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특강 1 -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1장)
갈라디아서 1장 7절 말씀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이제 갈라디아서 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살펴보았고, 이제 갈라디아서 1장에서 6장까지 함께 보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논쟁적인 책입니다. 다툼의 여지가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쓰여질 당시 배경이 그렇게 편안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교회 공동체가 편안한 상태에서 편지를 쓴 적도 있고, 갈등과 분쟁과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편지를 쓴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갈라디아 교회는 분쟁과 분열이라는, 사실 이단 문제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지만 이단보다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어본 다른 복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조금 더 선명하게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갈라디아서 공부를 통해서 우리가 정말 복음이 무엇인지, 지금 이 시대에 잃어버리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갈라디아서 공부는 6장까지 다섯 번에 걸쳐서 함께 나눠 보려고 합니다.
1. 갈라디아 지역과 바울의 사역
1-1. 갈라디아 지역의 범위
갈라디아 하면 한 지역이 아니고 하나의 지역대를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라고 하면 어느 한 지역에 있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 퍼져 있는 지역의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편지를 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갈라디아 지역이 폭넓게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은 어디를 말합니까? 바울의 1차 선교 여행 경로 중에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갈라디아를 말하면 이 네 지역을 함께 머릿속에 떠올려야 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요즘 지도로 보면 터키 지도를 펴 놓고 봐야 합니다. 북부 갈라디아도 있는데, 지금 터키 지도의 북쪽에 앙카라, 현재 터키의 수도가 앙카라인데, 앙카라를 중심으로 한 북부 갈라디아 지역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이 말하는 갈라디아 지역은 중남부, 남부 갈라디아 지역을 말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이 네 지역을 갈라디아 교회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린도 교회라고 할 때는 고린도라는 특정한 지역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라고 하면 데살로니가라는 한 지역이 있었고, 빌립보도 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는 이렇게 폭넓게 퍼져 있는 전체 지역을 갈라디아 지역 교회라고 부릅니다. 요즘 우리가 교회라고 말해서 그렇지, 사실 그 시대의 교회는 가정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가정 교회들을 그 당시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갈리아인과 로마의 행정 구역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면, 갈리아인은 여러분들이 세계사에서 많이 들어봤던 켈트족을 말합니다. 현재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독일, 서유럽에 정착한 켈트족인데, 그 사람들을 갈리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마가 이들을 완벽하게 제압합니다. 특히 기원전 25년이 되면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갈리아인들을 지배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을 정착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현재 터키 지역의 북쪽에도 정착했고 남쪽에도 정착했기 때문에 북부 갈라디아, 남부 갈라디아라고 부르는 것이고,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곳은 남부 갈라디아 지역입니다. 지리 공부는 이 정도로 하시고, 조금 더 지리 공부가 필요하시면 신약 개론 공부를 하시면 거기 충분히 잘 설명된 내용이 나옵니다.
1-2. 바울의 첫사랑, 갈라디아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 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바울의 첫사랑입니다. 바울의 첫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때 이 지역을 여행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실 1차 선교 여행 때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사람들이 그를 끌어다가 성 밖에 내던져 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거기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죽은 줄 알고 내쳤는데 바울이 다시 일어나서 다시 그 성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던 그곳, 바울에게 1차 선교 여행 지역은 정말 첫사랑이었습니다.
