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특강 9 - 아비멜렉의 폭정과 요담의 우화 (사사기 9장)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사사기 9장입니다. 사사기 9장 14절과 1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우리 한 목소리로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사사기 9:14-15)
아멘.
1. 기드온 이야기의 결말
우리는 기드온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서 살펴보았습니다. 기드온 이야기를 보시니까 어떤 마음이십니까? 복습도 아마 하셨을 텐데, 인생의 희로애락이 그 속에 다 있고, 또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고 좌절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아쉽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기드온의 타락입니다. 아, 그냥 그대로 잘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그가 결국 마지막에 타락하고 말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 안타깝고 더 고통스럽습니다.
또 고통스러운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의 내면에도 기드온 같은 마음이 다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기드온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소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큰 용사라고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무리 작고 연약하고 소심한 사람이라도 정말 큰 용사로 쓰임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 앞에 계속 질문합니다. 그러나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고 싶어서 질문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질문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계속 받아 주시고 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드온이 세워졌는데, 하나님은 또 그와 함께 300용사도 세우십니다.
300용사를 세운 과정도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되었고, 특별히 그들에게 준 무기가 있습니다. 세 가지가 있었습니까? 무엇이었습니까? 첫 번째 나팔, 나팔은 불고 빈 항아리는 깨뜨리고, 깨뜨리면 그 속에 횃불이 나오고, 그 세 가지 무기를 가지고 미디안과 연합군들을 무찔렀습니다.
잔당들이 남았습니다. 거대한 싸움에 큰 승리를 거두고 잔당들을 향해서 추격해 나갑니다. 그런데 그 잔당들을 추격하고 토벌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숙곳 사람과 브누엘 사람들을 기드온이 우리가 알던 기드온이 아닌 것처럼 그들을 괴롭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 사람 속에 내재되어 있는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우리가 중요한 통찰을 얻었습니다. 그 외부적으로 보이는, 겉으로 보이는 대단한 성공이 있다 하더라도 그 성공한 사람의 내면이 이와 동시에 함께 성장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통찰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껍데기의 성공만 봅니다. 저 사람이 참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으니까 저 사람의 영성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하나님께서 잘 아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외적인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고 믿음의 연륜이 쌓여가면 쌓여갈수록 내면 관리를 더 잘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고 혹시 내 속에 찌꺼기들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야 됩니다.
기드온에게 있었던 찌꺼기가 무엇입니까? 그 본질이 왕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은퇴할 때 나타나지 않습니까? 금을 요구합니다. 엄청난 규모의 금이었습니다. 그것을 다 받아다가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 고향 오브라에 두었는데, 사람들이 와서 마치 성지순례하듯이 음란하게 위했더라 그랬습니다. 아, 그것은 우상숭배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마치 우상숭배처럼.
그런데 무려 그 세월이 40년 동안 이어집니다. 그 40년의 세월 동안 기드온은 그것을 즐겼습니다. 아주 행복하고 즐겼습니다. 실제로 그가 40년 동안 왕처럼 행세하고 살았는데, 아들을 70명이나 두었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부인이 엄청나게 많았겠지요. 게다가 첩도 있었습니다. 그 첩이 있었던 곳이 세겜입니다.
2. 아비멜렉의 등장
2-1. 세겜과 아비멜렉
이 세겜이 대단히 중요하고, 그 첩이 낳았던 아들의 이름이 아비멜렉입니다. 아비멜렉이 주는 상징이 있지요. 그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
오늘 본문 9장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아, 그런데 기드온이 첩을 굉장히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아무리 본처가 많아도 첩이 하나밖에 없어도 사랑할 만하니까 첩을 두겠지요. 그런데 그 첩이 낳은 아들입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지었던 것은 아버지, "나는 왜 내 아버지의 다른 형들과는 다릅니까?"라고 계속 물었겠지요. 마치 홍길동전처럼. 그런데 그 아버지는 첩이 낳은 그 아들을 매우 사랑했고, "야, 너는 걱정하지 마라. 네가 비록 첩의 자식이지만 네 아버지가 왕이니까 넌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원래 뿌린 대로 거두는 것 아닙니까? 뿌린 대로 그것을 뿌렸습니다. "내 아버지 기드온이 네 아버지가 왕이야. 너 걱정하지 마." 그것을 계속 뿌렸습니다. 그런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계속 심어 줍니다. 결국 때가 되니까 그 뿌린 것이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대형 사고입니다.
1절을 한번 보십시오. 여룹바알의 아들, 우리가 이제 사사기 9장까지 왔는데 9장 1절을 읽는데 여룹바알이라고 하니까 '누구야 도대체?' 아, 이러면 매우 곤란합니다. 여룹바알이 누구입니까? 기드온입니다. 기드온.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사기 9:1)
첩의 아들이지요. 세겜에 가서, 이 세겜이 어디입니까? 자기 어머니의 고향입니다. 이 첩의 고향. 자기가 자랐던 곳입니다.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사사기 9:1)
어머니의 형제가 누구입니까? 외가 친척이라는 뜻입니다. 외가 친척, 외가 삼촌들에게 갑니다.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사기 9:1)
외가 집안 식구들을 다 모았습니다.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사사기 9:2)
세겜 사람들을 부추켜 달라는 것이지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사사기 9:2)
여룹바알의 아들 70명, 기드온의 아들 70명 아닙니까?
