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특강(5) - 드보라의 노래(삿 5장)
서론
사사기 5장 24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아멘.
오늘은 사사기 특강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교재에는 '야엘의 노래와 언약의 중요성'이라고 나와 있지만, '드보라의 노래'라고 하는 것이 훨씬 적절하므로 제목을 '드보라의 노래'로 정정하겠습니다.
1. 사사의 의미와 역할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사사기는 사사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책입니다. 사사(שֹׁפֵט, 쇼페트)란 '다스리는 자', '재판하는 자', '이끌어가는 자'라는 뜻으로, 동사 샤파트(שָׁפַט)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사들을 깊이 들여다보면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이끌어가며 구원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사들이 있습니다. 둘째, 다스리고 지도하며 신앙 교육을 하지는 않지만 일시적인 구원자의 역할만 하는 사사들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네 명의 사사 중에서, 첫 번째 사사 옷니엘과 여성 사사 드보라는 말 그대로 사사였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인도하며, 백성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해주는 진정한 의미의 사사였습니다. 반면 에훗과 삼갈은 그런 기능은 하지 않았지만 백성들을 구원하고 건져내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포괄적으로는 이 모든 분들을 사사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구원자로서의 사사와 재판·판단·구원을 모두 감당하는 사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드보라의 종려나무 - 기준이 있는 곳
지난 시간에 우리는 드보라의 중요한 랜드마크 개념인 '드보라의 종려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시대의 악한 시대 정신은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드보라의 종려나무에 가면 절대적이고 변함없는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가치관이 혼란스럽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두가 자기가 다 옳다고 말하는 시대에, 드보라의 종려나무는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로 가져와 보면, 드보라의 종려나무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우리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일터에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이 사라진 이 시대에, 가정에 돌아와 부모를 통해 신앙 교육을 받으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올바른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가정은 드보라의 종려나무가 되어야 하고, 교회 교육도 역시 드보라의 종려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보라를 통해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라고 하셨습니다. 드보라는 여성이었기에 전투를 앞장서서 수행하고 이끌어갈 사람을 선택했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바락이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락은 조건부 수용을 내세웠습니다. "만일"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바락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다 그랬습니다. 조건부 순종, 조건부 불순종. 1장에서 본 유다 지파처럼 전부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왈가왈부하고 시간을 지체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드보라는 말했습니다. "너는 오늘 내가 너와 함께 가겠지만, 너는 이 전쟁에서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 영광은 누가 가져갑니까? 야엘이라는 여성이 가져갑니다.
한 손에 방망이를 들고 한 손에 장막 말뚝을 들고 적장 시스라의 관자놀이를 관통해서 한 방에 때려잡아버린 그 위대한 여인 야엘. 그가 한 사람을 그렇게 죽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삐뚤어져 있던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는 점에서 그는 탁월하고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3. 드보라의 감독판 - 5장
이제 오늘 살펴볼 5장은 승전가입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부르는 노래인데, 실제로는 드보라의 신앙 고백적인 노래입니다.
영화를 만들면 영화가 따로 있고, 그 영화가 아주 흥행을 하고 나면 감독판을 또 따로 만드는 감독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독의 의도와 하고자 하는 바가 잘 드러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는 여정을 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는 철저하게 모세의 시각에서 다시 기록된 것입니다. 지도자인 모세가 이 백성들을 이끌면서 어떤 희로애락이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모세의 감독판, 신명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 5장은 4장에서 성공적인 전쟁을 수행한 드보라의 감독판 버전입니다. 드보라가 볼 때 이 전쟁은 어떤 식으로 수행되었으며, 이 전쟁을 통해서 내가 감사한 사람들은 누구이며, 혹은 이 전쟁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이 전쟁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인지를 드보라가 이 5장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5장이 조금 어려운 이유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노래는 쉽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여기는 가사만 남아 있습니다.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내용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5장은 조금 어렵긴 하지만, 잘 살펴보면 드보라가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5장 말미에는 적장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말뚝이 박혀 죽은 시스라의 어머니의 노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어머니는 어떤 식의 노래를 했는지도 함께 보려고 합니다.
4. 영솔과 헌신 (2절)
먼저 1절을 보십시오.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이 노래는 승전가입니다. 이제 이겼으니까 승전가를 부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기에 상호 대응되는 단어가 나옵니다. 지도자들, 즉 영솔자들이 영솔했습니다. 지도자들이 이끌었다는 말입니다. 먼저 앞장서서 나가고 이끌었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헌신했습니다. 어떻게 헌신했습니까? 즐거이.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즐거이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영솔과 헌신이 상호 대응합니다. 즉, 백성들이 헌신할 수 있도록 지도자들은 먼저 앞서서 모범을 보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순서를 보십시오.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고 지도자들이 영솔했다가 아니라, 지도자들인 영솔자들이 먼저 영솔하고 그리고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백성들이 본 것이 무엇입니까? 지도자들의 헌신과 그들이 먼저 앞장서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보다 앞서간다고 하셨습니다. 양들을 먼저 내보내고 나는 뒤따라 가는 것이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분이 선한 목자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인 영솔자들이 먼저 앞서가고, 그 뒤를 따라가는 자들이 백성들인데, 백성들이 어떻게 즐거이 헌신할 수 있었을까요? 즐거이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지도자들이 최선을 다해서 헌신하고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면 백성들이 신이 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앞장서서 가는 사람들이 모범을 보이고 솔선수범하고 먼저 희생하고 헌신하는데, 백성들이 신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백성들이 실망하는 이유는 지도자들의 삶을 보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또 즐거워하는 이유도 지도자들의 삶을 보고 즐거워합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5. 교실에서 현장으로
그런데 오늘 여기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드보라는 어디에서 재판했습니까? 드보라의 종려나무. 즉, 한마디로 말하면 교실이었다는 뜻입니다. 교실에서 본인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알려주었습니다. 미쉬파트(מִשְׁפָּט)와 체다카(צְדָקָה)를 설명해주었다는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 미쉬파트와 체다카를 공부했습니다. 지금까지 교실에서 배웠던 것, 지금까지 백성들에게 '말씀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수직적인 미쉬파트는 이렇고 수평적인 체다카는 이런 것이다'라고 가르친 곳이 드보라의 종려나무였습니다. 교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교실에서 배웠던 것이 현장으로 나가면 과연 이것이 그대로 이루어질까요? 영향력이 있을까요? 이론으로 우리가 수업을 했습니다. 현장에 나갑니다. 머리로 우리가 공부를 했습니다. 현장에 나갑니다.
