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특강(7) - 기드온 300용사와 하나님의 전략 (삿7장)
본문: 사사기 7장 2절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1. 지도자 기드온
오늘은 사사기 공부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기드온 이야기 그 첫 번째를 함께 살펴봤습니다. 드보라가 세상을 떠난 후, 혹은 드보라가 아직까지 살아 있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나, 드보라 이후에 40년의 시간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40년의 시간은 평화의 시간이었습니다.
평화의 시간에 해야 할 일은 시스템을 세우고 후학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하고 돌보는 일들을 해야 하는 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 평화의 시간을 그들은 그냥 헛되이 보냈습니다. 어떻게 헛되이 보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결국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습니다. 우상숭배의 죄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넘기셨습니다. 팔았다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미디안의 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미디안의 압제 속에서 그들은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내시는데, 좀 특별한 것은 6장에서는 구원자 사사 기드온을 보내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시는 까닭은 너희가 이 꼴이 된 이유를 먼저 분명히 알라는 뜻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죄를 지적해 주십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구원자 기드온을 보내시는데, 이 기드온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 좀 인상 깊습니다.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걸 보면 이 사람은 소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사자를 보내서 "큰 용사여"라고 말합니다. 큰 용사여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을 하나님은 큰 용사라고 부르셨습니다.
1-1. 기드온의 확신
그런데 큰 용사라고 부르셨지만 기드온은 소심했고 세 번에 걸쳐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그런데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그는 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정말 나를 부르신 것이 확실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계속 묻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셔서 드보라의 청을 거절한 바락과는 달리, 정말 하고 싶으나 확신이 서지 않는 자를 위해서 세 번이나 다 응답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바위에서 불이 나와서 응답해 주셨고, 두 번에 걸친 양털의 테스트도 하나님이 다 그냥 참고 묵묵히 들어 주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그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너의 집안을 정결하게 하라. 바알의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때려 부수고, 그리고 제단에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일어서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두려워서 밤중에 했습니다. 열 명의 종을 데리고 했습니다. 중요한 건 주변 정리를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제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지도자 한 사람을 세우십니다. 기드온이라는 지도자를 하나님이 세우시고, 그다음 오늘 우리가 읽은 7장, 오늘 공부할 내용은 이제 미디안과의 전쟁입니다.
2. 하나님의 군대 선발
그럼 지도자 혼자 할 수 있습니까? 지도자가 세워졌으면 그다음 군사들이 세워져야 됩니다. 군사만 있으면 됩니까? 그 군사에게 무기를 줘야 되지 않습니까? 7장 이야기는 군사를 세우는 이야기, 그리고 무기를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어떤 군사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군사라고 부르시는가? 그 군사의 조건, 하나님 군대 조건, 자격이 나올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니까 특별하고 완벽한 무기를 주실 텐데, 그럼 이 무기가 무엇인가? 이걸 오늘 우리가 함께 7장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2-1. 첫 번째 선발 기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2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그랬습니다. 도대체 얼마가 모였길래 많다고 말씀하신 걸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드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문이 삽시간에 이스라엘 전역으로 다 퍼져 나갔고 "아, 이제 미디안과 함께 맞서서 싸울 수 있는 지도자가 세워졌구나" 해서 사람들이 막 연통을 보내고 연락을 하고 군인들을 모았겠지요.
그런데 모여든 군인들이 뒤에 보면 나오지만 32,000명입니다. 32,000명의 군인들이 모였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다고 말씀하신 까닭이 나옵니다.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너희들 숫자가 너무 많아서 너희들 머릿수로 스스로 이겼다 할까 해서 하나님은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적들의 수가 몇 명인지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항상 우리는 숫자에 관심이 많습니다. 머릿수, 적들의 화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7장을 아무리 찾아봐도 적들의 숫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8장 10절을 보시면 이 적들의 숫자가 나옵니다. "이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12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자 15,000명 가량이 그들을 따라와서 거기에 있더라" 그럼 12만 명 더하기 15,000명 하면 몇 명입니까? 135,000명입니다. 적들의 숫자가 135,000명입니다.
자, 135,000명 대 32,000명. 몇 배 정도 차이 납니까? 4배가 넘습니다. 4대 1입니다. 4분의 1밖에 안 됩니다. 우리 군대가.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들 너무 많이 모였다. 숫자가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 군대를 보는 하나님의 관점을 일단은 체크해 놓고 뒤에 가서 이 하나님이 군대를 모집하는 내용들을 한번 보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일단 우리는 135,000명 대 32,000명을 봅니다. 그러니까 택도 없는 거지요. 사실 이 정도 숫자밖에 안 모였습니다. 적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우리의 화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35,000명 대 32,000명을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
도대체 왜 그러면 이 많은 자들을 어떻게 하시는가? 3절을 봅니다.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그랬습니다. 두려워 떠는 자 아웃,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도자 기드온 입장에서 보면, 기껏 이 소심한 사람이 돌다리를 세 번 두드렸습니다. 그래서 겨우 이제 한번 해 볼까 하고 왔는데 숫자가 4분의 1밖에 안 되니까 하나님께 내심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광고를 좀 더 붙일까요? 사람을 한 번 더 보내서 전국적으로 한 번 더 모집을 할까요?" 이러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너무 많아. 돌려 보내라"고 하시고, 하나님이 "두려워 떠는 자를 보내라" 하십니다.