여러분, 지금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을 좀 풀어 주면 이렇습니다. "야, 기드온의 아들, 본처들이 낳은 아들이 70명이 있는데 이 70명이 돌아가면서 너희를 다스릴 수도 있다. 돌아가면서 너희를 쥐어짜고 너희를 들쑤시고 계속 다스린다고 왕 노릇 할 수도 있고, 그런데 내가 너희를 다스리는 것과 그 70명이 계속 돌아가면서 너희를 괴롭히는 것 중에 어떤 게 더 나냐?"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나는 너희와 한 골육이다. 나는 이 집안 사람이고 이 동네 출신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2-2. 다스림의 전제
여러분, 이 말의 전제가 있습니다. 이 말의 전제가 무엇입니까?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내가 너희를 다스림" (사사기 9:2)
공통된 단어가 나오잖아요. 다스림. 이 다스림이라는 단어의 동사가 마샬(מָשַׁל)이라는 동사인데, 이 마샬이라는 말은 '통치하다'라는 뜻입니다. 대단히 정치적인 행위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70명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것과 내가 왕이 되어 다스리는 것, 통치 행위를 하는 것 중에 어떤 게 더 낫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전제는 무조건 너희를 누군가가 다스릴 것이다라는 전제가 여기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질문할 때 그런 것이지요. 야, 이런 질문이에요. "야, 동네 깡패에게 돈 뺏기는 게 나냐, 그래도 나한테 돈 뺏기는 게 나냐? 난 그래도 너 좀 아니까 너 형편을 아니까 너 형편 봐서 천 원만 뺏을 텐데, 동네 저 깡패들이 와서 너희들한테 뺏으면 너 주머니에 있는 거 다 털어 줘야 돼. 어떤 게 더 좋아?" 그러면 그 전제가 무엇입니까? 우선 무조건 돈은 뺏긴다는 전제가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돈 뺏기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떻게 말해야 됩니까? "내가 왜 뺏겨? 내가 왜 뺏겨? 왜 그게 전제가 되어야 하는가?"를 물어봐야 됩니다. 그게 반론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어리석고 무지하고 목매해서 그 질문을 들었던 세겜 사람들이 이 집안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하지요.
3절을 보십시오.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가서 막 동네방네 얘기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의 형제라 하고" (사사기 9:3)
즉, 세겜에서 정치적으로 아비멜렉을 추대했다는 뜻입니다. 그 지역의 국회의원으로, 그 지역의 대표자로 아비멜렉을 밀어 줬다는 뜻입니다.
3. 세겜의 영적 상태
3-1. 세겜의 역사적 의미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될 것이 세겜이라는 위치의 상징성입니다. 세겜, 많이 들어 보셨지요? 자, 세겜에 대해서는 우리가 창세기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창세기에서 야곱 일행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왔다가 세겜에서 디나 사건이 있었고, 거기에서 한바탕 야단법석이 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먼 옛날 얘기고, 지금 이 사사기 당시에 그보다 더 가까운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시절에 여호수아 24장 1절과 14절을 한번 보시면 이런 일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때 여호수아는 세상 떠나기 직전입니다. 여호수아 24장이 마지막 장이니까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섰습니다." (여호수아 24:1)
무엇이라고 얘기합니까?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수아 24:14)
여기 이 여호수아의 간청에 백성들이 응답하잖아요. 그렇게 하겠다고. 세겜에서 언약이 갱신되었습니다. 세겜에서 이스라엘 12지파가 모여 가지고 "이제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 받들고 살겠습니다."라고 결단했던 자리가 세겜입니다. 그런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세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세겜에 누구의 무덤이 있는가? 여호수아 24장 32절을 보십시오.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여호수아 24:32)
요셉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세겜이. 그러면 세겜 사람들은 적어도 그런 정체성과 자랑스러움이 그 속에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이 지역이 어떤 곳인데?
모세와 여호수아로 이어지는 우리 믿음의 족장들,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이 그곳에서 언약을 갱신했고, 우리 조상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겠다고 결단한 그곳에서, 우리 모든 백성들을 이집트로 이끌고 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되어서 그곳에서 모든 사람들의 가난과 기근을 해결했던 요셉의 뼈가 묻혀 있는 그곳에 살던 사람들.
3-2. 신앙 교육의 부재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은 있어야 하지요. 아비멜렉이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우리를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여룹바알의 70명의 아들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사람은 우리를 다스릴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다. 너의 이름이 '내 아버지는 왕이다'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지, 너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혼을 내어서 내쫓아야 하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만큼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 이후에 사사 시대가 시작되고, 지금 여기 기드온 이후의 시절까지 오는 동안, 우리가 지금까지 8장까지 오는 동안 계속 살펴본 그 결과, 신앙 교육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못 배워서 그런 것입니다. 못 배워서, 가르치지 않아서.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믿음의 가문을 자랑합니다. 우리 가문을 "나는 5대째 신앙인입니다.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선교사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교회를 세웠고 헌금을 얼마를 했고" 등등을 막 자랑합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지금 나는 어느 정도의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분별하고 살고 있는가?
우리가 다니고 있는 교회를 자랑스러워합니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고, 우리 교회에서 순교자가 몇 분이 나셨고, 우리 교회는 과거에 일제 시대 때 헌신했던 순국 선열들이 있는 곳이고 등등을 막 자랑합니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고.
그런데 나는 지금? 우리는 지금?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신앙의 얼과 유산을 본받아서 그렇게 살고 있는가?
세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세겜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과 정체성과 자랑스러움은 있을지 몰라도, 이 분들이 행동하는, 판단하는 모양들을 보십시오.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교회 자랑할 것 없고, 내 집안 자랑할 것 없고,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상태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내가,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으로 서 있는가? 어떤 도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한번 걸러서 참과 거짓을 말씀 앞에서 분별할 수 있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이 세겜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 어리석고 무지 목매한 인간들. 신앙 교육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 세대가 많은 업적을 남기는 것 중요하지만, 우리 믿음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분별하고 그들 스스로 신앙인으로 설 수 있도록 훈련하고 가르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분들의 실패 사례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됩니다.
