신을 섬겼던 사람이건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 주는 바입니다. 나는 하나님 말씀에 절대 기준만 가지고 살면 얼마든지 쓰임받을 수 있다.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화의 시대를 허무하게 버리고 그 평화의 시대에 체계와 시스템을 정비하지 못했던 대가를 후세대가 혹독하게 치렀음을 보았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평화의 시기가 찾아왔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꼼꼼하게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 위에 반석 위에 우리의 집을 지었는지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즐기고 먹고 마시느라 시간을 보내 버렸다면 이제 다시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읽고 묵상하고 그 반석 위에 집 짓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거센 파도가 우리에게 몰려와도 우리는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 기준으로 미쉬파트(משׁפט)와 체다카(צדקה)를 행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락처럼 어중간한 신앙 가지지 않도록 도우시고 "만일" "만일"이라는 말로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대적 순종의 믿음을 가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야엘처럼 남편이 잘못 간 길을 돌이키게 하여 주시고 겐 사람 헤벨의 길을 야엘이 돌이켜서 그 가문을 구원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 구원의 역사도 오늘 우리를 통하여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