원래 첫사랑의 지역은 두 번 가고 싶고 세 번 가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첫 번째 열정을 불태웠던 그곳, 2차 선교 여행 때도 갑니다. 3차 선교 여행 때도 갑니다. 사도행전 16장 6절을 보시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성경에서 갈라디아 땅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자동적으로 우리 머릿속에는 네 지역이 싹 지나가야 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이렇게 네 지역을 떠올려야 합니다.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때 에베소로 가고 싶었는데 성령이 막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로 못 가고 유럽으로 건너가지 않습니까? 유럽으로 건너가기 전에 바울이 1차 선교 여행 했던 곳을 다녀갔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1차 선교 여행 지역 갈라디아를 사랑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22절, 23절을 보시면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바울의 3차 선교의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에베소 아닙니까? 2차 때 못 갔던 곳 에베소, 거기가 3차 선교의 목적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3차 선교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또 어디를 지나갑니까? 갈라디아로 또 갑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이곳을 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공식적으로 갈라디아를 몇 번 방문합니까? 세 번입니다. 1차, 2차, 3차 똑같이 바울은 항상 거기가 마음이 쓰였습니다. 바울이 그곳을 첫사랑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쓰였던 것도 있고,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 중에 들어 있지만 그곳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따랐기 때문에 이걸 또 정리 정돈해 주기 위해서 그곳에 방문했던 일도 있습니다.
2. 바울의 사도권 변호
2-1.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도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는가. 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이렇게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여러분이 바울의 서신서를 읽으면서 이 첫마디를 읽으면 태도가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어떤 마음인 것 같습니까? 좀 편안한 마음입니까, 아니면 좀 경직되어 있는 마음 같습니까? 경직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을 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 쓸 때는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좀 부드럽지요. 굉장히 부드러웠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편지를 쓸 때는 부드럽지가 않습니다. 상당히 경직되어 있고 어쩌면 목소리가 좀 한 톤이 높아져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쓸 때도 고린도후서를 쓸 때도 마찬가지인데, 고린도후서 1장 1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절과 갈라디아서 1장 1절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찾아보십시오. 무엇입니까? 자신의 사도권을 어디에서부터 난 것이라고 표현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왜 이런 말을 굳이 써야 될까요?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 쓸 때는 자신의 사도권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기의 사도권을 하나님으로부터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사도권을 가지고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걸 적극적으로 지금 바울이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라고 하면 당장 누가 생각납니까? 우리는 사도라고 하면 사도 바울을 하도 많이 들어서 바울밖에 생각나지 않지만, 그 당시 바울의 시대에 사도라고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12제자 중에 한 사람은 죽었지요. 가롯 유다는. 열한 명의 사도 중에 한 명을 더 추가를 했습니다. 맛디아라는 사도를 한 명을 더 추가를 했습니다. 그때 그분을 추가할 때, 그분을 새롭게 세울 때 조건이 있었습니다. 사도의 조건이 무엇이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실 때부터 우리 앞에서 승천하실 때까지 우리와 함께 다니던 자들 중에"라고 했습니다. 즉 적어도 사도가 되려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부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자여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자기들끼리 정한 사도의 기본적인 약속이었습니다.
2-2. 논쟁의 대상이 된 바울
그러면 바울은 사도입니까, 아닙니까? 그런 기준에 의하면 사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환상 중에 만난 것이지, 예수님이 이 땅에 육체로 활동하실 때는 예수님을 뵌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권 문제는 항상 논쟁거리였습니다.
바울은 가짜다, 한 복음을 전하는 저건 가짜라고, 요즘 말로 하면 저 목사 안수도 안 받았고, 저건 신학도 제대로 한 것이 아니고, 저건 어디 가서 어디서 무슨 풀 뜯어먹다가 와서 이상한 소리 하느냐고 사람들이 이제 그렇게 바울을 비난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이 사람들이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을 에베소에 가서 들은 것입니다.