4. 섬김의 정신
4-1. 잘못된 야망
자, 이 아비멜렉의 욕망을 보십시오. 자기가 이제 어느 정도 성장하니까 왕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이것을 가르치지 않은 것입니다. "진짜 높은 자리에 서고 싶은가? 그러면 섬기는 자가 되어라." 이것을 가르쳐야 되는데, 기드온은 그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볼까요? 마가복음 10장 43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가복음 10:43)
섬기는 자가 되라 그랬습니다. 섬기는 자라는 말,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라는 헬라어를 씁니다. 디아코노스. 디아코노스는 시중드는 사람, 종이라는 뜻입니다. 시중 드는 사람, 종. 종입니다. 그냥 시중드는 몸종 아시지요? 옛날 드라마 사극 보면 아씨의 몸종, 또 어르신의 몸종, 늘 쫓아다니는 몸종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기에게 적용할 때. 골로새서 1장 23절 말씀을 보시면 바울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잘 보세요.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디아코노스가 되었노라" (골로새서 1:23)
일꾼이 되었노라. 이 일꾼이 종이라는 뜻입니다. 섬기는 자. 바울은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일꾼이 되었다. 일꾼은 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섬기는 자, 디아코노스가 되었다. 예수님처럼.
45절을 보니까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마가복음 10:45)
섬기려 하다라는 말이 나오지요. 디아코노스의 동사 형태 디아코네오(διακονέω)라는 말입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저 예수님이 섬겼다는 말은요, 그것이 두 가지 방향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니까요, 그것이 디아코네오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디아코네오의 정신입니다. 섬김의 정신.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내 주변의 이웃과 사람들을 종처럼 섬긴다는 뜻입니다.
4-2. 기독교 신앙 교육의 핵심
그런데 지금 아비멜렉은 그렇게 교육받지 못했거든요. "네 아버지가 왕이야. 너 왕이 되어야 돼." 그렇게 교육받았거든요. 그러니까 다스린다는 말부터 나오지 않습니까?
기독교 신앙 교육에 가장 기초적인 것은 섬김의 훈련입니다. 예수님처럼 섬기고 세우고 돌보게 하고, 사람을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고 가정을 세우고 연약한 자들 일으켜 세우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 기독교 신앙 교육의 일차적인 방향성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을 안 한 것입니다.
5. 아비멜렉의 폭정
5-1. 바알브릿 신전의 은
자, 이제 본격적으로 아비멜렉이 사고를 치는데, 페이지 넘기시고 4절을 보시면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그랬습니다.
자,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요, 자세히 보셔야 되는 것이 우선 주어를 찾을 수 있어야 되고, 동사를 찾을 수 있어야 되고, 목적어도 찾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그냥 읽다 보면 주어 동사 목적어를 찾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글 성경을 읽어도 지금 이 4절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70개를 주었다는 말입니까? 누가요? 누가 주었습니까? 앞에 1절, 2절, 3절을 미루어 보면 그의 외가 사람들이 준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이, 외가 사람들이 세겜 사람들을 부추겨 가지고 그 사람들이 지금 아비멜렉을 추대했잖아요. 아비멜렉에게 정치 자금을 준 것입니다.
그것을 어디에서 꺼내 주었습니까? 바알브릿 신전에서 꺼내 주었습니다. 와이, 바알브릿이라는 말이 중요한데, 바알은 아시잖아요. 바알 신, 우상. 브릿이라는 말은 베리트(בְּרִית)라는 말의 명사 형태로 변형된 것입니다. 베리트는 언약,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알브릿이라는 말은 '언약의 바알'이라는 뜻입니다. 약속의 바알. 지금 이것이 대단히 심각한 것이, 세겜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장소 아닙니까? 세겜이 하나님과 약속한 장소예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12지파 장로들과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곳에서 언약을 맺었던 장소. 그 장소가 바로 세겜입니다.
그런데 그 세겜에 바알브릿이 있었습니다. 언약의 바알 신전이 있었다고요. 그곳에서 은 70개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 이미 세겜이 타락했다. 두 번째, 여기 이 외가 친척 사람들이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권력은 누구와 결탁되어 있다? 우상 숭배자들과 결탁되어 있다. 이해되시지요? 이제 그 정도의 추론을 가지고 갑니다.
무엇을 하려고 그랬을까요? 은 70개 가지고.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요즘으로 말하면 조폭 조직을 하나 산 것입니다. 그냥 조직 폭력배 조직을 산 것입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하는, 살인이라도 하는.
5-2. 70명 형제의 살해
5절.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사사기 9:5)
우와. 여러분, 이 한 바위 위에서 죽였다는 말을 좀 생각하셔야 되는데, 70명을 다 모아 가지고 한 바위 위에 놓고 거기서 목을 쳤다는 말이 아니고요, 바위를 하나 딱 정해 놓고 70명을 체포해 와서 한 사람 한 사람 거기서 죽였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알에게 올려 드리는 예배 행위, 제사 행위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비멜렉은 전형적인 바알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세겜 사람이잖아요. 세겜, 자기 외가 집이 바알브릿과 결탁되어 있는 세도가 집안이었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아비멜렉은 한 바위에서 70명을 바알에게 올려 드리는 산 제사로, 산 예배로, 그들의 예배 행위로 70명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명을 못 죽였습니다. 누구입니까?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사사기 9:5)
5-3. 요담의 생존
여러분, 이 요담이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요담이 숨었던 이유, 요담이 도망갈 수 있었던 까닭을 뭐 여러 가지로 사람들이 얘기하는데, 그것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담이라는 이름의 뜻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는데, 요담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자, 기드온이 자기 아들 70명을 제대로 교육했겠습니까? 신앙 교육을 안 했지요. 40년 동안 즐기고 살았습니다. 자기 고향 오브라에 금 에봇 만들어 놓고 그것 경배하러 오는 사람들, 그것 마음으로 "내가 왕이다"라고 생각하고 왕 노릇하고 즐겼습니다.