그래서 설마 설마 두려워 떠는 사람이 여기 왜 왔을까 하고 물어보니까 22,000명이 가 버렸습니다. 3분의 2가 넘게 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 까닭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성경에 이미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대로 하시는 겁니다.
신명기 20장 8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책임자들은 오히려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하며 마음이 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 이거 전쟁할 때 얘기예요. 신명기 말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전쟁할 때 지도자들은 두려워하는 자들을 먼저 찾으라 그랬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군사의 조건에서 두려워하는 자를 보내라 그랬습니다.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 두려움은 전염성이 있습니다.
신명기 20장 말씀에 이미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해 두신 겁니다. 왜 모를까요? 기드온이, 이 당시 백성들 왜 모를까요? 지난주에 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못 배워서 그렇습니다. 못 배워서. 못 배우니까 무식한 거지요. 못 배우니까 모세 오경 말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필수 과목인데 40년 동안 가르치지를 않았으니까, 율법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하나님이 직접 티칭하시는 겁니다. 지금 32,000명 모였는데 말씀대로 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 말씀대로.
자, 여러분, 우리가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원본이 있는데 그 말씀대로 사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렵습니다. 왜 어려우냐?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서는 쉬웠습니다. 머리로는. 그런데 그게 전쟁터에 가서 그렇게 될까?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껏 32,000명 모았는데 적들은 135,000명인데, 말씀대로 두려워 떠는 자 가려서 돌려보내라. 이게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첫 번째 관문을 넘어가기가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걸 가르쳐 두지 않았으니까, 지도자들이 아무도 안 가르쳤거든요. 부모도 안 가르치고 누구도.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거예요. "두려워 떠는 자 돌려보내라. 왜? 두려운 자는 전염성을 강력하게 미치니까. 아 무섭다, 두렵다, 겁난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런 사람들 다 보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3분의 2가 갔습니다.
여러분이 법칙들을 우리가 좀 알고 계셔야 되는데, 이 성경이 말하는 이런 법칙, 사람들을 그냥 모았습니다. 그러면 대략 한 3분의 2 정도는 속에 두려움이 있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3분의 2 정도는 오합지졸입니다. 실제로 따져서 "정말 두려움은 하지 마라"고 하면 3분의 2 정도는 이 눈치 저 눈치 안 보고 갈 수 있으면 그냥 갑니다. 그러면 3분의 1 정도가 진짜 정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두렵고 무서운 자들은 사실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지 않습니까? 3분의 1이 전쟁을 하려면 그런 사람들은 없는 게 낫습니다. 그냥 머릿수로 하는 거보다. 다 떠나보냈습니다.
신약 말씀에도 나옵니다. 바울이 이렇게 얘기했지요. 디모데후서 1장 7절, 8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사로 고난받는데 두려움이 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누가 준 겁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면 사탄이 준 거지요. 뻔하지 않습니까? 사탄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자,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면 그건 악한 사탄 마귀가 우리에게 겁을 주는 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뭐라 그랬습니까? 능력과 사랑과 절제라 그랬습니다.
자, 능력과 사랑과 절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이게 가능합니다. 내가 주 안에 있을 때. 나중에 한번 찾아보세요. 빌립보서 4장 13절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랬습니다. 바울이 "내가 그냥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게 교만인데,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으면 할 수 있다" 그랬어요. 그래서 능력이라는 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나타나는 겁니다.
사랑.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죽음보다 더 강한 게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타인을 위해서도 내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 게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절제할 수 있습니다. 언어도 절제할 수 있고 내가 가진 물질도 절제할 수 있고 내 능력도 다른 사람들을 살펴서 절제할 수 있고, 그래서 능력과 사랑과 절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걸 우리가 잘 구별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말씀은 고난이 다가올 때 겁내지 마.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그 안에서 능력도 사랑도 절제도 생기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 돌아간 22,000명의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사로 필요 없다는 얘기입니다. 다 돌아가라. 보내 버렸습니다.
2-2. 두 번째 선발 기준
자, 그다음 이제 어떻게 됐습니까? 비율이 135,000명 대 10,000명입니다. 자, 13.5대 1입니다. 13.5대 1. 이제 13배가 넘는 군대와 우리 군대입니다. 자, 그럼 기드온 마음이 어떤 마음이 될까요? "큰일났다. 이제 이거 그래도 조금 있었는데 더 줄었잖아요. 이제 3분의 2가 넘는 사람들이 가 버렸으니까. 그럼 이 만 명 가지고 뭘 하나?" 나름대로 이제 생각을 막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또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4절.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다" 그랬습니다. 요즘 애들 말로 '헐' 이런 뭐 이런 마음이 들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이게?"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이제 물가로 가셔요.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이건 나를 위한 게 아닌데, 정말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숫자를 불려 주셔야 되는데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한다" 그랬습니다.