2차 선교 여행 하다가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씁니다. 그리고 이어서 갈라디아서를 씁니다. 그런데 그때 갈라디아서를 쓸 때 그런 이야기를 듣고 1장 1절 첫머리부터 자신의 사도권을 강하게 변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사도권을 준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졸업장을 받아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사도 됨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그 말씀이니 다시 1장 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이제 느낌이 좀 더 오시지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꺾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에게 바울을 데려다가 이러저러 하라고 하니까 아나니아가 "아유 이 사람은 안 됩니다" 하니까 "이 사람 바울은 이방을 향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의 사도 됨은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확정된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 이야기를 지금 강하게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3. 은혜와 평강
2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좀 더 경직된 모습으로 자신을 얘기하고,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여기 나오지요.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그러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라는 것은 우리가 네 교회를 얘기했지요.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이 네 교회를 떠올려야 합니다.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이러이러 저러저러한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은혜는 내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일방적으로 그 방향이 하늘에서부터 아래로,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와 평강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 은혜를 입은 자가 평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평강. 세상이 주는 평강이라 하면 조건은 내 필요가 채워져야 평강입니다. 돈이 없는 자에게는 돈이, 건강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건강이, 인간관계 회복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채워져야 평강이 온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와도 다시 없어지면 다시 평강 잃어버리고, 없어지면 또다시 불행하고, 사람이 왔다가 떠나면 또다시 외롭고,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은혜가 임하면 그 평강은 영원한 평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지난번에 살펴본 데살로니가인의 교회 성도들에게도 은혜와 평강을 말하는 이유가, 어떤 조건으로 인한 평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에게 부어지면 평강은 자동적으로 오는 것이다, 절대적인 평강을 가지라고 이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평강은 함께 쌍으로 항상 바울의 서신서에는 세트로 함께 오는 것이다,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절과 4절을 보면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와 평강을 여기서도 얘기했지요. 그다음 4절을 보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감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다 읽어 보면 갈라디아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서신서에 1장에 감사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그렇고 후서도 그렇고 로마서 그렇고 다 감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급했던지 감사를 논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뒤에 보면 나오지요. 이 감사를 얘기하고 있을 정도에 지금 한가한 상황이 아닙니다. 이 교회에 편지 쓰면서 우선 사도권부터 명확하게 못 박고, 그다음 은혜와 평강을 말하고, 그다음 감사 대신에 바울의 편지에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다른 특별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4. 그리스도의 대속
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리적인 얘기입니다. 사실 바울의 편지에서 첫 서두 1장에 이 교리적인 얘기를 쓰는 편지는 갈라디아서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4절을 잘 보셔야 합니다. 이런 교리적인 것을 보실 때는 주어와 동사를 먼저 분리해야 합니다. 주어와 동사를 분리해야 그 안에 내용이 툭툭툭 떨어져서 나옵니다. 주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사는 주셨으니. 무엇을 주셨습니까? 자기 몸을. 그러면 이 문장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셨으니", 이것이 이 문장의 핵심입니다. 그렇지요.
즉 예수님을 바울이 소개하는데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주신 분이다. 그런데 다시 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그렇지요.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다음 목적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 이유가 되겠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를 건지시려고 자기 몸을 주신 것입니다. 또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두 가지 목적이지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또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을 해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 순종한 것이다. 이유는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다. 즉 예수님이 너희에게 이런 분명한 분이라는 것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이, 과연 너희는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고 있느냐, 이것을 지금 바울이 첫머리에서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뒤에 있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공동체에서, 이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 아닙니까? 하나님이 교회 주인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신앙하고 있는 대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머리 되신 예수님의 명령대로 따르는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모르고 예수 믿는다면 그것만큼 미련하고 그것만큼 불쌍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5. 다른 복음은 없나니
5-1. 복음에 물타기 하지 말라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놀랐다는 겁니다.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너희가 어찌 다른 복음을 따르는 자가 되었느냐,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그리고 7절을 보시면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한 가지 복음입니다. 복음에 뭔가 더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더하면 그것은 진짜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장 8절, 9절을 보시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말에 무언가를 더해서 "은혜로 구원받았고 또 뭔가를 더하면 더 좋아", 이건 복음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받았고 또 너희가 이걸 하면 더 좋아",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순전한 복음 하나입니다. 복음에 물타기 하면 안 됩니다. 복음은 오직 그 은혜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지 어떤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순전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물타기 한 거짓 복음, 다른 복음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갈라디아 교회에 어떤 자들이 들어와서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까? 우선 그 당시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율법 교육을 받았지요. 율법 교육을 받은 자들인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체성은 크리스천인데 유대인의 전통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의 전통은 무엇입니까? 모세 오경이 근거가 되어 있는 율법적 전통입니다.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그 대표적인 가르침이 할례입니다. 할례를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 예수 믿는 것 좋은데 그리스도의 은혜, 좋은데 할례를 더해야 돼. 그래야만 구원받을 수 있어. 이게 복음에 물타기 한 것입니다. 이 다른 복음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할례 행해야 한다. 음식법 준수해야 한다. 절기 지켜야 한다. 이런 것들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로마서 11장 6절을 보면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은혜는 순전한 은혜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더해서 구원받는다, 무엇을 더해야 구원받는다, 이건 전부 거짓 복음입니다.