세겜에 가서 자기 첩하고 함께 행복한 시간 보내고, 거기서 아들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육체가 주는 타락과 탐욕과 정욕의 노예가 되어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러니 70명의 아들들 신앙 교육 했겠습니까? 안 하고 못한 것이지요.
그런데 막내 요담은 달랐어요. 희한하지요. 그것은 기드온이 신앙 교육 한 것이 아니라 요담이 나중에 설교하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이 타락하고 세상이 다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 지금도 여전히 우리 집안 같은, 쑥대밭 같은 집안에서 그래도 믿음의 사람들이 한 둘씩 나오는 것. 그것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가 잘해서 그런 것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지요.
그 누가 잘해서 그런 것입니까? 지금 여기 요담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여호와는 완전하시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것을 과연 기드온이 지었을까? 아들 70명 낳았는데 막내 아들이에요. 누가 지었을까요? 아마 나중에 스스로 요담이 성장하면서 자기 신앙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자기 이름을 부른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 요담이라는 사람이 살아남았습니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큰일을 하잖아요. 그렇지요?
6. 요담의 우화
6-1. 왕의 추대
6절.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사사기 9:6)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습니까? 없지요. 세겜 사람과 밀로 사람이 와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했어요. 하나님의 개입이 없습니다. 사람이 왕 삼은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 봐야 될 것이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라는 것을 주의해 봐야 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이 성경을 계속 읽다 보면 '아, 이것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사사기 6장 11절을 한번 보십시오. 자, 잘 보세요.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어디?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사사기 6:11)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가서 첫 만남 했던 자리가 상수리나무예요. 그렇지요?
그러면 이것은 아비멜렉의 의도성이 다분히 있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가 실제로 왕으로 등극한 것은 아니지만 말년 40년을 왕처럼, 왕 노릇하고 살았는데, 그 첫 출발점, 왕으로서 출발점이 상수리나무였다'는 것. 그것을 이 인간이 기억하고, 그것을 이 인간이 아버지의 무용담을 통해서 전해 듣고 또 전해 들어서, 자기도 상수리나무 곁에서 왕으로서의 출정식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면 그 아버지 기드온이 아비멜렉을 어떻게 교육했을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자기 무용담을 계속 해준 것입니다. "야, 내가 옛날에 말이야. 사실은 네 아버지가 지금 내가 이렇게 있지만 사실 나는 왕, 왕처럼 살지 않니? 내가 처음에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던 그 자리가 상수리나무라고." 아이의 머리에 인이 박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상수리나무 곁에서 시작하지요.
여러분, 이것 보면 사탄은 정말 따라 하기를 좋아합니다. 똑같이 흉내냅니다. 사탄이 똑같이 흉내냅니다. 형식은 똑같이 합니다. 본질과 핵심과 내용이 달라서 그렇지. 그래서 우리는 사탄에게 속지 않으려면 껍데기만 보면 안 됩니다. 본질과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지요.
상수리나무는 똑같아요. 오브라의 상수리나무, 세겜의 상수리나무, 똑같아요. 그런데 본질이 다르잖아요.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왔고, 여기는 여호와의 사자가 없잖아요. 하나님이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북한 얘기 들으면서 탈북하신 분들 간증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자꾸 듣다 보면 공통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김일성은 나쁘다, 김정일은 나쁘다, 김정은 더 나쁜 놈이다. 뭐 이것이 공통점이고, 또 한 가지 그들의 주체 사상. 그 주체 사상은 종교라고 얘기합니다. 종교.
그런데 우리 기독교 신앙과 똑같아요. 똑같아요. 주체 사상이 하나님 자리에 '삼부자'가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그것만 바꾼 것이지. 내용이 똑같아요. 형식이 똑같습니다. 그들도 삼부자 찬양하잖아요. 다 하잖아요. 전부 다 학습하잖아요. 우리가 성경 공부하듯이. 우리 성경 공부하는 것은 비교도 안 됩니다. 유도 안 됩니다. 얼마나 열심히 외우고 학습하는지 모릅니다.
그 자리에 김정일이 들어가 있고 김일성이 들어가 있고 김정은이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이단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이 똑같습니다. 본질과 내용이 하나님 자리에 이만희가 앉아 있고, 하나님 자리에 문선명이 앉아 있고, 한학자가 앉아 있고, 그래서 그렇지.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본질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 본질과 핵심, 그 내용, 그것 모르면 그것을 우리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심각한 오류와 문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단 연구하는 분들이 늘 똑같이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이단이 하도 이제 문제가 되니까 우리 교인들이 이단을 열심히 공부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통일교 같은 것이나 신천지 같은 것이나. 그런데 그럴 필요 없다 그래요. 제가 생각해도 그래요.
이단, 그것 계속 공부해 봐야 내가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공부하다가 거기에 미혹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것을 제대로 알면 됩니다. 우리의 본질.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성령이 누구신지, 교회는 어떤 곳인지, 그것을 제대로 공부하면 본질이 바뀌면 다른 것을 압니다.