그 시험의 테스트가 좀 특별합니다. 5절 보니까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은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이게 그림이 잘 그려지지가 않아요. 설명을 6절에서 또 한번 합니다.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300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자, 이게 무슨 말이냐? 물가에 내려가서 물 마시는 테스트를 했는데 만 명이 물을 마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물에 처박고 마시는 거예요. 그냥 그림 그려지십니까? 목이 마르니까 그게 편하잖아요. 그렇게 마시면.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고 쪼그리고 앉아서 물을 요렇게 떠서 손으로 개가 핥는 거 같이 할짝 할짝하면서 먹더라, 이 얘기입니다. 그렇게 하는 자가 300명이요, 무릎 꿇고 그냥 머리 물속에 집어넣고 마시는 자가 얼마? 9,700명. 비율 한번 따져 볼까요? 자, 만 명에서 100명으로 나누면 이제 퍼센트로 따지면 97%입니다. 자, 100명으로 따지면 97명이 그렇게 했고 3명만 살아남았다는 얘기입니다. 3%의 생존.
두 가지 해석
자, 이게 주석가들마다 좀 다른데 대략 한 두 가지 정도로 주석을 합니다.
첫 번째는 전쟁에 적합한 자와 적합하지 않은 자. 자, 지금 적들이 있습니다. 어디에 적이 매복해 있을지 모릅니다. 적들이 지금 우리가 목이 마릅니다. 우리 아군들이 물을 마시러 왔는데 적이 매복했다가 화살을 딱 겨누고 쏠지 몰라요. 그런데 목마르다고 해서 물을 마실 때 머리를 물에 넣고 막 마시면 다 죽는 거지요. 그냥 죽은 목숨 아닙니까? 자기 욕심으로 충만한 사람들. 전쟁에서 자기 군인의 정체성을 망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97%나 되었다.
그런데 전쟁 시에 좌우를 살피고 주의를 경계하고 혹은 적들이 내 주변에 숨어 있는지를 항상 돌보고 살피는 자. 아무리 목이 말라도 항상 주변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는 자.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자가 한 3% 정도 되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남기셨다. 이런 주석이 하나 있고,
또 다른 설은 그 당시 이 사람들의 영적 문제가 우상 문제지 않습니까? 우상 문제. 물을 마시게 하는 순간 우상에게 무릎을 꿇어 본 사람들, 바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무릎 꿇고 절하는 거 잘하거든요. 무릎 꿇는 모습을 보면 저 사람들이 바알 신앙에 물들어 있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은 바알에게 무릎 꿇어 본 적이 없으니까, 바알에게 무릎 꿇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함부로 무릎을 잘 꿇지를 않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어른들에게 세배하는 문화가 있으니까 무릎 꿇는 것이 좀 일반적인데, 서양 사람들, 유럽 사람들, 특히 여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면 이렇게 샬롬 하고 볼을 부비지, 허그를 하지, 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거나 그러진 않거든요. 우상에게 절할 때만 무릎을 꿇는다고요.
그러니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다, 이건 바알에게 경배한 흔적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유력한 소리입니다. 어쨌건 만약에 바알에게 무릎 꿇은 사람의 퍼센트를 따지면 그 당시 97%가 우상 숭배자라는 얘기입니다. 두려워서 떨지 않는 자라도 그중에 또 한 번 가려내니까 우상숭배자가 100명 중에 97명이에요. 정상적인 여호와 신앙을 가진 사람이 3%.
정체성을 가지고 얘기하더라도 내가 이 전쟁에 왜 투입되었는지 군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100명 중에 3명. 정체성 없이 그냥 와 있는 오합지졸들이 100명 중에 97명. 어떤 식이든지 지금 하나님의 선택은 숫자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바알에게 무릎 꿇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군인이 될 수 있습니까? 자기 욕심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군인으로서 적합합니까?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32,000명 중에 300명밖에 안 된 거예요. 하나님은 그래서 300명을 남기신 겁니다.
2-3. 하나님의 절대 기준
자,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선택하시는 기준, 하나님 나라의 군대를 선택하시는 기준을 우리가 한번 보셔야 됩니다. 사람들은 항상 상대적입니다. 상대적. 상대적이라는 말이 뭡니까? 적들이 몇 명인지를 먼저 계산합니다. 우리도 먼저 찾아봤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 사람들이 몇 명이나 모인 거야. 그래서 하나님이 왜 많다고 하시는 거야?" 적들은 135,000명입니다.