5-2. 행위 구원의 위험성
이 거짓 복음의 특징이 두려움입니다. 진짜 복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평강과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고 구원받은 자로서 감사함으로 섬기고 기쁨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의무는 기쁨과 감사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구원받기 위해서 섬기고 구원받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이단들을 보십시오. 신천지 이단이 가장 많이 얘기하는 것이 십사만 사천입니다. 이 십사만 사천이 시한부 종말론자들,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가장 많이 꺼내오는 것이 십사만 사천인데, 이 십사만 사천은 한정적인 수다, 그래서 이 십사만 사천 명 안에 들기 위해서 너희는 노력을 또 하고 또 하고 가중해서 노력하라, 계속해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계시록 공부할 때 배웠지 않습니까? 십사만 사천의 진짜 의미를, 12 곱하기 12 곱하기 천, 배웠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천지 이단들은 십사만 사천을 그냥 원래 숫자대로 그대로 가르칩니다. 그러니 이 십사만 사천에 들기 위해서 너희는 노력하고 경주하고 또 최선의 경주를 다하라. 그러니 그 사람들이 자기 전 재산도 팔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지요.
해외에 나가 보십시오. 해외에서 지금 전도하는 집단은 신천지 이단 집단밖에 없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신천지 전도가 어려워지니까 다 해외에 나가서 그 사람들이 참 열심히 전도합니다. 열심히 열심히 전도해요. 왜 전도하겠습니까? 십사만 사천에 들려고. 그래서 그것이 다 썩은 복음이고 그것이 자기 영혼을 죽이고 그것이 자기 영혼을 갉아먹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위해서 이것을 하면 구원받는다, 이것은 전부 다 가짜 복음입니다. 행위를 통해서는 어떤 행위도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나의 죄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할 때 구원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이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은 그 이야기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을 보시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그 사랑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내쫓아야 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겁이 나고 두렵고 내가 이것 안 하면 벌받을 것 같고 지옥 갈 것 같고 이렇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는 심각한 공동체입니다.
5-3. 저주를 받을지어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 말하는 가장 수위 높은 경고입니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 이런 얘기 잘하지 않는데 여기 썼고요, 9절에 또 합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복음에 물타기 하기만 해봐라, 저주받아 죽을 것이다, 지옥 갈 것이다, 그 얘기입니다.
가끔은 이렇게 원색적으로 한번 얘기해 줄 필요도 있습니다. 바울이 많이 배운 사람 아닙니까? 가말리엘 문하에서 그는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고 헬라인 중에 헬라인이고 로마인 중에 로마인이며 로마인의 수사학을 잘 배웠던 아주 탁월한 문장가이고 탁월한 웅변가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렇게 원색적인 얘기를 합니다. 왜 이렇게 쓰겠습니까? 이렇게 얘기해야, 이렇게 원색적으로 말해야 사람들이 알아먹으니까, 점잖게 말해서는 못 알아먹으니까, 저주를 받을지어다 두 번이나 계속해서 반복해야 알아먹으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못 들으니까.