지금 이런 식으로 사탄이 수작을 부립니다.
6-2. 요담의 설교
자, 그다음 이제 이렇게 되니까 도망간 요담이 세겜 사람들이 다 듣는 산에 올라가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합니다. 보세요.
7절.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사사기 9:7)
이제 설교를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재미없는 설교가 아닙니다. 딱 시작하면 바로 눈 감고 졸리는 것이 아니에요. 아주 간단하지만 아주 재미있는 나무 이야기 우화입니다. 네 그루의 나무가 나옵니다.
8절.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사사기 9:8)
나무 중에 최고의 왕이 감람나무 아니냐? 네가 왕이 좀 되어 달라니까 감람나무가 무엇이라고 해요?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사사기 9:9)
감람나무, 올리브나무입니다. 감람나무, 왕 제사장 선지자 기름 부을 때 사용하는 그 기름을 짜는 나무입니다. 이렇게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무화과나무.
11절.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사사기 9:11)
역시 무화과나무도 거절합니다.
포도나무.
13절.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사사기 9:13)
포도나무와 감람나무가 얘기한 것 보면 공통점이 있지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이라는 말이 공통점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무화과나무, 감람나무, 포도나무를 보면 일반적인 성도의 왕업이 어떠해야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 누가 왕이냐? 어떤 사람이 왕이냐? 베드로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 그랬습니다. 이 말은 왕이요, 제사장, 두 가지 직무를 다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내가 맡은 현장에서, 감람나무는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자기 일을 열심히 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사람을 영화롭게 하면 그것이 왕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왕이라는 뜻입니다. 왕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왕이 아니라.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리에 올라가서 우쭐거려야 그것이 왕이 아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나안 땅 허락하시고 그 땅에 인도하여 들이셨을 때 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왕 필요 없다" 그랬습니다. "너희들은 다 흩어져서 이렇게 자기를 성실하게 살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지켜야 될 것만 지켜라.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누구다? 레위인들. 제사와 율법, 신앙 교육, 재판, 그것만 가르치게 하고, 나머지는 왕이 필요 없습니다. 군림하는 왕이 왜 필요합니까? 이것이 왕업인데.
6-3. 가시나무의 오만
그런데 가시나무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15절.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사사기 9:15)
여기 어법이 있지요. 그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시나무는 그늘이 없습니다. 그늘에 피하려고 오는 순간 찔립니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자기 자신을 모릅니다. 자기를 너무 모릅니다. 내가 왕이 되면 사람들을 괴롭게 할 것을 자기만 모릅니다. 다 아는데.
내가 어떤 자리에 오르게 되면 나로 인해서 공동체가 다 피폐해지고 힘들어질 거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나만 모릅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만약 나에게 와서 피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사사기 9:15)
여러분, 이것은 대단히 신성 모독적인 발언입니다. 왜냐하면 떨기나무에서 불꽃이 나왔잖아요. 하나님 임재의 상징.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실 때. 그런데 그 나무는 타지 않았어요. 가시나무에서 불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을 빙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비멜렉은 하나님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요담이 우화로 설교한 것입니다. 두 가지를 얘기하고 싶었지요. 그는 주고 싶어도 줄 수 있는 그늘이 없다. 두 번째, 그는 지금 하나님을 빙자해서 너희를 호도하고 있다.
자, 세겜 사람들에게 설교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이 세겜 사람들이 들을 귀가 있었다면 그것을 듣고 돌이키고 회개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겜 사람들은 설교를 듣고도 돌이키거나 회개하지 않습니다.
6-4. 회개하지 않는 세겜
그리고 나서 16절에서 21절까지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설교인데, 서운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19절을 보시면 이런 얘기를 하지요.
"만일 너희가 오늘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하고 의로운 일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사사기 9:19-20)
이 말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것은 뒤에 가서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
자, 그다음 22절을 보십시오. 이런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돌이킵니까? 돌이키지 않습니까? 돌이키지 않아요.
선지자들 중에 가장 가슴 아픈 선지자가 누구겠습니까? 저는 생각하기를 예레미야라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가 수십 년 동안 말씀을 외쳤는데, 사람들이 돌이키지 않고 나라가 망해 버렸잖아요. 그러면 그 선지자는 실패한 선지자입니까? 성공한 선지자입니까?
부흥도 한번 못 이루었고, 사람들을 회개시키지도 못했고, 나라는 망했고, 그러면 실패한 선지자입니까? 그러면 성공과 실패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예레미야는 실패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전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성공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요담이라는 사람도, 그도 하나님 말씀대로 전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라고 했으니까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돌이키고 돌이키지 않고는 세겜 사람들의 몫입니다. 그들에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습니다.
7. 하나님의 심판
7-1. 3년의 유예 기간
그 기회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에" (사사기 9:22)
22절 말씀이 두 가지 정보를 줍니다. 첫째, 아비멜렉을 '왕'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왜냐하면 스스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서 왕으로 세운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아비멜렉'이라고 딱 표현했습니다.
또 3년 동안 다스렸다 그랬어요. 3년 동안. 그러면 이 3년의 시간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이지요. 또한 아비멜렉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한 방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이 단번에 일어나서 그들을 즉결 처분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노아 홍수 사건, 120년 기다렸다가, 하나님께서 방주 다 만들고 다 됐는데 문 닫기 전에 일주일 또 기다립니다. 여리고성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 일곱 바퀴, 하루에 한 바퀴씩 일주일 돌게 하시고, 마지막에 또 일곱 바퀴 돌게 하시잖아요. 그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바로 무너지게 한 것이 아니고.