우리는 항상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상대의 숫자가 어느 정도 되는지, 상대가 얼마나 화력을 가지고 있는지 적을 먼저 봅니다. 그리고 나를 봅니다. 손자병법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다, 그랬지 않습니까? 그런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를 보고 나를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거, 상대 이런 거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근거한 사람들이 몇 명이냐, 이게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다시 2절 말씀을 돌아보면 "너를 따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말씀이 뭡니까? 쓸데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말입니다. 쓸모없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자들 쓸모없는 사람이지요. 바알에게 무릎 꿇은 사람 쓸모없는 사람이지요. 자기 정체성,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 쓸모없는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이 너무 많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짜 십자가의 정병으로 전투할 수 있는 군인들만 남겨 두라. 하나님의 기준은 절대 기준입니다. 상대적 기준 아닙니다. 만약에 적들이 한 50만 명이 됐어요. 그럼 우리는 얼마 있어야 됩니까? 적어도 50만 명보다 한 명은 더 많아야 될 거 아닙니까? 우리 기준으로 따지면. 근데 하나님은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기준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자, 오늘날 우리 교회가 자꾸 세상 따라가는데,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가치와 교회를 등가적으로 놓고 보면 교회 건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불편하지 않습니까? 교회 건물이. 세상 가 보십시오. 세상에 백화점, 쇼핑몰, 영화관 얼마나 좋습니까? 근데 그거 따라가다가 가랑이 다 찢어집니다. 못 합니다. 그거 어떻게 합니까?
그 불편함이 우리에게 가치로 바뀌어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불편함을 우리의 영적인 가치로 고쳐낼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근데 자꾸 세상 따라가려고 하고 세상의 가치를 자꾸 추구하려고 하고 그렇게 되면 못 따라갑니다. 어떻게 따라갑니까? 그거 하나라도 더 많아야 되고 한 푼이라도 더 많아야 되는데, 그러니 교회가 자꾸 대형화되고 물량화되고 교회가 자꾸 세상과 자꾸 비교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만큼 우리가 헌금을 하든가, 안 되지 않아요? 이게 안 되지 않습니까?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가치로, 절대 기준으로 따라가야, 그 말씀의 가치와 기준을 따라가야, 그래야 우리는 그게 승산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거. 그 가치를 우리는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도 그래요. 우리가 젊은 아이들 항상 기죽는 이유가 뭡니까? 세상의 기준이 너무 높거든요. 성공의 기준이 너무 높습니다. 그거 보고 나를 보면 한없이 초라합니다. 거기에 나를 맞출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맞춥니까? 항상 우리는 내 부모의 경제력과 나의 실력과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뭐 능력들을 가지고 나를 자꾸 혐오하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근데 하나님의 기준에 나를 한번 보셔야 돼요. 하나님 기준에 내가 주 안에 있느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은 그 3%의 사람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가? 이걸 내가 보고 살아야지요. 언제까지 자꾸 다른 기준을 가지고 거기에 나를 끼워 맞추려고 할 겁니까? 그래서 성공할 수도 없고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는 기준을 보시고 하나님의 기준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거기에서 성공할 수 있고 승산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군대를 세우신 과정입니다.
자, 지도자 세웠습니다. 이제 군인 세웠습니다. 지도자 기드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소심했지요. 능력이 없습니다.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소심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강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하고 싶은 열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집요하게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또 두 번째 자기 주변 정리를 잘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지도자로 세우셨고,
또 그 지도자를 따를 만한 300명의 군대를 세우는데 두려움이 없습니다. 바알에게 무릎도 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군사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이제 기드온과 함께하는 300명의 용사들이 세워졌습니다.
3. 하나님이 주신 무기
자, 그런데 그날 밤이 됩니다. 300명의 용사들이 세워졌습니다. 기드온 마음이 어떨까요? 벅찹니까? "이제 이 사람들과 함께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나는 내일이면 승리할 것이다" 벅차고 기쁘고 막 가슴이 뜁니까? 여러분이 기드온이라면 어떤 마음일까요? 도망가고 싶습니다. 저 같으면 어디 확 죽어 버리고 싶습니다. 그냥 숨고 싶고. 이게 뭡니까? 이게.
3-1. 적진에서의 확신
이런 기드온의 마음을 아실까요? 모를까요? 알지요. 참 좋으신 하나님인 게 하나님은 이런 기드온을 너무 잘 아세요. 너무너무 잘 아셔서 그날 밤에 기드온에게 찾아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9절 "그 밤에" 그 밤이 언제예요? 두려움이 산을 이루고 두려움이 집을 짓고 뜬눈으로 지새는 그 밤에. 여러분, 우리 중에 다 소심한 사람 다 있지요. 소심한데 아 답이 없어요. 그러면 두 다리 뻗고 잠이 자지니까? 잠을 못 자요. 근데 그 밤에 하나님이 그거 다 아시고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는 기드온에게 찾아오셨어요.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괜히 자는 척하지 말고 일어나라 그 말이에요. "진영으로 내려가라" 어느 진영요? 우리 300명의 진영? 그게 아니라 적진으로 내려가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하나님이 벌써 일을 다 끝내셨다는 뜻이지요.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알고 계세요. 혼자 못 가지요. 겁나서.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그래요.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내려가라 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하나님이 가라 할 때는요, 들키지 않게 하실 거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너를 돕는 부하와 함께 한번 가 봐" 그랬습니다.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갑니다" 기드온이 마지못해 가는 거예요. 이거 지금 가라 하니까 안 갈 수도 없고.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자, 우리가 지난 시간에 봤습니다. 미디안 혼자 온 게 아닙니다. 아말렉 같이 왔지요. 동방 사람들 왔지요. 이 사람들 군대가 다 총합이 몇 명입니까? 135,000명이 진 치고 있는 곳입니다.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처럼 많은 수요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미치겠어요? 너무 많아요. 하나님이 이걸 나한테 보라고 보이셨나? 안 그래도 지금 쫄아 있는데 더 겁 주시려고 보내셨나? 아니에요.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그게 듣게 하시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병사들의 대화 소리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이 보리떡 한 덩이가 누굽니까? 기드온이에요.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친구가 이제 꿈 해몽을 하는 거지요.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
와! 이런 이야기를 듣게 하신 거예요. 여러분, 이게 하나님이 이 병사들의 입을 통해서 기드온에게 이걸 듣게 하신 이유는 "용기 내라"고 하시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근데 이 병사들이 서로 간에 주고받는 대화가 자기들이 진짜 뭐 뭐가 있어서 이렇게 한 걸까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그날 그 시각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하게끔 이들의 입술과 생각을 주관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에요.