체육 수업할 때 교실에서 이론 수업을 합니다. 육상은 이렇게 하는 것이고 배구는 이렇게 하는 것이고. 그런데 운동장에 나갑니다. 잘됩니까? 그것이 잘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압니다. 드보라의 종려나무에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쟁터에 나가서 정말 그것이 그렇게 되는지,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지 이길 수 있는지, 그것을 해봤다는 말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이겼습니다. 놀랍게도 승리했습니다. 그 승리의 비결을 이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영솔자들은 영솔하고 백성들은 즐거이 헌신하고.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교실에서만 배우고, 예배당에서만 배우고, 드보라의 종려나무에서는 배우는데, 현장에서, 우리 일터에서,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그 자리에서는 말씀대로 살지를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 될까 봐. 이렇게 살아서는 내가 망할 것 같으니까. 정직하게 살려고 했는데 정직하게 살아서는 망할 것 같으니까.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안 사셨으니까. 아버지가 가정에서는 그렇게 가르쳤는데, 교회에서 목사님도 장로님도 선생님도 그렇게 가르쳤는데, 그렇게 앞장서서 살아가는 사람을 내가 본 적이 없으니까.
영솔하는 사람들이 먼저 앞서서 그렇게 사는 자가 없으니까, 뒤따르는 사람들이 즐거이 말씀에 헌신을 못 하는 것입니다. 한 번도 그렇게 살아가서 승리한 자를 본 적이 없으니까. 그것이 지금 우리 신앙교육의 실패입니다.
지금 드보라의 종려나무가 전쟁에서, 현장에서 힘 있게 승리한 까닭은 영솔자들이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여줘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려워서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절에 부자 청년이 그랬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1절과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청년이 영생의 문제를 알기 위해서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교실에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교실에서 배우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엇을 요구합니까? 현장을 요구합니다. 너 있는 것 다 팔아라.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 현장에서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이 요구하셨습니다.
이 청년은 교실에서는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말씀을 현장에 가서 실천하기는 근심이 많습니다. 장애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모에게서 이것을 못 배웠거든요. 그 어른들에게 그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하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늘 보좌 버리고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칭호와 직함, 모든 것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셨기 때문에 영솔자가 될 수 있고, 예수님의 그 놀라운 능력과 예수님의 헌신을 본 자들은 즐거이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실에서의 말씀이 현장에서 현실이 되고 이루어지려면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앞장서서 나가는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드보라의 종려나무는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정이 드보라의 종려나무로만 끝난다면 반쪽짜리 신앙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삶의 현장에서 우리 자녀들이 승리하고 돌아올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부모가 중요합니다. 앞장선 리더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오늘 이 2절 말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6. 전쟁의 주인은 하나님 (4절)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이 전쟁을 드보라가 노래한 것입니다. 가나안 왕 야빈과 적장 시스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이 전쟁의 주체가 누구였다는 말입니까? 이 4절의 주어가 누구입니까? "주께서 나오시고" 그랬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오시고" 사실은 누가 나갔습니까? 주께서 나오신 것이 보였습니까?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은 드보라가 앞장섰고 바락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뒤따라 나갔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께서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전쟁을 이끌어가시는 주체는 누구셨다는 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다 이끌어가시고 주관하시고, 전쟁의 주인은 하나님이셨다. 이 신앙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매우 중요한 까닭은 이 승리의 공을 내가 가져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승리의 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을 드보라가 이 노래에서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승리에 도취되면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어 합니다. 일반적입니다. 보편적이고 그것이 상식입니다. 왜냐하면 옆에서 부추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드보라는 "주께서 나오시고"라고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고백한다면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어떤 전쟁에서도 주께서 하시기 때문에, 이 명분이 내게 확실하다면 내가 어린아이라도, 내가 노인이라도, 내가 능력이 없고 무기가 비록 변변치 않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다윗이 역시 그랬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갈 때 뭐라고 합니까? 사무엘상 17장 47절, 49절을 한번 보십시오.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그다음이 중요하죠. 뭐라고 했습니까?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전쟁의 주인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그러면 그 돌을 던진 사람은 다윗이지만, 그 돌이 정확하게 비행해서 골리앗의 이마를 적중시킨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 전쟁이 나에게 속한 것이면 내 능력이 일천하면 나는 못 나갑니다. 이 전쟁이 내가 하는 전쟁이라면 이 물맷돌 가지고 어떻게 나가겠습니까? 어림도 없죠. 그러나 이 전쟁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저 블레셋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전쟁이고,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이 확실하다면, 다윗이 물맷돌이 아니라 고무신 하나 들고 나가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전쟁입니다.