계속 하나님은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기회를 주셨고, 여리고성에 기생 라합은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여기 세겜 사람들, 그 설교를 듣고도, 이렇게 탁월하고 아름답고 위대한 설교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자기 몫 신 것이지요.
그것은 계속 선포하는데 못 듣는 것은 자기가 우매한 것입니다. 결국 심판으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나오지요.
7-2. 악한 영의 활동
23절.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사사기 9:23)
그렇지요. 하나님의 심판은 양가적입니다. 아비멜렉도 심판하시고 세겜 사람들도 심판합니다. 왜? 똑같이 그들에게 3년의 기회를 주셨으니까.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사사기 9:23)
여러분, 여기 '악한 영을 보냈다'라는 표현을 좀 보셔야 되는데요. "야, 그러면 하나님이 사탄의 괴수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분이 계실 수 있거든요. 얼마든지 그런 질문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욥기를 보면 천상의 회의의 자리에 사탄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이제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 세상에 악한 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악한 사탄, 마귀들이 막 득실득실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요렇게 묶어 주시니까 사탄이 그 안에서 활동을 못 하는 것이지요. 그 안에 못 들어오는 것입니다. 들어올 수 없고 활동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냥 놔버리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놔 버립니다. 그러면 원래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없었던 그 자리에 악한 영과 사탄 마귀가 활동하는 것처럼, 그들은 제 멋대로 그곳을 해집고 돌아다닙니다. 그런 얘기입니다.
'보내셨다'는 말은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냥 사탄이 멋대로 해라, 너 멋대로 해라, 너의 처분대로 하거라 하고 허락한 것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는 악한 사람들이요, 아비멜렉 악하잖아요 지금. 이것, 악한 사람들이 조폭들 데리고 가서 만든 정권입니다. 이 정권. 이 정권이 3년 간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3년 간 것도 원래 악한 인간들끼리 모이면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다가 다 박살 나잖아요.
다 영화 보면, 영화까지 안 가더라도 우리 주변이 다 그렇잖아요. "저런 것들끼리 모여서 얼마나 오래 가나 보자." 그 말 떨어지자마자 제들끼리 싸우고 야단 나요. 3년 간 것도 잘 간 것입니다. 왜 3년이나 갔을까요?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으니까. 회개하라고.
3년이 지나니까 악한 영이 활동을 합니다.
여러분, 그것 알아야 됩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악한 영이 없을까요? 왜 없겠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인데. 그런데 교회 안에 악한 영이 왜 활동하지 못할까요?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니까.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부족하지만 살려고 매달리고 기도하고 애를 쓰니까 우리 교회 안에 악한 사탄 마귀가 활동하지 못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교회가 분열되고 찢기고 싸우고 난장판되고 엉망진창되는 것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니까 거기가 엉망이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니까. 가정도 보십시오. 공동체 보십시오. 나라와 민족, 다른 곳 다 보십시오.
악한 사탄의 영은 언제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악한 사탄의 영을 방멸하고 묶어 놓고 그들을 결박해 놓으려면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정 지키려면 하루 24시간 잠만 자고 열심히 돈 번다고 우리 가정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쓰지 않는 비열한 방법으로 돈 벌고 출세하고 그런다고 해서 내 가정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가정을 지킬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공동체를 지킬 수 있습니다. 나를 지킬 수 있고.
지금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3년 동안 흘려 버리니까 악한 영을 풀어 버렸습니다.
7-3. 세겜의 배신과 가알의 등장
25절.
"세겜 사람들이 산들의 꼭대기에 사람을 매복시켜 아비멜렉을 엿보게 하고" (사사기 9:25)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이제 감시합니다.
"그 길로 지나는 모든 자를 다 강탈하게 하니 어떤 사람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알리니라" (사사기 9:25)
강탈, 빼앗았다는 얘기지요. 돈을 빼앗았다는 얘기입니다. 물건이나. 그러면 세겜 사람들은 왜 강탈했을까요? 왜 돈을 빼앗았을까요? 먹고 살 길이 없으니까 도적떼들이 되는 것 아닙니까?
왜 그랬을까요? 아비멜렉이 선정을 베풀지 않으니까. 세겜 사람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않으니까.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자, 진작에 이런 일이 일어났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막으셔서 3년간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돌이키지 않으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원래 이렇게 되면 반역자들의 우두머리가 또 나타나잖아요.
26절.
"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의 형제와 더불어 세겜에 이르니 세겜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니라" (사사기 9:26)
사람의 마음은 갈대 같아요. 여자의 마음이 아니라, 그냥 여자라 할 것도 없이 모든 사람의 마음이 다 갈대 같아요. 이 세겜 사람들이 바알브릿, 세겜에 있는 은 70개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어서 그를 추대할 땐 언제고, 또 가알이라는 사람을 신뢰했습니다.
배신한 사람이 또다시 배신하는 형국입니다.
"그들이 밭에 가서 포도를 거두어다가 밟아 짜서 연회를 베풀고 그들의 신당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니" (사사기 9:27)
자, 이것 보면 세겜 사람들은 아직 정신 못 차렸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수탈 당하고 있잖아요. 먹고 살 길이 없어서 도적떼가 되잖아요. 자, 그러면 이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하지요. 그 옛날 3년 전에 요담이 했던 설교를 기억해야 하지요. "가시나무가 우리를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고 돌아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전히 또 사람을 의지합니다. 가알이라는 사람을 의지하고, 그 사람과 함께 신당에 가서 포도주를 먹고 마시고 또다시 우상 숭배하고 앉아 있습니다.