시편 104편 2절에서 4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잘 보세요.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하나님이 빛을 입으셨다고 그랬어요. 그 빛은 하나님이라는 뜻이지요.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그 물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요. "구름을 자기 수레로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멋지지요. 바람이 하나님의 날개라 그랬어요.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리도 하나님이 보낸 사신이라는 뜻이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이게 하나님 하시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온 피조물의 창조주 아니십니까? 물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바람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불꽃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여기 이 미디안 진영에 있는 군사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그러니 하나님이 이들의 입을 통해서 기드온에게 용기를 주시는 겁니다. 이들의 삶을 통해서, 이들의 지금 해몽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적들의 해몽을 통해서 기드온에게 자신감을 주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십니다.
우리가 순종하면요. 순종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이런 기적 같은 놀라운 일들을 매 순간 경험합니다. 기드온이 얼마나 소심한 사람이에요. 자기 아버지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자기 아버지 요아스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었습니다. 아세라 목상을 깼습니다. 거기에다가 수소까지 끌고 가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버지에게 죽어 마땅한 아들인데 아버지가 보호해 주지 않습니까? 그걸 경험했습니다. 순종하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왜 계산만 하고 있느냐? 왜 자꾸 두려워하고 계산하고 앞으로 전진하고 나가지 않느냐? 왜 너는 너의 방식대로 135,000명 대 32,000명의 숫자만 자꾸 따지고 있느냐? 135,000명 대 300명의 숫자 놀음만 하고 있느냐? 이 말씀이거든요.
하나님은 바람 날개로 자기 사신을 삼으신다 그랬습니다.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신다. 이 얼마나 멋진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라 그랬습니다.
3-2. 보리떡의 의미
여러분이 보리떡 한 덩이라 그랬는데, 유대인들에게 보리는 밀하고 대비되는 작물입니다. 밀이 더 귀할까요? 보리가 더 귀할까요? 밀이 더 비싸게 팔릴까요? 보리가 더 비싸게 팔릴까요? 보리가 흔합니다. 밀이 훨씬 더 비싼 작물이지요. 자,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했다 그랬습니다. 이 집이 좀 먹고 사는 집이라 그랬지 않습니까? 있는 집이라 그랬지요. 그러니 있는 거예요. 밀이. 보리보다 이 집은 밀을 먹고 사는 집인 거예요.
근데 이 기드온을 하나님은 보리떡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보리떡 한 덩이.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너는 말씀을 따라 순종하기만 하라" 그러니까 그 보리떡 같은 한 덩어리가 굴러 들어와서 미디안의 장막을 무너뜨리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다 보리떡 같은 존재 아닙니까? 예수님 시절, 예수님이 광야에서 베데스다 들판에서 오병이어 사건을 행하실 때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예요. 아무것도 없는 보리떡 다섯 개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 얼마나 영양가가 있으면 있고, 보리떡 다섯 개가 얼마나 흔한 음식입니까? 한 아이의 도시락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받아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니까 5천 명이 먹고 남고 12광주리가 남지 않습니까? 여자 노인 어린아이까지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다 먹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보리떡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보리떡이라도 순종하면 역사가 나타나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니까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거지요.
근데 우리는 나의 보리떡 됨을 탓하고 있습니다. "나는 왜 이 모양 이꼴로 보리떡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왜 이렇게 소심하게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는가? 나는 왜 이렇게 돈이 없는가?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가? 나는 왜 이런 지역에서 살고 있는가?" 나의 무능함만 자꾸 탓하니까 인생이 발전이 없지요. 인생이 변화가 없지요.
중요한 건 보리떡이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면 그 보리떡이 135,000명의 대군을 무너뜨린다니까요. 그걸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됩니다. 자꾸 숫자 놀음하려고 하지 말고, 적들과 숫자로 싸워 가지고 이기려고 하면 승산이 처음부터 없습니다. 어떻게 이깁니까? 물질로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야 우리가 세상에서 꿀리지 않고 살겠습니까? 안 됩니다. 처음부터 되는 게임이 아닙니다.