바울만 그런 얘기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11장 3절을 보세요.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렇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저주를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7장 5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제가 저주받으라고 한 것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것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그런데 참 바울도 용감하지요. 용감하게 이런 얘기를 전하고 정말 본인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으니까, 이 교인들을 사랑하니까 이렇게 쓴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이렇게 편지 쓴 것입니다.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이 교인들이 진짜 저주받으면 안 되니까 이렇게 쓴 것 아닙니까? 부모가 자녀들을 책망할 때, 부모가 자녀들을 초달하고 책망할 때 정말 그 말 하나하나에 자녀를 사랑하니까 자녀에게 심한 말도 하는 것 아닙니까?
바울이 이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저주를 받을지어다 두 번이나 말하고 나서 바울이 이제 좀 마음이 그러니까 이런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좋게 하려면 내가 이런 말까지 하겠느냐, 하나님 앞에 서 있으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으로 그가 복음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6. 바울의 자전적 고백
6-1. 전통에서 말씀으로
그다음 넘어가서 바울이 자기 과거 얘기를 하지요. 13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즉 바울이 다른 복음 따르고 있을 때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과거 시절, 자기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절, "유대교를 믿는 동갑내기 많은 자들보다" 동갑내기는 동년배를 말합니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열심히 있었다. 유대교를 믿었던 시절에 바울은 말씀을 따른 사람이 아니었고 전통을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가 진짜 복음을 따르기 전에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었을 때, 그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내가 아니었고 전통을 따르는 나였다. 유대인의 전통.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전부 다 전통이고 가짜였고 말씀 밖에 있는 것이었고 다 버려도 되는 아무것도 아닌 쓸데없는 것이었고, 이제는 내가 유대교를 따르지 않고 진짜 복음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 그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이지요.
여러분 여기는 유대교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 오늘 우리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같이 신앙생활하고 있지만 전통을 따르는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씀을 따르지 않고 전통을 따릅니다. 교회는 무엇 하나 만들기가 겁이 납니다. 무엇 하나 만들기가. 예를 들어요. 교회에서 바자회를 한번 했다고 합시다. 한 해 바자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바자회를 없애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한 5년 내지 10년 정도 그것을 쭉 이어서 하다 보면 그것을 이어서 하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 버리면 그분들의 일을 빼앗는 것 같아 보여서 그것을 없앨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운동회를 했다고 합시다. 매년 한 20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운동회를 위해서 1년 전부터 준비하는 운동회 매니아들이 있거든요. 운동회를 사랑하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그런데 그런 분들 때문에 운동회를 없앨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직이 교회가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서 이제 그 조직은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조직을 해체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 조직을 해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조직에서 동고동락하고 함께 웃고 함께 울고, 나는 죽어도 이 조직을 놓지 못한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그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조직을 없앨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얼마나 경직된 조직인지. 오늘 있다가도 내일 사라지는 것이 들풀의 영광과 같은 것인데, 교회 공동체가 이것도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지, 또 없다가도 다시 할 수도 있고 하다가도 다시 없앨 수도 있는 것이지, 그 전통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 의미가 있습니까? 주로 그런 분들 보면 말씀 붙잡고 살지 않고 그 전통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 붙잡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아무 의미 없는 것을 붙잡고.
우리는 유대교의 전통 붙잡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유대교의 전통 붙잡고 사는 자들이 그것이 망한 것입니다.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몇 천 년 전 기록된 구약의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어도 새롭지 않습니까? 그 말씀이 오늘 읽어도 우리에게 힘이 되고 능력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사는 존재이지, 인간이 만든 조직과 전통, 그것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유대교에 열심일 때 유대교의 전통에 지나치게 열심이었다, 그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지금.
6-2. 아라비아에서의 훈련
다시 15절 한번 보세요. 오른쪽 페이지로 넘어와서 "그러나." 그러나 그랬습니다. 과거에는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서, 지나치게 믿어서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었습니다. 15절,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 그때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을 때 아닙니까?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이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 그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 속에 나타나기를 기뻐하셨을 때. 그러면 지금 바울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려면 바울 속에 있는 그 무언가가 사라져야 되잖아요.