시편 1편 1절과 4절을 한번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 1:1)
이 동사를 잘 보세요. 따르다, 서다, 앉다. 막 따라가요. 그다음에 서요. 그리고 주저앉습니다.
세겜 사람들, 악인을 따라갔잖아요. 아비멜렉 따라갔습니다. 섰습니다. 그것이 주저앉았습니다. 이제 이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4절.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하며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편 1:4)
아닌 것 같으니까 또 다른 데 가서 붙는 것입니다. 이 겨가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악인이 겨와 같다 그랬습니다.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뿌리가. 뿌리가 있으면 하나님께 깊게 뿌리 박힌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은 자가 복 있는 자인데, 악인들은 쫓아서 따라가고 서고 거기에 주저앉고, 그것이 세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십니까? 한번 사람 따라다니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나를 실망시키면 그 사람 아닌 또 대체제를 또 찾습니다. 또 다른 사람. 또 나를 만족시켜 줄 또 다른 사람. 그 사람을 또 찾다가 "이것이 아닌가 보다" 하면 또 다른 사람을 찾고.
그렇게 평생 살다가 이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저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그렇게 살았던 여인이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 아닙니까? 우리라고 다릅니까?
진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 내리는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람에 나는 겨 같이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었다가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그것이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은 악인이라 그랬습니다.
복 있는 사람의 원래 반대 말은 박복한 사람 아닙니까? 복 없는 사람. 그런데 복 있는 사람 반대가 악인이라 그랬습니다. 아비멜렉과 함께하는 악인이지요. 이것이 다른 장르가 악인입니까?
그런데 이제 가알이 사람들의 마음을 확 얻었습니다. 아비멜렉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지요. 이제 이렇게 얘기합니다.
29절.
"아하, 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더라면 내가 아비멜렉을 제거하였으리라 하고 아비멜렉에게 이르되 네 군대를 증강해서 나오라 하니라" (사사기 9:29)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가알과 이제 한판 붙겠지요.
이제 하나님께서 지금 악령을 푸니까, 악한 영을 여기에 보내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내버려 두니까 제들끼리 싸우고 야단이에요.
7-4. 아비멜렉의 잔혹함
그러니 또 아비멜렉에게 붙어서 충성하는 한 방백이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냐?
30절.
"그 성읍의 방백 스불이 에벳의 아들 가알의 말을 듣고 노하여 사자들을 아비멜렉에게 가만히 보내어" (사사기 9:30)
그러면서 "이렇게 이렇게 작전을 펼치면 우리가 가알 일당을 멸절시킬 수 있습니다. 한번 본때를 보입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다음 페이지 39절을 보시면
"가알이 세겜 사람들보다 앞에 서서 나가 아비멜렉과 싸우니라" (사사기 9:39)
가알은 반역자의 우두머리지요.
"아비멜렉이 그를 추격하니 그 앞에서 도망하였고 부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많아 성문 입구까지 이르렀더라 아비멜렉은 아루마에 거주하고 스불은 가알과 그의 형제들을 쫓아내어 세겜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더니" (사사기 9:40-41)
이것을 보면 아비멜렉이 능력은 있었던 것 같아요. 반역자들을 제압했습니다. 여기서 끝나야 돼요. 그렇지요? 여기서 끝나야 됩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끝내겠습니까? 끝내지 않습니다. 이 반역에 동참한 세겜 사람들을 다 색출해서 다 죽여 버립니다.
어떻게 하느냐?
45절.
"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는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사사기 9:45)
와, 무서운 인간이지요.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갔더니" (사사기 9:46)
엘브릿 신전의 보루를 좀 짚으세요. 이제 남아 있는 세겜 사람들이 어디로 숨었습니까? 신전에 숨었습니다. 보루. 보루 아시지요? 보루. 망대, 요새라는 뜻입니다. 튼튼한 숨을 만한 곳.
그런데 이 신전 이름이 무엇입니까? 엘브릿입니다. 아까 우리가 브릿은 이미 보았지요. 바알브릿 할 때. 브릿은 베리트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그랬습니다. 언약,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엘로힘 할 때 그 엘이요, 엘로이. 이스라엘 할 때 그 엘이요.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냐 하면, 이들은 이방의 신전을 '하나님과 언약했던 신전'이라고 만든 것입니다. 엘브릿. 이것도 바알의 신전입니다. 그런데 그 신전 이름을 엘브릿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다. 어디 이방의 신전의 이름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옵니까?
여러분, 이것은 요즘 이단들이 하는 행위와 너무 똑같습니다. 이단들이, 이단 신천지들이 보십시오. 멀쩡한 교회 이름을 붙여 가지고 교단만 살짝 위조하고 그래 가지고 그냥 기성 교회인 줄 알고 사람들이 찾아가요. 가서 신앙생활 한 몇 년 하다 보니까 그것이 이단 신천지예요. 그런 식으로 합니다.
지금 여기 보십시오. 엘브릿 신전이라고 그랬습니다. 엘브릿 신전 보루에. 그런데 이것이 바알브릿 신전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세겜 사람들이 이미 타락했습니다. 그만큼 얻어맞고도, 그만큼 아비멜렉한테 치를 떨도록 혼나고도 아직까지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위기가 닥치니까 숨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돌이켜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에요. 바알의 신전으로 간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살길이 있는 줄 알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지매 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살몬 산에 오르고 아비멜렉이 손에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를 찍어 그것을 들어 올려 자기 어깨에 메고 그와 함께 있는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가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하니" (사사기 9:47-48)
무슨 말이냐 하면, 아비멜렉이 손에 도끼를 들었습니다. 도끼로 나무를 찍었습니다. 찍히니까 나무가 도끼에 딱 찍혀 있잖아요. 그것을 어깨에 멘다는 얘기입니다. "너희도 똑같이 해라" 병사들에게 똑같이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갑니다. 어디로 갑니까?