보리떡인데, "봐. 너 꼴은 보리떡이야" 하나님 보여 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너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고 따라오니까 된다"는 걸 하나님이 자꾸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 가서 두 다리 뻗고 자. 염려하지 마라. 푹 자고 일어나서 내일 승리의 노래를 한번 불러보자" 그 말씀이에요.
그래서 우리도 이거 보면 "아 하나님이 정말 연약하고 작고 보잘것없는 보리떡 같은 기드온을 쓰셨구나. 내가 보리떡같이, 내가 더 나은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가 돈 열심히 버는 사람은 이 자리 없겠지요. 지금 이 자리 이 순간 돈 번다고 바빠서 다 나갔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사고칩니다. 정말 놀라운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 보리떡이 어떤 일을 하는지 한번 보십시오.
3-3. 세 가지 무기
자, 보십시오. 15절.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사기 충천했습니다. "이르되 일어나라" 그랬어요. 막 깨우는 거예요. 막 이제 신났어요. 이제 300명한테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300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세 가지 무기입니다. 뭡니까? 횃불, 빈 항아리, 그리고 나팔. 이걸로 뭘 하라는 겁니까? 이걸로. 자,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골리앗이 들고 나온 무기가 있습니다. 골리앗은 장수지 않습니까? 다윗의 입을 통해서 골리앗의 무기 세 가지 삼종 세트를 얘기했습니다. 뭡니까? 첫째, 칼, 창, 단창. 칼과 창과 단창이에요. 이게 세 가지 무기예요. 기본이에요. 기본.
근데 여기 칼이 있습니까? 창이 있습니까? 단창이 있습니까? 활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나팔 있고 빈 항아리 하나 있고 그리고 횃불이 있고. 적들이 보면 웃겨 가지고 배꼽이 빠질 일입니다. 뭘 하자는 거냐? 얘기도 되지 않습니다. 아 이거 애들 말로 쪽 팔려서 이거 들고 어디 갈 수가 없어요. 이게 무슨 무기예요? 이게. 하다못해 부지깽이 하나라도 줘야지. 막대기 하나라도 줘야지. 이게 뭡니까? 이게.
자, 근데 작전이 더 웃겨요. 19절.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100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이게 작전이에요. 나팔은 불고 빈 항아리는 부수고. 근데 항아리 속에 뭐가 있었습니까? 횃불.
20절.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이게 작전이에요. 자, 이 작전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주셨거든요. 기드온이 "아 미치겠네 하나님 이게 뭡니까?" 근데 기드온이 했어요. 그대로 하라고 했어요. 그럼 이 무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 아닙니까?
나팔 - 영적 각성
첫째 나팔. 이 나팔이 의미하는 게 뭘까? 민수기 10장 9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전쟁할 때 나팔을 불라고 하신 거예요. "그리하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나팔은 영적 각성입니다. 영적 각성. 나팔이 하나님의 나팔이에요. 영적 각성. 여러분, 마지막 날 천사장의 호령 소리와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공중에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때 왜 나팔을 붑니까? 그리스도께서 재림주로 오실 때 이 땅에 악한 영의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서 나팔을 부시는 겁니다. 영적 전쟁의 선포입니다.
나팔은 그러면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보라 이후에 40년 동안 영적 각성의 나팔을 불었습니까? 한 번도 분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워 떠는 자들을 전쟁에서 돌려 보내야 될지 말지 그것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각성의 나팔인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 적이 없다고요.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 들어서 나팔을 불라. 영적 각성을 하라. 영적 각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는 거거든요.
전쟁할 때 민수기 말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하는 것 아닙니까? 시내 산에서 출발해서 모압 평지까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동하는데, 이동할 때 적들을 만나면 나팔을 불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200만 대군이 행군하는데 말로 말로 말로 전해서 어떻게 그들을 대열대로 모읍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영적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면 좌우 편대가 어떻게 정렬되고 적들과 어떻게 싸워야 될지를 나팔로 알리는 겁니다. 나팔은 영적 각성의 나팔 소리입니다. 지금까지 나태에 있었던 백성, 지금까지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았던 너희들, "이제는 나팔을 불 테니 제발 이 나팔 말씀 아래 모여 달라" 이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악한 사탄 마귀와 싸우려면 하나님 말씀에 영적 각성의 나팔을 불어야 됩니다. 영적 각성의 나팔 없이 어떻게 악한 사탄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그 첫 번째가 각성의 나팔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 전투할 때 마지막 날 제사장들이 일곱 양각 나팔을 불었습니다. 적들과 전쟁할 때는 나팔 부는 거예요. 그래서 나팔을 불라고 그랬습니다.
빈 항아리 - 자아의 파쇄
두 번째 빈 항아리. 항아리는 어떻게 합니까? 항아리 속에 횃불을 감추라 그랬지요. 그리고 항아리를 어떻게 합니까? 깨부수라 그랬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항아리를 깨면 뭐가 나타납니까? 횃불, 빛이 나타납니다. 빛이 누굽니까? 빛은 그리스도예요. 빛은 하나님이고 빛은 곧 말씀이고 빛은 그리스도인데, 항아리는 뭡니까? 우리가 다 질그릇 아닙니까?