물맷돌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능력이 있는 것이지, 그 무기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힘입어서 나가는 다윗에게 힘을 주신 하나님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드보라는 그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고백이 왜 중요하냐? 이 시대적 배경을 한번 보십시오. 사사시대, 시대적 배경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 아닙니까? 그럼 기준이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나. 내가 기준입니다.
그런데 지금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두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두고 살고 있습니다. 기준을 내가 아닌 하나님께로 고백하고 옮기는 이 놀라운 고백이 드보라의 고백이라는 말입니다.
요즘 이 시대에 우리가 포스트 모던 시대를 지나서 이미 21세기 초반을 지나가는 세계에 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시대는 자기가 중심이 되는 시대입니다. 거대담론은 사라지고 개별이 다 주인이 되고 내가 신이라고 생각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이 시대하고 똑같습니다. 내가 옳으면 하는 것이고 내가 싫으면 누가 뭐라 해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 눈치도 보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 부모의 말이라 하더라도.
그런데 이런 시대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기준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왜 싸우는지, 왜 이 전쟁을 해야 되는 건지, 그리고 이 전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드보라가 이것을 고백했습니다.
7. 암흑 같던 시대 (6-7절)
이제 페이지를 한번 넘겨 보시면, 6절을 한번 보십시오. 드보라가 이런 노래를 합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대로가 비었고 오솔길로 다녔다. 무슨 말입니까? 대로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로로 다니지를 않습니다. 오솔길로 다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낭만을 즐기려고? 그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그렇습니다. 두려워서, 약탈당할까 봐. 대로로 다니면 가나안 왕 야빈이, 그 당시에 정권을 가지고 힘을 가지고 철 병거 구백 대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우리를 약탈할까 두려워서 대로로 못 다닙니다.
무서워서, 생명을 빼앗길까 봐. 자신의 재산과 생명에 강력한 위협이 되니까 대로로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누가 있었습니까? 아낫의 아들 삼갈도 있었습니다. 야엘도 있었습니다. 삼갈은 어떤 사람입니까?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한꺼번에 쳐 죽인 구원자였습니다. 포괄적으로 사사라고 말합니다.
야엘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 손에 방망이를 들고 한 손에 장막 말뚝을 들고 적장을 한 번에 꽂아 죽인 사람입니다. 부분적으로 구원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여전히 암흑천지였다는 뜻입니다.
삼갈이 일어나기도 했고 야엘 같은 영웅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그러나 여전히 이 시대는 대로로 다닐 수 없고 샛길로 다녀야 되는 어두운 시절,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왜 그렇게 다녀야만 했을까요? 적이 너무 강해서? 적들이 너무 세서? 그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들여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숭배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근본 원인 아닙니까?
8. 이스라엘의 어머니 (7절)
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사람도 없습니다. 마을에 사람들이 이제는 시대가 악하니까 두려우니까 자녀를 낳지를 않습니다. 그런 시대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이것이 중요하죠. 드보라의 정체성을 자기 스스로 고백합니다. 뭐라고요? 이스라엘의 어머니. 그러면 지금까지 드보라가 한 일을 한번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어떤 역할을 하는 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 드보라. 하나님께서 드보라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드보라의 종려나무에서 기준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절대 기준 없이 방황하고 흔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보라의 종려나무에 오면 기준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어머니의 역할 첫 번째, 기준을 가르친다. 철저한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두 번째, 앞장서는 사람이다. 영솔하는 자가 먼저 앞장섰지 않습니까? 전쟁 때에 바락이 가지 않겠다 그랬을 때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드보라가 여성의 몸으로 앞장섰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 이스라엘의 어머니 드보라가 나타나기까지 이런 시대, 암흑한 시대가 계속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부분적이고 간헐적으로 영웅들이 출현하고 에훗 같은 사람, 삼갈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할지라도, 여전히 암흑천지였던 까닭은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그 당시 어머니들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다 어머니들인데. 그러면 그 당시에 모든 어머니들은 다 생물학적인 어머니였다는 뜻입니다. 그냥 기능적인 어머니. 자녀를 낳고 젖 먹이고 밥 주고 옷 입히고 키우고 때로는 회초리 때리고 그랬던 어머니. 그런데 그 어머니의 영적인 역할을 못 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 모든 백성들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말씀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 두 번째는 영솔자로서 앞장서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의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우리 가정에 진짜 어머니,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돈 벌어서 아이들 학교 보내고 용돈 주고 그냥 키우고, 그것이 부모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준을 제시해주고 앞장서서 믿음의 투쟁을 살아내 주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과 기준을 제시해주는 사람, 그분이 진짜 어머니이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어머니는 아무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영웅은 할 수 있습니다. 한 번씩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소 모는 막대기로 600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한 번씩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서 적장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영웅적인 행동은 할 수 있는데, 지속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이스라엘의 어머니의 역할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말씀 위에 붙들고서 있어야 되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진짜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이 되셔야 됩니다. 교회는 이 시대에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교회가 지금 이 땅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 땅에 수많은 교회들이 이 땅의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한다면, 교회가 기준이 딱 되어준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는 타협하지 않아.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살아가고. 이 교회는 이런 말 하고 저 교회는 저런 말하고, 이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고 저 목사님은 저렇게 말하지 않고, 철저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교회가 한 목소리를 낸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목소리가 나간다면, 이스라엘을 살리는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한 것처럼 이 시대에 교회가 이 민족을 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또 앞장서서 솔선수범하고 교회가 먼저 모범을 보이면, 교회가 이 민족의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교회 역사가 몇 년이 되었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들어와서 우리 교회가 세워진 지 몇십 년입니다, 몇백 년입니다.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이 뭐가 중요합니까? 지금의 역할이 중요하지.