"모든 백성들도 각각 나뭇가지를 찍어서 아비멜렉을 따라 보루 위에 놓고" (사사기 9:49)
지금 엘브릿 신전 보루, 요새 망대, 거기에 간 것입니다. 나무를. 왜 나무를 찍어서 갔을까요? 불 지르려고.
"보루에 불을 놓으매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으니 남녀가 약 천 명이었더라" (사사기 9:49)
여러분, 이것이 어마어마한 규모라는 말입니다. 그냥 조그만한 공간이 아니에요. 우리 교회 예배당 위아래 다, 성가대까지 다 앉아도 500명 들어가는데요, 이보다 한 두 배 정도 큰 공간입니다. 그것이 엘브릿 신전의 보루, 숨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숨는 곳이 천 명이 들어간다면 진짜 신전의 규모는 얼마나 됐을까요? 보통 한 여섯 배 정도라고 해요. 대여섯 배 정도. 적어도 5천 명 내지 6천 명 이상이 함께 제사할 수 있는 그곳. 거기다가 불을 놓았습니다. 천 명이 다 죽었습니다.
8. 아비멜렉의 죽음
8-1. 데베스 공격
그리고 나서 분이 풀리지 않았던 아비멜렉. 아까 요담이 설교한 대로 그대로 됐지요. 불이 나와서 너희를 다 태울 것이다. 가시가 찔렀잖아요. 그리고 나와서 불이 나와서 다 태우잖아요, 지금.
그다음 아비멜렉이 데베스에 갔습니다. 자기를 반역한 도시는 다 가는 것입니다. 지금.
"데베스에 맞서 진 치고 그것을 점령하였더니 성읍 중에 견고한 망대가 있으므로 그 성읍 백성의 남녀가 모두 그리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간지라" (사사기 9:50-51)
이제 결사 항전하겠지요. 이미 다 들었으니까. 숨었는데, 불 질러 가지고 천 명을 그 안에서 다 질식시켜 버리고 다 죽여 버리니까 얼마나 무서울까요? 사람들이 막 결사 항전합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보통 장수들은 대장들은 선봉에 서지 않잖아요. 뒤에 있잖아요. 뒤에, 뒤에서 전체를 살핍니다.
그런데 지금 이성을 잃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성문 바로 앞에까지 갔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8-2. 여인의 맷돌
또 불 사르려고 했습니다.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사사기 9:53)
이렇게 죽었습니다. 허무하게.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사사기 9:54)
진짜 부끄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여자의 손에 죽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모른다, 부인하다가 지옥 가는 것입니까? 진짜 부끄러운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 백성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심판 날 하나님 앞에 가지 못하고 저 천국 백성 되지 못하고 지옥 백성 되는 것이 그것이 가장 수치스럽고 무서운 것이지. 남자의 손에 죽건, 칼에 찔려 죽건, 맷돌에 맞아 죽건, 어떤 식으로 죽든 그것이 무엇이 중요합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살다가 허무하게 자기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9. 교훈과 적용
9-1. 아비멜렉이 주는 교훈
아비멜렉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의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주지요.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 그 아버지가 기드온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여야 됩니다. 그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그것 고백해야 됩니다. 내가 왕 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또 누구도 내 인생의 왕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가 내 인생의 주인입니다. 날뛰다가 죽어 버렸습니다. 회개할 기회도 하나님께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놓치고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자기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인생 되면 안 됩니다.
자, 아비멜렉이 이렇게 된 이유, 그 근본 뿌리가 누구에게 있습니까? 기드온에게 있지요. 아이를 어릴 때부터 신앙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거꾸로 가르쳐 놓아서. "기죽지 마라고. 첩의 자식이라고 너 기죽지 마라고. 어디 가서 누가 너 놀리면 네 아버지는 왕이라고 하라"고. 아비멜렉이라고 이름 지어 가지고 그렇게 가르쳐서 아이를 이렇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9-2. 신앙 교육의 중요성
여러분, 우리는 자녀들에게 알려 줘야 됩니다. 우리에게도 스스로 가르쳐야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다. 내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이 신앙 교육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것이 나를 살리고 우리 자녀를 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이 힘들 때, 어려울 때, 돈이 부족할 때, 그들의 인생에 위기가 닥칠 때, 아버지에게 와서 손 내밀지 말고 하나님께 손 내밀라고 가르쳐야 됩니다. "네 아버지가 하나님인데 왜 나한테 자꾸 얘기하냐고. 너 하나님과 해결하라고. 너 인생 문제는 하나님과 해결해야지."
너 육신의 부모는 너 대학 공부시켜 줬으면 끝났다고, 그것으로 끝내야 됩니다. 더 이상 이어가면 자기 아버지가 진짜 하나님인 줄 알고 제 아버지가 왕인 줄 안다니까요. 자식 망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교훈을 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기드온 이야기 끝입니다. 기드온 이야기가 사 주에 걸쳐서 이렇게 끝났습니다.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잘못 배운 아비멜렉이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키는지, 자신도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나라도 공동체도 모두가 쑥대밭을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드온의 마지막 40년의 실패가 이런 큰 풍파와 불행을 만든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내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만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무릎 꿇고 부르짖게 하여 주시고, 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해결되고 풀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