내가 질그릇으로 지음받은 존재. 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흙으로 빚어진 육체입니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 인간이라는 존재는 질그릇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말씀, 이사야 64장 8절이 두 말씀을 같이 한번 보십시오.
바울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보배는 그리스도, 질그릇은 나. 질그릇 같은 나 자신 속에 보배 되신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뜻이고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이사야 말씀입니다.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우리는 진흙이라 그랬지 않습니까?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이게 우리 정체성이에요. 우리 인간이. 우리는 강철로 지음받은 몸이 아니지 않습니까? 질그릇입니다. 질그릇데 착각하고 삽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질그릇에다가 온갖 것들로 다 치장합니다. 안티에이징이라고 막 뭐 바르고 막.
질그릇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벗겨지고 깨지고 금 가게 되어 있어요. 헛된 거짓말을 믿고, 무슨 안티에 말도 안 되는. 자연스럽게 늙고 병들고 아프고 죽는 거지. 근데 질그릇 속에 뭐가 있습니까? 보배가 계시지 않습니까? 보배 되신 예수님을 모시면 그게 질그릇의 기쁨인 거예요.
이제 막 금 가고 부서져 가는 질그릇,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천 년 만 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광과 기쁨은 질그릇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거지요. 근데 그리스도가 완벽하게 드러나려면 질그릇이 어떻게 돼야 된다? 박살 나야 됩니다. 질그릇이 그 말씀이에요. "너희의 자아가 산산이 부서져야 빛 되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것이다"
우리가 맨날 영적 전쟁에서 지는 이유가 뭡니까? 내 자아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내 자아가 나의 발목을 붙잡기 때문에, 내 욕심이 깨어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왜 깨어지면 부끄러우니까, 남들에게 모양 빠지니까 자꾸 강한 척하고, 질그릇은 아닌데 강철인 척하고.
바울이 그랬지 않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랬습니다. 그게 맞는 말이에요. 자기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나타나지요. 영적 생활, 신앙생활이라는 건 자아와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건 반비례 관계입니다. 자아가 죽어지고 자아가 무너지는 만큼 그리스도는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손해 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매 맞으니까 그로 인하여 우리가 평화를 얻고 우리가 나음을 얻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걸 잘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고난이 결국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드러냈지 않습니까?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됩니까? 교회 목회자와 중직들과 우리가 먼저 앞선 사람들이 내가 빈 그릇이 되어서 빈 항아리가 되어서 박살 나야 됩니다. 모든 분야에서. 근데 지금 이 나라가 왜 이꼴이 되었느냐? 지금 여기가 왜 미디안에게 압제당하고 있느냐? 아무도 자기 질그릇 신앙과 정체성을 가진 인간들이 없으니까. 다 깨어져야 빛 되신 그리스도가 나타날 터인데 그러지 않으니까 "너희들이 지금 이 모양 이꼴로 살고 있다" 이 말씀인 거지요.
우리도 마찬가지. 나는 어느 영역에서 부서지고 무너져야 될 것인가? 이걸 이제 고민해야 되는 거예요. 영적 전쟁에서.
횃불 - 생명의 빛
자, 그다음 횃불입니다. 횃불 빛이지 않아요. 요한복음 8장 12절과 12장 46절 요한복음 말씀 보시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이 빛이라 그랬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내가 가리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내가. 오늘 이 땅의 교회가 다 빈 항아리가 되어서 깨어지고 박살 나면 그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타날 겁니다. 그렇지요? 교회가 철옹성 같이 세상의 가치를 따라서 계속 살고 있으니까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무기입니다.
나팔은 불고 영적 각성을 외치고, 빈 항아리 너희는 죽고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그럼 그게 뭡니까?
3-4.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
20절 다시 보세요.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근데 여러분 여기 이상한 거 있지 않으세요? 두 가지가 이상해야 됩니다. 첫째, 칼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칼이 어디 있어요? 없지 않아요. 뭐 항아리 속에 단칼이라도 좀 숨겨 왔으면, 단창이라도 좀 숨겨 왔으면, 칼이 말이 되는데 칼이 없지 않아요, 지금. 근데 왜 칼이라고 얘기하는 겁니까?
성경은 신구약을 다 같이 보셔야 돼요. 우리가 지겹게 읽었던 말씀 일부러 적어 놓지도 않았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서 17절 뭡니까? 하나님의 전신갑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그랬는데, 전신갑주 첫 번째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그다음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요" 다섯 가지가 다 호신용 무기예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공격용 무기가 있는데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그랬어요. 그게 칼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는 것.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그러면 여기 "여호와의 칼"이라고 하는 건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이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이 기드온에게 임했습니다. "야, 무기 줄 텐데 이거 준비해. 나팔, 빈 항아리 그리고 그 안에 횃불, 이게 무기야" 하나님 말씀이에요. 그 말씀이 검처럼 기드온에게 주어졌어요. 근데 그 말씀을 기드온이 안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이게 무슨 칼입니까? 이게 무슨 하나님 무기입니까? 이거 가지고 전쟁 못 합니다. 하나님 날선 검을 주십시오. 잘 드는 칼을 주십시오. 명중률이 높은 활을 주십시오. 던지면 백발백중 되는 창을 주십시오" 그랬다면 성령의 검을 못 받는 거예요.