그런 얘기 많이 듣잖아요. 이 교회가 뭐 우리 한국 교회 어머니 교회다, 뭐 어떤 교회다. 이런 얘기 하잖아요. 우리 교단이 장자 교단이다. 그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현재 역할이 중요하죠.
우리 교회가 68년째 이 자리에 터를 잡고 있는 것이 그것이 뭐가 의미가 있습니까? 정말 이 지역에 어머니로서의 기준을 제시하고 모범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드보라가 된 것처럼,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보라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적들이 쳐들어옵니다. 어머니가 가만히 있습니까? 없던 힘이 나고 전투력이 생기고 내 새끼들을 보호하려고 나서서 맞서 싸우지 않습니까? 드보라도 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해야 된다. 이것 잘 기억하시고.
9. 동참한 지파들과 동참하지 않은 지파들 (9-18절)
그다음 9절에서 18절까지를 잘 보셔야 됩니다. 되게 좀 복잡하고요, 지파들 이름도 많이 나오는데, 9절을 한번 보십시오.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지휘관들을 사모함은"
지금 이 노래를 누가 썼습니까? 드보라가. 그러니 지금 드보라 나의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드보라, 나의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들을 사모함은, 사모한다는 말은 좋아함, 그를 긍휼히 여기고 기뻐함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방백들은 지도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전쟁, 혼자였습니까? 하나님이 주도하셨지만 드보라가 이끌고 바락이 거들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의 방백들이 함께 싸웠지 않습니까? 앞장서서 싸워준 방백들, 그들을 내가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백성 중에서"
여기서 그들은 방백들입니다. 지도자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드보라가 앞장서고 바락을 끌고 가고 그러니 백성의 지도자인 방백들도 즐거이 헌신했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얘기를 하고 있고.
10절을 보십시오.
"흰 나귀를 탄 자들"
누구일까요? 나귀 중에 흰 나귀, 아주 부자들입니다. 대단한 부자들. 엄청난 부자들. 상류층들입니다.
"또 양탄자에 앉은 자들"
양탄자에 앉아서 뭘 할까요? 화투칩니까? 양탄자에 앉아서 재판하는 사람들.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흰 나귀를 탄 자들은 부유한 자들이고요, 양탄자에 앉은 자들은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재판하는 사람들.
"또 길에 행하는 자들아 전파할지어다"
길에 행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평민들이죠. 일반인들.
그러면 이 모든 사람들, 부자들, 권력자들, 평민들, 하면 다 이스라엘 백성들 아닙니까? 즉, 이 세 부류를 다 합하면 모든 백성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백성들아 전파할지어다. 내용이 없죠. 목적어가 없잖아요. 뭘 전파해야 됩니까? 없으면 그다음을 찾아보셔야 됩니다.
11절, 뭘 전파하라고 하는가?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이것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다는 것. 그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승리를 허락하신 그때.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어떻게 다녔습니까? 대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샛길로 다녔습니다. 약탈당할까 봐, 적들이 두려워서.
그런데 이제는 백성들이 성문으로 내려갑니다. 성문은 대로입니다. 성문이 딱 열리면 대로가 딱 펼쳐지지 않습니까? 이제는 적들을 섬멸했으니까. 가나안 왕 야빈을 잡아서 섬멸했고 적장 시스라도 죽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그들이, 이때에 승리한 그때에 백성들이 성문으로 내려간다. 이것을 전하라고 그랬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겼다는 얘기입니다. 백성들에게 전하고 또 전파하라. 과거에는 인터넷도 없고 신문도 없고 방송도 라디오도 없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식에서 소식으로 계속 전국으로 다 전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겼다고. 이제는 이들이 물러났다고. 이제 너희들 숨어 있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너희가 대로로 다녀도 된다.
승리의 소식을 전하라고 그랬습니다. 승리의 승전고를 울리고 승전보를 다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입니다.
10.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 (12절)
그런데 12절을 보십시오. 놀라운 얘기를 합니다. 자, 이겼습니다. 이겼어요. 이제 이겼으면 세상 사람들은 이기면 어떻게 합니까? 삼국지 같은 거 보면, 수호지나 삼국지 보면 이겼잖아요. 그러면 술을 데려가라, 고기를 데려가라, 쌀을 가지고 떡을 만들라. 먹고 마시고. 그다음 어떻게 해요? 이제 등급을 정합니다. 공을 세운 사람들의 등급을 정해서 땅도 주고 하사하고 공신을 책봉하고. 이런 과정에서 기분 나쁘고 화나는 사람, 다시 삐져서 나가기도 하고, 뭐 이런 일들이 막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 후의 삶을 한번 보십시오. 12절 함께 읽습니다.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여기까지 끊어져야 돼요. 자, 드보라의 역할이 여기까지예요. 일어날지어다는 드보라의 역할이 아니에요. 이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여기서 딱 끊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어디서 끊어야 될지 모르니까, 바락이 할 일과 드보라가 할 일을 정리해줘야 됩니다.
몇 번이나 합니까, 지금? 드보라가 자기에게,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네 번이나 계속해서 거듭해서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어디에서 깨라고요? 승리에 도취된 모습에서 깨어나라.
지금까지 우리가 승리에 도취되어서 얼마나 많이 실패했느냐. 그 승리에서 깨어나라. 깨어나라. 깨어나라.