바울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유대교의 전통이 있지요. 바울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자기 욕심이 있지요. 자기 열심이 있고 자기 자아가 있지요. 그것이 사라져야 내 속에 나타나기를 기뻐하시는 그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과 8절을 보시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려면 내 욕심과 자아가 우선 죽어야 합니다. 우선 내 안에 아무것도 없어져야 합니다. 내 안에 욕심과 정욕이 다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말씀으로 거할 것 아닙니까? 지금 그 말씀입니다.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 바울이 그것을 느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일하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면 바울이 그것을 비워야 되잖아요. 자기 욕심을.
그다음 보십시오.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과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어디로 갔습니까? "아라비아로 갔다가."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거든요. 거기서 무엇을 했을까요? 자기를 비워내는 자기 훈련을 한 것입니다. 경건의 훈련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 속에서 친히 나타나서 임재하시고 일하시기를 원하고 내가 이제 너의 주인 되어야 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바울이 친히 깨닫고 캐치하고 난 이후부터 바울은 혈육과 의논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과 먼저 의논한 적도 없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이 처절한 자기 투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 훈련이든 자기를 비워내는 훈련이든, 그리스도께서 자기 마음속에 임하셔서 그리스도께서 바울 속에서 친히 나타나 일하시기를 기뻐하실 때 자기 몸을 내어드리는 훈련, 내 영혼과 내 마음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훈련.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것이 과연 잘되는가, 잘 됩니까?
여전히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도 내 자아가 살아 있잖아요. 내 주인이 나 자신 아닙니까? 내 원하는 대로 내가 성질 부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할 말 다 하고, 원하는 것 다 해버리고.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서 일하기를, 나타나기를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잘 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서 나타나기를 기뻐하실 때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철저하게 거기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독대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기를 비워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만나서 갑자기 확 바뀌어서 갑자기 사람이 어느 한 순간 바뀌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처절한 자기 반성과 회개와 투쟁의 시간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 없이 어떻게 그가 위대한 사도로서 반열에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도 이런 훈련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시간의 훈련들이.
하나님은 항상 우리 속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일하기를 기뻐하시고,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그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속에 있는 내 자아를 비워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보니까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랬지요. 바울은 이 그릇이라는 말을 주목했을 것입니다. 그릇은 깨끗하게 비우는 것이 목적 아닙니까? 자기를 깨끗하게 비워놓은 것이지요. 깨끗하게 갈고닦고.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자기를 깨끗하게 갈고, 이제 이 깨끗한 곳에 주님 오십시오, 주님 말씀 채워주십시오 하고, 그렇게 평생 동안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6-3. 3년 후의 예루살렘 방문
18절을 보니까 "그 후 3년 만에", 그 후 3년 만에 그랬지요. 그러니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을 거주하고 "그 후 3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15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바울은 예수님 금방 만나고 사도들에게 막 쫓아가서 내가 변했습니다 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를 비우고 그리고 사도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을 것이지요. 용서도 청하고 회개도 했을 것입니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제 자기 얘기를 한 것이지요.
결론
이제 갈라디아서 1장 이야기는 이렇게 우리가 정리합니다.
중요한 것, 오늘 제일 중요한 것. 복음은 물타기 하면 안 됩니다. 복음은 오직 순전한 한 가지 복음,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이 한 가지 외에 다른 것은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은혜를 입은 자가 그 은혜 위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지, 섬김과 봉사가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자전적 고백을 들으면서,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서 일하려고 하실 때 나를 비우고 나를 복종시키고 깨끗하게 비워내는 훈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긍휼이 오늘 우리에게 함께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짓된 복음, 다른 복음을 전하는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유대인들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가짜 복음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구원을 위해서 할례를 더하고 구원을 위해서 선행을 더하고 구원을 위해서 섬김과 헌금과 봉사를 더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거짓 복음에 속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두려움에 몰아넣고 있는 그 거짓된 영에게 속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직 물타기 한 복음이 아니라 순전한 복음 한 가지만 붙들고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임하려고 하실 때 우리 속을 온전히 비워내게 하여 주시고, 깨끗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 삼아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