그랬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검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와의 칼인데 그걸 못 받는 거예요. 근데 기드온은 그걸 받았습니다. 그 말씀을 받은 거예요. 그 말씀을 받는 순간 그 말씀이 기드온에게 넘어오는 순간 그게 검이 된 거예요. 그게 칼이 된 거라고요.
여러분, 우리는 이 비밀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 질문. 왜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라고 했는가? 왜 "여호와의 칼"이라고만 하지 않고 "기드온의 칼"이라고만 하지 않았는가? 이건 동역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호와가 준비한 칼을 기드온이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항상 검을 준비해서 주십니다. "너 이거 준비돼 있잖아" 항상 우리에게 "세상 가서 지지 말라고" 하나님이 얼마나 승부욕에 강한 분인데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신데, 하나님은 정말 승부욕에 강하십니다. 자기 자식이 사탄과의 전쟁터에서 맨날 얻어지고 쥐어 터지고 맨날 패잔병처럼 오는 그 꼴 보기 싫어하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래서 하나님은 "제발 좀 이번에는 이기고 와라. 제발 이번에는 너희가 승리하면 좋겠다" 말씀 주시거든요. "이거 가지고 가라"고. 근데 우리가 볼 때는 택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이거 가지고 와서 어떻게 이기냐고. 못 합니다. 돈 주세요. 못 합니다. 실력 주세요" 그러고 낙아빠져 있으니까.
여호와의 칼은 준비돼 있는데 그 칼을 기드온의 칼로 우리가 못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맨날 지는 거지. 한번 해 보시라고요. 한번. 여호와의 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살아야 정말 그 칼이 진짜 칼이 됩니다. 이건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겁니다. 진짜 믿음 있는 사람 눈에만. 아무리 얘기해도 아무리 말해도 그거 못 잡는 사람은 평생 여호와의 칼 만져보지도 못합니다. 이게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교회를 평생 다녔는데 설교 매일 들었는데 죽자고 봉사하고 죽자고 일했는데 뼈 빠지게 일하고 내 재산 다 바쳐서 헌금했는데, 여호와의 칼 한번 만져 보지 못하고 세상 떠나면 이게 얼마나 억울합니까? 여러분 말씀대로 사는 게 그게 여호와의 칼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강력한 무기를 주신 겁니다. 이들에게 이 300명의 군사들에게.
여호와의 칼이 주어졌으니까, 여호와의 칼이 기드온의 칼이 되는 순간 그게 승리하는 거지요. 다른 게 승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승리가 갈급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기고 싶습니다. 맨날 지고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칼을 가져야 됩니다. 말씀 읽고 어리석어 보이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해 보세요. 제발 기도하라 하면 기도해 보고, 감사하라 하면 감사해 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라고 하면 살아보고.
가장 미련한 곳에 거기에 길이 있습니다. 그게 여호와의 칼입니다. 그 칼을 가지고 한번 휘둘러 보십시오. 그럼 이깁니다. 왜 지겠어요?
4. 승리의 결과
자, 보세요. 21절.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300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자기들끼리 이제 자중지란이 일어난 거지요.
여호와의 칼, 기드온의 칼을 가지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자, 그런데 꼭 전쟁하다 보면 이 기회주의자들이 있거든요. 기회주의자들. 어, 두려워서 도망간 사람들 있지요. 22,000명의 사람들. 또 무릎 꿇고 물 마시다가 쫓겨난 9,700명의 사람들 있지요. 그 외에도 이 전쟁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데 300명으로 미디안을 쫓아내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와서 어떻게 해요? 숟가락 얹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표 주자가 에브라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7장 말미와 8장에 같이 이렇게 얹혀 있기 때문에 꼭 이런 사람들이 양다리 걸치는 것처럼 7장 끝과 8장 초에 이렇게 양다리를 걸쳐서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는데요, 얘기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맺음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소심하고 연약한 기드온을 하나님은 지도자로 세우시고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우리도 소심하고 연약하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못할 일이 없음을 믿습니다.
우리도 보리떡 덩이 같은 미련하고 연약한 존재이나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 모든 일을 행할 수 있음을 믿사오니, 주여 보리떡 같은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절대 기준으로 하나님의 군사들을 택하셨습니다. 두려워 떠는 자들 가라 하시고, 우상에게 무릎 꿇은 자들, 군사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 자들 다 가라 하시고 300명만 두셨습니다.
주여, 우리도 하나님의 군사, 정병에 합당한 인생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주시는 칼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우리가 말씀 그대로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의심하지 않고 받게 하여 주셔서 여호와의 칼이 기드온의 칼이 된 것처럼 여호와의 칼이 오늘 우리의 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