이 지도자들이요, 참 약합니다. 왜 약하냐? 작은 승리에도 아주 기뻐하고, 작은 성공에도 누가 날 알아줬으면 좋겠고, 옆에 간신들이 막 붙거든요. 잘한다고 잘한다고 부추기고. 그러면 거기에 취해서 그다음에 바로 넘어집니다.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아이성 전투에서 왜 졌습니까? 여리고성 전투, 그 위대한 승리를 하고 나서 아이성 전투에서 바로 자빠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랬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그래서 드보라가 승리 후에 승전보를 전하고 난 이후에 스스로 얘기하는 말이에요.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깨자. 또 깨자.
이스라엘의 어머니답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어머니. 어머니들은 이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계속해서 영적으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내가 자그마한 성공에 도취되어 가지고 그것 가지고 계속 평생을 우려먹고, 내가 옛날에는 내가 이랬는데, 20년 전에는 내가 이랬는데. 아무도 그것 관심 없습니다. 누가 그것 계속 듣고 싶어 합니까?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면 과거의 성공에 발목 잡혀서 현재를 낭비하고 미래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 또 전진하고. 우리 눈앞에 영적인 전투가 매일매일 펼쳐지지 않습니까?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깨지 못하고 그 성공에 도취되어서 거기에 빠져서 계속해서 거기서 샴페인 터트리고 있다가 망하는 것 아닙니까? 나라도 가정도.
그래서 드보라는 계속해서 자기를 영적으로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깰지어다. 깰지어다. 그리고 뭘 합니까? 노래할지어다. 영적으로 깨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위대한 깨달음을 하나님께 노래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서 이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답지 않습니까? 이것을 보면 백성들이 배웁니다. 그렇구나. 배웁니다.
이제 바락에게 해야 될 일.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지도자는 영적으로 깨어 있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백성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고 일어나서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가는 순종을 하고. 명확하지 않습니까?
승리 후에 지도자가 깨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백성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가고. 이것이 되는 집안입니다. 되는 집안. 승리 후에 지도자는 술에 빠져 있고, 백성들은 자기 공을 계속 외치면서 이거 달라고, 땅 달라고, 벼슬 달라고, 훈장 달라고, 금붙이 달라고 이러고 있으면, 그것이 안 되는 집안이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성공 이후가 진짜 중요합니다. 작은 성공, 큰 성공 가릴 것 없이, 믿음의 성공, 믿음의 성취 이후가 아주 중요합니다. 깨어 있어야 됩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어야 되고, 지도자는 깨어 있고 이름을 노래하고, 백성들은 따라가고. 그러면 악한 사탄 마귀가 틈탈 길이 없습니다.
동참한 지파들 (14절)
이제 14절부터 중요한데요, 하나하나 볼게요.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의 뿌리 박힌 자들이요"
이 말씀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즉, 에브라임 사람들은 아말렉의 뿌리 박힌 자들이다. 이 말은 아말렉이 뿌리 박고 사는 곳을 정복했다는 뜻입니다. 아말렉의 터에 뿌리를 박았다라는 뜻이니까. 그러면 에브라임은 이 위대한 영적 전투에서 바락처럼 일어나서 따라가서, 드보라가 외쳤던 그 전쟁에서 순종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말렉을 쫓아냈으니까. 그렇죠. 일단 에브라임은 좀 색깔 다른 걸로 동그라미 하셔야 됩니다. 얘들은 착한 애들, 잘한 애들. 나중에 안 한 애들이 있거든요.
"그 다음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얘들 착한 애들입니까? 못된 놈들입니까? 착한 애들이에요. 왜? 따라갔으니까. 따라갔으니까. 지금 승리에 도취되지 않았으니까. 따라갔으니까.
"그다음 마길에서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마길은 므낫세 지파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우리가 이스라엘 지파 땅 분배하는 것을 다 기억하셔야 되는데, 요단강을 기준으로 요단강 동쪽에 므낫세 반 지파가 분배받았고, 요단강 서쪽에 또 므낫세 반 지파가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마길은 요단강 서쪽에서 땅 분배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얘들도 역시 착한 애들입니다.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
내려왔도다 하는 것은 동참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14절에 나오는 애들은 다 괜찮은 분들입니다.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 반, 스불론.
15절을 보십시오.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드보라와 함께 있으면 우리 편입니까, 아닙니까? 우리 편. 잇사갈도 우리 편.
동참하지 않은 지파들 (15-17절)
이제 그다음이 중요해요.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여러분, 이것이 어떤 느낌이세요? 르우벤 지파가 시냇가에서 큰 결심을 했어요. 우리가 생각할 때 큰 결심하면 큰 결단 아닙니까? 그럼 뭔가 좀 잘한 거 같죠? 근데 이것이 좀 번역이 사실 이런 뉘앙스로 하면 우리가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결심이라는 말, 히브리어로 찾아보면 헤케르(חֵקֶר)라는 말을 썼습니다. 헤케르. 탐구, 심사숙고라는 뜻입니다. 우리 그런 말 있죠.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시냇가에 앉아 가지고요, 탐구하고 있습니다. 갈까? 말까? 심사숙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발을 넣을까? 말까? 할까? 말까?
이제 잔당들을 쫓아내는데, 큰 전쟁에서 승리하고 잔당을 제거하는데, 르우벤 지파가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16절을 보십시오.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서"
르우벤입니다.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양의 우리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를 듣고 있다. 무슨 말입니까? 갔습니까, 안 갔습니까? 전쟁하러 갔으면 이렇게 평화로운 한가로운 분위기에서 피리 소리 듣고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안 갔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큰 결심이에요. 탐구하고 심사숙고하고 안 갔습니다. 결단하고 가야 되는데.
그러면 르우벤은 나쁜 놈이에요. 얘는 다른 색깔로.
그런데 17절에 보니까?
"길르앗은 요단 저쪽에 거주하며"
요단 저쪽이라고 하는 것은 요단강을 기준으로 요단 동쪽을 얘기합니다. 요단 동쪽에 자리 잡고 땅 분배받은 지파가 두 지파 반이 있습니다. 생각나십니까?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 동쪽 므낫세 지파.
그러면 지금 르우벤 지파가 안 갔잖아요. 르우벤 지파가 제일 큰 영향입니다. 지금 그러니 갓 지파, 므낫세 반 동쪽 지파는 함께 떼거리로 안 온 것입니다. 왜? 멀다는 이유로. 아, 강 건너가기 싫어요. 못 갑니다. 하고 안 온 거예요.
그럼 여기 길르앗이라고 표현된 것은 그 안에 르우벤, 갓, 므낫세 반이 다 포함된 것입니다. 얘들도 나쁜 놈들입니다. 동참하지 않았으니까.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 저 돈 벌어야 돼요. 지금 물고기 잡아야 돼요. 예수님의 제자들,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랬는데, 단은 배에서 물고기 잡느라 안 옵니다.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역시 이분들도 먹고 사느라 바빠서 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15절 끝에 르우벤부터 시작해서 길르앗, 르우벤, 갓, 므낫세 반, 단, 아셀은 다 나쁜 애들입니다. 그렇죠?
다시 칭찬받은 지파들 (18절)
그다음 18절.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찬사입니다. 얘들은.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스불론,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전쟁에 목숨을 걸고 스불론 지파가 여기에 동참하고 뛰어들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끝까지 동참해서 끝까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태워가면서 이 자리에 동참한 스불론 지파,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드보라가 칭찬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감독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리더 입장에서 볼 때, 이끌고 나가는 영솔자 입장에서 볼 때 고마운 거예요. 스불론이 이 전쟁의 현장에서 내가 보니까 얘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더라. 그것이 고마운 것입니다.
우리 사도 바울 이야기를 좀 봅시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보시면 바울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바울이 그랬습니다. 나는 얽매이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의 복음 전파의 출사표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 전파의 정신입니다. 스불론이 그랬습니다. 다 걸고 명분 있는 싸움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니 지도자가 알아주지 않습니까? 자손만대에 기록되지 않습니까?
스불론 지파가 야곱에게는 어디 눈길이나 한번 야곱이 주었습니까 그랬는데, 그런 어둠의 시절을 살았던 스불론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사람들이 됩니다.
언급되지 않은 지파들
그런데 여기서 빠진 지파가 있습니다. 찾아보십시오. 두 지파, 안 보이는 지파. 유다, 시므온. 유다, 시므온이 없습니다. 어디 갔습니까? 유다, 시므온이 동참하지 않습니다. 아예 없습니다. 아예 언급도 없습니다. 안 왔다는 거죠. 안 왔습니다.
유다와 시므온. 우리가 1장에서 유다를 봤습니다. 유다가 하나님이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그랬는데 유다가 시므온 달고 가잖아요. 말씀을 취사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전쟁에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아예. 왜 그랬을까요?
지리적으로 가장 남쪽이거든요. 멀다는 이유로. 길르앗 지파들, 요단 동쪽에 있는 애들은 강 건너오기 싫다는 이유로 오지 않습니다. 근데 만약 여기에 돈잔치가 있다, 여기에서 자기 지파에 이익 되는 뭔가가 있다 하면 올까요, 안 올까요? 1등으로 올 겁니다.
교회도 참 재밌는데, 요즘 집에서 밥 굶고 사는 분들은 아마 거의 없는데, 떡 준다 그러면 그렇게 오세요. 줄도 길게 서시고. 식당에서 특식한다 그러면 또 그렇게 열심히 오시고. 없다 그러면 잘 안 오고. 열 살짜리 애들도 아닌데 그래요.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이 되면 뭐라도 얻으려고 달려드는 것이 사람인데, 목숨 거는 전쟁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스불론 지파처럼 이렇게 해야 되는데.
우리가 이것 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공허한지 압니다. 시편 133편 1절을 보시면.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여러분, 이것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말씀 잘 아시죠?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것. 좋을 때만 연합하고 동거합니까? 잔치 때, 누구 결혼식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먹을 것이 있을 때, 화목제 드리고 소와 양고기 먹을 때, 그때 모이고 동거하고 기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 전쟁할 때, 지도자가 노래 부르고 함께 모이자고 할 때, 그때 동참해야 됩니다. 중요한 자리에, 헌신하는 자리에 한 발은 세상에 두고 한 발은 헌신하지 않고 영광을 누리려고 하고, 헌신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고. 그래서 어떻게 영광을 얻겠습니까?
지금 이 사람들, 여기 나타나지 않은 르우벤 같은, 단 같은, 아셀 같은, 유다 같은, 시므온 같은 이런 분들은 모두가 다 바락 같은 자들입니다. 다 조건부 순종했던 자들. 그런 분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런 사람들 되면 안 됩니다. 믿음의 백성들은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한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는 우리가 다 솔선수범하고 헌신하고 함께 모여들 수 있어야 됩니다. 중요한 일, 어려운 일에는 모두가 다. 더 힘든 일에 우리가 매진하고 같이 해야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중요하다고 함께 하자고 하는 일은 함께 해주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겠습니까? 힘이 모이겠습니까? 그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11. 별들이 하늘에서 싸웠도다 (19-22절)
그다음 19절.
"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가나안 왕들, 적들입니다.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전리품을 챙겨가지 못했다. 그뿐이 아닙니다. 졌습니다. 가나안 왕들은 전쟁에서 졌습니다. 그러니 전리품을 못 가져갔죠.
20절.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시스라가 적장 이름 아닙니까? 관자놀이에 말뚝 박혀 죽은 사람. 그런데 이 시스라와 싸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실은 드보라와 바락이에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랬습니다.
별들이,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웠다. 하늘에 별만 있습니까? 하늘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시스라와 싸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감독판 해석입니다. 드보라가 볼 때.
그런데 이런 상황을 우리 지난 시간에 봤던 사사기 4장 15절을 한번 보시면 이렇게 얘기하죠. 사사기 4장 15절.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여기도 주어가 누구입니까? 여호와께서. 이것을 5장에서 시로 표현하면서는 이렇게 표현한 거죠.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웠다. 그렇게 우리가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21절.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기손강은 원래는 그냥 작은 시내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강이 불어나서 거기에 있는 악한 자들을 다 쓸어가 버렸다는 뜻입니다.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22절.
"그 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리도다"
이제 이겼다는 뜻입니다. 다 도주했습니다.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리면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전부 다 도망가고 승리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두에서 얘기한 것 있죠. 뭘 얘기했습니까? 드보라의 종려나무는 교실이라 그랬습니다. 그 교실에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근데 그 말씀이 정말 전쟁터에서 효과가 있을까? 이루어질까? 백성들은 거기에 물음표가 있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드보라에게 바락과 함께 전쟁터에 데리고 나가서 승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드보라와 백성들의 방백들이 앞장섭니다. 그리고 전쟁터로 나갑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이겼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신앙 교육을 하셨죠. 그러고 나서 제자들 둘씩 둘씩 짝 지었습니다. 그래서 70명을 모았습니다. 그럼 몇 쌍입니까? 35쌍. 전도팀 35팀을 만들어서 둘씩 둘씩 쫙 찍어서 보냅니다. 가서 배운 대로 해보라고.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누가복음 10장 1절과 17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방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다 보내고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이것이 선교 보고예요. 그들이 교실에서 배웠거든요. 예수님과 다니면서 예수님 설교 듣고 예수님 하시는 것 어깨 넘어.
그런데 예수님이 이제 "너희는 여기 교실에만 있지 말고 현장에 가서 해봐.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준 대로." 현장에 갔어요. 가니까 되는 거죠. 그것이 안 될 줄 알았는데, 두려운 마음으로 쭈뼛쭈뼛한 마음으로 안 될 거 같았는데, 가서 하니까 됩니다.
그래서 너무 기뻐서 돌아와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으니까 귀신이 나가더이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하늘에서 사탄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봤다고, 너희들이 가는 것을 보고.
여러분,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을 우리가 왜 맛보지 못하는 겁니까? 나가지 않으니까.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돌아가니까. 안 하니까. 예배당 안에서만 외치고 예배당 안에서만 되는 줄 알고, 예배당 문을 나가면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버리니까.
그것을 우리 부모들이 보여주셔야 됩니다. 말씀대로 살아보자, 되는지 안 되는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한번 부딪혀 보자. 기도해 보자. 우리 한번 작정 기도해 보자. 우리 자녀들이야. 우리 한번 해보자. 이것 부딪혀 보자.
그래서 해봐야 자녀들이 그것을 보고 따라갈 것 아닙니까? 즐거이 희생할 것 아닙니까? 헌신하고.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드보라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드보라의 종려나무는 그냥 반쪽짜리입니다. 전쟁터에서 되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 백성들이 감격이 어땠을까요? 야, 드보라의 종려나무에 배운 것이 되네. 진짜 되네. 놀랍네. 그러면서 부흥이 일어납니다.
거기에서, 거기에서 감동이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흥회는 교회 예배당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자리가 부흥의 역사고 그 자리가 능력의 역사지. 예배당에서 백날 찬송 부르고 말씀의 은혜 받고 나가서 잊어버리면 그것이 무슨 부흥입니까? 안 됩니다. 그것은.
12. 여호와를 돕는 자들 (23절)
그다음 23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사자가 이르기를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여기서 용사는 적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를 규명해야 되는데요. 메로스가 어디인가? 어느 도시인가? 성경에 여기 유일하게 나옵니다. 미스터리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런 얘기를 해요. 가상의 도시가 아닌가? 또 어떤 학자들은 이때까지 앞에 우리가 살펴봤어요. 돕지 아니한 나쁜 애들, 그들을 다 통칭적으로 메로스라고 표현한 것은 아닌가?
뭐가 어떻게 될 건 그것이 도시이건, 앞에 얘기했던 모든 지파들을 통칭적으로 유다와 시므온과 길르앗 두 지파 반과 단과 아셀, 그들이건, 어쨌든 그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돕지 않은 거예요.
근데 우리가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도와야 됩니까? 감히 내가 뭐라고? 우리의 도움이 없으면 하나님은 전쟁 못 합니까? 내가 돕지 않으면 하나님이 전쟁에 승리 못 합니까? 그 말 아닙니다.
여기서 이 말은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드보라와 바락과 함께하는 방백들, 스불론과 납달리와 잇사갈과 동참하는 이 자리에 함께 동참하는 주의 전사들을 얘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인격과 동일화시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선물인지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인격과 동일화될 수 있는 순간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가? 사도행전 9장을 한번 보시면,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예수 믿는 사람 박해하고 옥에 잡아넣잖아요. 그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서 뜨거운 그리고 아주 밝은 빛 가운데 사울을 만납니다. 그리고 눈이 안 보인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세요?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그랬습니다. 근데 사울은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거든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근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그랬어요.
그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역군들과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하나라는 뜻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서 죽이는 그 자리에 사울이 함께 있었고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옥에 넘기는 일, 그 일을 앞장서서 사울이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죽어가는 자들, 스데반과 내가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박해받는 자와 내가 하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선물보다도 위대한 선물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 가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여호와를 돕지 않는다. 그 말은 하나님의 일에 나선 사람은 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하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당연히 주의 일에 힘써야죠. 당연히 하나님께서 "너의 헌신과 너의 수고와 너의 물질과 너의 눈물과 너의 기도와 너의 땀이 필요하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위대한 순간인데, 그것이 동참해야 되지 않습니까?
거기서 시냇가에 앉아서 르우벤처럼 심사숙고하고, 거기서 할까 말까 탐구하고 망설이고, 이것저것 재고 멀리 서서 "온다 못 온다" 이런 소리나 하고 그러면 절대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자기 복을 스스로 차는 것입니다. 이것 기억하셔야 됩니다.
13. 야엘과 시스라의 어머니 (24-30절)
근데 보십시오. 24절.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왜 복받습니까? 하나님 일을 했기 때문에. 그러면 야엘은 여호와를 도운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하나가 된 사람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그래서 대비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다음 28절을 한번 보십시오. 시스라의 어머니. 시스라는 죽었습니다. 적장은 머리에, 관자놀이에 말뚝이 박혀서 죽어버렸습니다. 근데 시스라의 어머니가 아들을 기다립니다.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창문을 통하여, 창살을 통하여. 이것 딱 줄을 쳐 놓으시고요, 좀 있다가 설명하겠습니다.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29절.
"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자기 스스로 답을 이렇게 찾는 것입니다. 아들이 기다려도 오지 않는데.
30절.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반드시 이겼고 노략물을 가지고 올 거다. 전리품을 갖고 올 거라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에게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놓은 채색 옷이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너무 구체적이죠. 이 할머니가 기대하는 것이 아들이 항상 이것을 전리품으로 어머니에게 갖다 준 것 같아요. 전쟁하고 전리품. 양쪽에 수놓은 전리품이요. 양쪽에 수놓은 채색옷. 한쪽만 수놓은 채색옷 말고 아주 값비싼 채색옷. 그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항상 젊은 처녀들을 인질로 삼아서 자기 자리에 데리고 올 것이다. 이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들은 이미 여인의 손에 죽었는데.
그런데 보십시오. 다시 돌아보면 28절,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었다 그랬습니다. 창문과 창살은 자기의 세계관입니다. 이 여인의 세계관요.
우리가 창문을 통해서 보면 창문의 유리에 셀로판지가 노란색이 붙어 있다, 다 노랗게 보이잖아요. 세상이. 파란색이 붙어 있다, 다 파랗게 보이잖아요.
시스라의 어머니의 세계관은 이런 것입니다. 아들이 곧 자기의 부와 명예입니다. 아들이 돌아와서 나에게 채색옷을 줘야 됩니다. 이 어머니입니다. 시스라의 어머니.
이스라엘의 어머니답습니까? 이방인의 어머니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자식을 보십니까? 내가 어떤 세계관, 나는 어떤 창문을 가지고 내 자녀를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우리 교회를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어떤 창문을 가지고 우리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이것이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내 자녀가 지금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것도 모르고,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고, 이놈들이 가지고 올 채색옷, 양쪽에 수놓은 채색옷만 기다리고 바라고 있는 이 어머니의 허망한 모습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어머니와 너무 대조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무슨 엄마입니까? 시스라의 어머니는 물질의 주인이고 자식을 노략물을 가져오는 도구로 생각합니다. 이 땅에 수많은 어머니들이 이렇습니다.
이 땅에 수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통해서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고 하고, 자식이 가지고 오는 것을 가지고 그것이 곧 나의 인격이고 나의 명예고 그것이 곧 나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자기 자녀들을 다 죽이지 않습니까? 전쟁터로 몰아내서. 그것이 무슨 엄마입니까?
이스라엘의 어머니는 기준을 제시해주는 사람이라 그랬습니다. 내가 솔선수범해서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어머니라 그랬습니다.
세계관을 바꿔야 됩니다. 창문을 뜯어내야 됩니다. 그런 창문으로, 그런 세계관으로 자식을 보고 세상을 보고 말씀을 보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것은 나도 죽고 자식도 죽이는 길입니다.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드보라가 마지막에 감독판으로 정리해 둔 것입니다.
14. 맺는말 (31절)
31절. 여호와여, 이제 마지막 노래입니다. 드보라 얘기예요.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여러분, 또 40년 왔습니다. 아, 40년 숙제입니다. 뭘 해야 되는 숙제입니까? 시스템을 세우고 체계를 세우고 신앙 교육을 하고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세워야 되는 이 40년. 했을까요? 못 했을까요? 못 했으니까 기드온이 또 나오겠죠.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부르시기를 원하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미련하고 어리석고 우리는 참 가치 없는 인생을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처럼 내가 가진 가치관과 세계관의 창문을 가지고 우리 자녀들을 보고 교회를 보았으며 이 나라와 민족을 보았습니다.
주여, 우리 모두가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절대 기준을 가진 부모가 되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눈물 흘려 기도할 수 있는 부모가 되게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먼저 살아내는 말씀 붙잡고 투쟁하는 부모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른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목회자들이 되게 하시고 중직들이 되게 하시고 믿음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을 통하여 노략물을 얻기만 바라고 우리 자녀들을 통하여 수놓은 채색옷만 얻기를 원하는 염치없고 탐욕스러운 자들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그리하여 우리가 자녀들을 굳게 세우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평화의 시간 40년 동안 그들을 말씀의 반석 위에 제대로 올려놓는 참으로 훌륭한 부모 세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